슬픔과 어제의 전우치에 대한 행동 역학적 우주론: 서양철학사, 푸코를 중심으로
나를 중심으로 플라톤을 보면, 플라톤의 무엇을 기억하고, 따라하고, 흉내내고, 관급선거의 한 장치로 여겨야 할 지 모르게 된다. 서양 영화는 그것의 동인 것 같고, 한국 영화는 그것의 정인 것 같다. 서양 영화는 패드라나, 비슷한 것처럼, 자동차를 타고 비상하는 것이고, 동양 영화는 반복강화되는 리얼리즘 속에서 숭고한 언덕의 카페 겸 팬션에 멈춰서는 것 같다. 그것이 어제 비서각에 있었던, 판옵티콘 현상의 정체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과유불급이 없는가? 공자님이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과한 것은 유불리에 상관 없이 급한 것이고, 이르는 것이라고. 사랑이란 과한 것인가? 아니면, 악역도 하고 싶은 어느 모델 지망생의 영화적 의지인가? 그것의 미장센 같은, 추운 겨울날의 고층 빌딩의 환기통. 정신 넋나간 듯 찍은 뒤에. 바순 협주곡. 한국 이름 박선미. 다큐멘타리 기법으로. 그렇게 나는 심은하와 인터뷰를......
플라톤의 철학은 나에게는 책갈피와 같지만, 처음에는 책이었고, 후대에는 반복되는 지침서이지만, 그것들의 전공자나, 서양의 아카데미에서는, 대학이 설립하는 디엠제트나 판타스망고리아 같은 것이었다. 아주 수천년동안. 우리는 순전히 두뇌활력적으로 문법과 문장, 대화의 인텐시브니스가 있는 사람이 대학 행정도 잘 보고, 청소도 잘하고, 사람들 외교적인 응대도 잘할 것처럼 여긴다. 그것은 우리의 무정란적 상태와 비교해서 그렇지, 끝없이 입어야 하는 스타킹이나 레깅스의 유행 번짐, 소재주의를 이탈하는 철학자 섹스투스적인 가능성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 어디에선가, 고대 토테미즘의 원리를 관념의 만능이라고 분석하였다. 어디까지 관념이 아름다운 아카데미이고, 어디서부터 관념의 만능주의가 횡횡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같은 관념이라면. 버클리라고 하면, 찰스 버클리도 있고, 버클리 음대도 있다. 그것은 푸코라는 철학자가 갖는, 서양 철학자들이 동양들보다 우월하게 질주하는 패드라의 마지막 장면의 기대이다. 나름대로 대학의 이념이 되고,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나, 하나님의 눈빛의 희미한 연장이랄 수 있는 카메라 앞에서, 영화 속에서, 그것의 실제적 의지와 쉽게 바뀔 수 없는 꺽고집 같은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버클리는 우리가 경험주의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영국에서, 단순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것의 두가지 패턴. 그러니까 실재론과 유명론의 틈바구니에서, 현실적 실재론도 거부하고, 영원한 경험과 관념의 대립 관계도 거절하였다. 결국에는 소박한 경험적 현실을 생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그의 기술이라면 기술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스피노자의 사과나무와 묘한 테이블 테니스적인 관계이겠는가? 아니겠는가? 버클리는 데이빗 흄에게 영향을 주었다. 관념은 정념이 되고, 정념은 센스있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그것들의 맹렬한 중력체이다. 사무엘 존슨이 버클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함께 걷던 사람 중에 한 명이 묻자, 눈에 띄는 돌맹이를 하나 차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했다는 것이 유명한 일화이다. 그렇다면 버클리는 토테미즘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독일 관념론의 유럽 철학사에서의 수태고지 같은 것을 해냈던 것일까? 플라톤을 읽으면, 도리어 현대 같고, 버클리의 철학은 스톤헨지 같다. 아니 스톤헨지에 견학 가는 작은 명문 미들스쿨 어느 추운 날의 학생들 같다. 관념은 어떻게 곰 토템, 호랑이 토템이 되는가? 그것은 스톤헨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추우니까. 따뜻한 털옷이나, 가죽옷을 입고 싶으니까.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인성이 경험과 현실을 거쳐 보다 인성 그리고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견성성불, 처음부터 견성이었고, 오직 성불하는 짧은 시간에서나 직립하는지 모르다는 것. 그것의 헤테로를 다시금 설명하면, 평생, 고대 노예와 원시 짐승으로 살 운명이지만, 두산 베어즈나,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할 때 만큼은, 그러니까 마스코트의 모자를 하고 친구들과 가족들과 경기장에 갔을 때는, 가장 인간다운 프린스의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 푸코는 사실 지식의 역사라는 책도 집필할 예정이었다. 그것의 던지면 스테인레스 스푼이 무수하게 부딪히는 철제들의 터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들이 많아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 그것까지 집필했다면, 유혹이 어마어마했지만, 하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랬다면 체적이 모기만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쯤, 콤파스처럼 멋지게 걸을 수 있을까? 철학자라는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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