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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한신대에서 공부하다가, 미니시리즈 전우치전을 보았다면......

by 마음대로다 2012. 11. 22.

한신대에서 공부하다가, 미니시리즈 전우치전을 보았다면......

 

 

 

 

 

 

 

 

나의 금사님이신, 김경재 교수님과 군대에서 편지 연락을 주고 받다가, 군대에서 그렇게 교수님과, 영문학과 교수님과 편지를 주고 받는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자신의 신작 간행물을 내게 보내주신 적이 있었는데, 믿음의 항아리 하는 제목의 것이었다. 나는 그때 태조 이성계였기 때문에, 그 나머지 조선왕조의 역사적 가치에 어울리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민밋하고. 기도문이며. 따지고 보면 성경의 기도문이 현란하지 않은 관계로. 범주에 최선을 다하면 딱 그 정도의 문장이 나오지만,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드라마 m 같은 것을 좋아했고, 장년들의 심판을 받을 지언정, 청년들이 심판하는 것을 좋아했다. 심판이라는 것. 판단이라는 것. 그것은 법정에 항소하고, 상고하고, 법정 드라마를 찍지 않는 이상, 마치 전우치처럼, 문예학적 액션의 삼단일 같은 접근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다. 나는 등장인물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진의 그룹에서는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드라마는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음을 맷돼지처럼 돌파하는 혼다 엑스일레븐이 있었다. 심판이라는 것. 판단이라는 것. 우리들의 국문학 전통에서는 생경한. 갑자기 길모퉁이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클래식의 갑작스러운 나즈카시이 주제 같은......

 

나는 미분에도 강했지만, 하나님의 재산과 사람들과 통치 같은, 적분들을 항아리 전법으로 진격하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다. 김경재 교수님이 그와 같은 기도문 서적을 출판하신 것도, 나의 제자 신현균 학생이 어째서 저 아름다운 강원도 양구로 근무를 가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정말, 우리 현균이만을 사랑하시는가? 한신대 신학과 신현균이라는 레포트를 받잡고, 떨렸으나, 양구 이십일사단 백두산 부대에까지 근무한다면, 단지 한신대만이 아니라 이 나라가 단 한 사람과의 양명학적 관계에 처하게 되는 것인가? 주자학적인.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그 생각은 다른 데에다 두고, 사람들의 성화에 기도문 서적을 기획하게 되고, 새로 항아리 어떤 제목의 책을 출간하시고는, 원동기는 잊고, 내게 그것을 보내주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나는 그때, 데리다의 입장들, 최인훈의 화두, 헤겔의 법철학 비판을 읽고 있었다. 법철학 비판에서의 인륜과 가족에 관한 장이 그렇게도 마음을 움직였다. 클래식은, 한국의 박수근 화백의 화강암을 만나서, 겨우 몇 편이 되지 않는 양복과 자동차들, 커피 잔으로 진행하여 소모되는 것이구나, 이런 나중의 거대한 저지먼트 저지먼데이가 그것과 순수논리학적인 양과 질면에서 하나였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항아리인가? 어제의 우리 예쁜 민희 시리즈 전우치는.....

 

채플은 어제 드렸다. 보았다. 그러나 여진은 남는 법. 너무 쉽게 쓰여진 시처럼 일본인 교수나 만나는 것이 신학 수업에 어찌 없겠는가? 채플이 좋고, 사람이 하나의 화성을 이루는 것이 좋았다. 화성. 우리가 있는 곳도 화성이었다. 그리고, 개인의 주자학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로 넘어간다. 신간 서적들. 그리고 정기간행물들. 그것에는 페이크 야간 통행증 같은 재미와 통과하면 통과되는 현실성이 있다. 주여, 나는 다녔사오나, 우리 아이들이 그와 같은 다윗의 한증막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 민화의 그림이 마지막 카툰처럼 정갈하고, 해몰이 풍경이라는 것은, 소녀가 저녁 햇빛에 바늘과 실을 갖다대어 꿰려는 그림이었다.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그때는 마음이 돌이었기 때문에 덜그랬고, 나중에 그럴 것이다 했는지. 남몰래 뜯어다가, 내 책상 전면에 붙여놓았다. 사람들은 나의 그와 같은 예술지상주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책장 한 편에는, 책으로 앵글의 마지막 면을 장식하는 학생의 시각적 앵글이 있겠는데, 두 반라의 소녀가 한쪽 소녀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집고 있는 프랑스 회화의 겉표지 그림이 있는 화첩을 갖다 대었었다. 주변 사람들은 웃을 뿐, 민감해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아침 기상의 독립을 획득하는 차원에서 자취방을 구했을 때 했던 실내장식들이었다. 그런 미세 양명의 현상들은, 신문보다는 대량생산이 아니지만, 대량생산이라고 무조건 가치하락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의 일상적이거나 포장 범주적인 예술 애호에서는 그냥 가능할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가? 신학생이........

 

항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수원에서 신보로 클래식 모음집을 하나 구입해서 오는 것과 같다. 드라마는 연장과 같다. 성경과, 헤겔 철학과, 채플과 기숙사 식사들은 연장한다. 친구 얼굴은 백의 힘을 갖고 있고, 함께 나누는 커피는 이백의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수하게 떨어지고, 계단을 내려오고, 커피를 엎지른다. 클래식은 엎지르는 것인가? 아니면, 쌓는 것인가? 아직도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출한 사람이 없다. 그와 같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엎지르는 쪽이다. 그리고 고전주의건 낭만주의건, 정확히 경계를 나눌 수 없다. 만낭만주의라는 쪽이 가깝고, 영화라는 절벽의 안개가 플라톤 동굴의 비유처럼 그 무엇의 그림자를 내비친다면, 우체부는 편지를 도저히 거기다가는 부쳐줄 수가 없는 것이다. 영채는 월화의 눈물을 보고, 자기도 눈물을 월화의 죽음에다 흘리운다 했는데, 그것은, 기독교 목사가 보기에는 수학적인 의미에서 타락만 있을 뿐인 사탄의 제국인 것이다. 클래식 모음집 하나가 마음에 들면, 그렇게도 연장하기가 좋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옵티컬 커퍼서티가 사람들 모두에게도 비슷한 수준으로 있는 줄 알았다. 서울에서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이, 채플이 없는 것이고, 함께 부르는 찬송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음악 헌정이라는 장편을 서울대 입구 전철역 근처의 자취방에서 썼는 지도 모른다. 광주에서건, 학교에서건 자연스러웠던 것이, 서울에서는 없더라는. / 그렇다면 상상해보자. 국문학과를 가서, 비오는 날, 아침에 안개 낀 날, 마음의 여러 주자가 자기 자신의 횡경막 안으로 습윤하는 것을 느낀다. 마치 주희가 한국에서는 진현군으로 있다가, 중국의 대지에서 오직 인문학과 국문학에만 매진할 때, 이름을 주희라고 고쳐도 만회가 되지 않는 갑갑함 같은?........ 정말 남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심판에 시달린다. 왠지 모르게 덜한 것 같고, 패기가 없고, 여자들은 생각도 배움도 없이 목소리만 크다. 그것을 그냥 선천성 고향 상실성 같은 위약적인 플라시보 진단 식으로 해결을 해보아도, 고향에 한번 돌아가서, 사람들이 중국인과 같은 것을 확인하고 와도, 호라, 보라, 게으르고, 방귀 뀌며, 말에 감추는 것이 많고, 목사의 설교는 늘 인류학자보다 못하지 않은가? 하고 돌아오면, 밥맛이 없고, 청경채나 먹고, 여자는 잘 차려입었으나 후진타오 같다. 그 존재. 시차. 자기 마음이 싫으니, 대상이 무조건적으로 싫은 임마누엘 칸트적 물자체. 나와 비슷한 항아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친구 한 명과 사는 후배적 선배였는데, 나이는 선배, 학년은 후배였던. 방안 한쪽에 테이프들을 예쁘게 진열해 놓고 있었다. 거기에 가면, 내 것처럼 꺼내서 듣고, 한 시간을 보내고, 두 시간을 보내고 했었다. 그리고 붙이는 테이프로 주인이건 손님이건 머리에서 떨어진 머리털을 제거하는 것이 재미 있었다. 나는 방에서 해본 적이 없어서. 그의 집에 손님이 찾는 것이 하루에 한 번이라면,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되었다. 나는 폐쇄하고 싶어서 폐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늘 항아리 같았기 때문이다. 국문학의 현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상대성, 고맹, 친구의 자취방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예술 대학 예수 학과의 자취방 구석에 변태적 치장이 엿보이는, 정신현상학적 신학생의 방에 있는 것일까? 상대성이라고 말한 것은, 그 사람도 신학생이기 때문이다. 어디쯤에서 국문학은 자기만의 영원한 드라마의 형상을, 드라마의 전변에는 관심 갖지 않고, 갖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드라마를 안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성과 속처럼. 마르치아 엘리아데. 한번 완독하지 않았으나, 선배 같은 후배처럼 늘 보는 사람인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