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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어떤 웨폰풀한 상상: 박정현 플라스틱 플라워. 이광수의 비릿한 초장을 두고

by 마음대로다 2012. 11. 26.

어떤 웨폰풀한 상상: 박정현 플라스틱 플라워. 이광수의 비릿한 초장을 두고

 

 

 

 

 

 

 

 

나는 사뭇 완전한 남자이다. 남자는 외출하고 오면, 잘 씻어야 한다. 씻고, 돕고, 티비 보고, 아이를 낳으면 돌보는 것까지 아무런 성가심이나 철학적 자기 의식 없이 가는 것이고, 아이가 소황제로서 중국의 거대한 대지에 천천히 잠이 들면, 비로소 커피를 마시거나,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다. 남자가 집에 와서도 전투기 같으면, 그 모든 것을 같은 전투기성이지만 여자가 다 하고, 남자를 응원할 수도 있다. 모습은 보통 가정집이지만, 의미는 농구장의 이충희 같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투기임을 알지만, 몸에서 기계가 들어나 보이는 듯한 착시, 아직 기회가 아니거나, 생이 아니라는 선험적 종종합 통각에 입각해서, 철회하고, 다시 말하지만, 집에 와서 씻고, 돕고, 티비 보고, 아이를 돌보는 것까지 아무런 불만 없이 하는 것이다. 대개의 남자는, 여자의 잔소리를 들어서야, 그러니까 잔소리의 존재상각, 위치우위의 핑퐁적인 인터섹슈얼하라스먼트를 치르고 나서야, 씻고, 청소를 하지 않는 것을 두고 전쟁을 치르고, 티비를 보는 것을 사수하며, 심지어는 저녁에 술을 마시기 위해서 다시 나가기도 한다. 그것의 영화적 감각. 영화 본투킬을 보면, 흥미로운 접나비들이 많다. 심은하만 아깝고, 심은하만 보고 싶을 뿐이다. 

 

나는 어떤 남자인가?

 

 

 

만일 이광수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소설가였다면, 사람들은 수많은 과학 기술을 갖고 있어도, 셀 수 없는 과학과도 같은 인두세와 종두법을 실시하고 있어도, 서로군정서, 문학이 아무리 김현을 위시한 외국 문학 출신의 평론가들을 양산하더라도, 이광수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의 의식은 가공할 만 하다. 독재국가와 민주국가, 봉건주의와 근대주의가 대립하는 것이지만, 독재국가는 야만상태와 대립하고, 봉건주의는 고대노예제를 상대하고 있다. 봉건은 신비로운 수원 화성 같다. 그나마 저지먼트가, 어떤 상대적인 안타고니스트의 죽음 이후에 가족들과 그들의 리얼리즘들에게 피상적으로나마 동의가 이뤄질 때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가 금세 봉건으로 후퇴하고, 독재국가 시절의 향수가 되살아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저지먼트.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비평의 호사는 내가 테이프 커팅을 하면서, 동시에 여럿이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인데, 무슨 산수 하이마트의 개장식인지 모르겠으나, 고통의 서로 얼굴과 거울 같은 입체이기 때문에 그러하리라, 이광수는 박정희의 독재국가와 오브젝티브 코렐라티브 한다. 여기서 오브젝티브는, 서로 붙어 있다는, 제 삼의 인간의 탄생을 전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것을 바닷가식의 수학적 균질성으로 의미해왔다. 결코, 아무렇게나,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말의 호사가 있었대도, 의미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브젝티브는, 바닷가에 비키니 입은 처녀가 보인다는 그라비아식이다. 그라비아는 스팰링이 어찌되는지 모르겠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평양 가는 길의 전개는, 이미 그것의 징후를 엿보이기는 했지만, 처음 신문에 연재하는 것인지, 틀을 잡고, 내용을 채우는 것이라, 틀 속에 누군가 죽는다 해도, 뜬금 없는 개인적 경험의 내용들을 삽입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계몽주의적인 비평들의 삽입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결국에는 같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은 소설가 개인에게는 조금도 살아보지 못한 우주이자 집이다. 그것의 초심자 같은 느낌이 여실하다. 수많은 학창이 있고, 여기서 창이 이광수에게는 꼭 창부 창인 것 같다. 박정희는 국군통수권자로서, 더러운 관료가 군부권력과 완전한 결탁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슨무슨 탱크며, 대포, 특공부대, 경찰권, 심야통행금지권, 장발단속권, 노래 가사 검열, 멜로디는 검열할 수 없으니까, 마치 이광수 같은, 이광수는 노래 가사는 삼뚝서득하게 넘어갈 수 있으나, 멜로디가 음산하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가 쿠데타 카드를 들고 등장했는데, 언젠가 그런 날이 와야 한다면, 이광수가 너무 낮으니까, 드넓은 광주천에 날아든 왜가리처럼 기가 막히니까 이런저런 안좋은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기사를 양산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거대한 소설가가 다시 나온다면, 군인과 경찰, 후배 정치인들이 깨끗하고, 활기차며, 솔론과 같은 명예롭고 역사적인 인물이 될 형이상학을, 소설은 판치 형이상학이니까, 하여야 할 것이다. 가수 박정현도 좀더 키가 더 클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슈퍼 디셈버 가왕전에도 나올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바닷가의 오브젝티브 코렐라티브, 그라비아의 그라비아로서 넘어가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그와 같은 말이 맞음을 확인받을 수 있겠는가? 평론과, 제도의 입각점은, 평론은 출판권과 명성의 교환가치이니까, 소설 자체란 문장이 만지는 기생의 손목일 수 있는 것이다. 분명. 누구도, 이광수의 독재를 가타부타 귀타귀 호불호할 수가 없다. 다만 그가 그래서는 아니된다는 것. 좀더 투각해도 된다는 것. 좀더 센치해도 된다는 것. 좀더 기억해도 된다는 것. 산만하고, 지하실의 관념에만 매몰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 그것을 말할 수 이제는 없는 것이다. 너무 nzn 늦은 것이다. 박정희의 나쁜 관족들이 세력을 다시금 웨폰풀하게 획득해서, 여자들이 다시금 덜된 로망스 기사도 서양 소설의 한 희생양으로 되는 템포에 덤핑된다고 하다면,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형이상학은 더이상 약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상상은 이것이다. 감상은 하나님과 같으나, 쓰기는 죽기보다 이광수보다 못하다면, 수십 세대를 거쳐서도, 그렇다면 우리가 무장을 하고, 관족들이 무기를 갖게끔 한 다음에,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남자가 집에 와서, 전투기를 탔으면서도, 씻고, 청소하면서 대화하고, 아이가 있으면 아내보다 잘 돌보고, 아이가 다시금 중국의 거대한 대륙처럼 잠이 들면, 비로소 음악을 틀고, 재즈,   

 

 

 

 

그렇다보니 전두환은 차단되고, 어느새 세상이 좋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