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종문화회관에 두 번 가보았다. 국문학적 염상섭론
위의 제목만 가지고도, 마음이 힐러리어스해져서는, 헤이즐럿 말고, 커피 전문점에 가서 점원에게, 나는 세종문화회관을 두 번 가보았다. 국문학적 염상섭론 주세요 하는 것을 상상한다. 문장은. 어디서. 피곤한 알바생은 헨신하고는, 우리 마음의 서울대 국문학과의 알파벳을 초콜렛에서 구하면 구할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한다. 염상섭도 알고. 위의 문장에 코가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힐러리어스해져서는 터져나오는 것이란 것은. 세종문화회관도 가본 적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우 한국식의 아카데미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이 좋더라, 다시 말하기, 뻔한 것 말고, 관념의 적어도 큐비즘을 지난 것으로다가, 염상섭의 삼대를 읽고, 세종문화회관의 건축가와 건축년도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염상섭은 노출이 되어 있고, 내게, 건축가는 워낙에 내가 나의 건축이 강성하다보니까, 그림자처럼 있었고, 나는 그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경동교회도, 나의 것을 훔친 것처럼 여겨졌고, 그렇다고 잘 지은 것도 아니라는 불만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건축학적 경쟁의 으뜸을 보았던 것일까? 마침내, 불국사와 서석대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이번 국도, 그것은 이미 따뜻한 서울의 연구 동아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벗어나지 않을 방도란 것도 있을까? 현대해상보험의 건물이 좋다고 했는데, 다시 보니, 굉장히 빽빽한 틈으로다가 있었다. 나는 가까이에서 그것을 보았고, 그것의 내 것으로 손에 쥐어주는 양만 보았던 것 같다. 누군가 사진을 찍고, 상을 받았다는데, 자기는 잘 모르겠다는 평을 그제서야 이해를 했다. 전라도 말로, 오살나게라는 말이 있다. 과하다는 뜻이다. 면각체들이 다른 건물들을 따라가다보니까 오살나게 된 것이다. 그것의 몇 개 안되는 것 같은 것을 상상해본다. 그러나 건축은 결정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고, 모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 봉사하는 대왕조개의 운명을 걷게 된다. 아주 빠른 속도로, 아주 바른 소리로, 젊은 남녀들이 바지락 소리를 내면 좋다. 이런 김영삼이.^^ 바지락 국물의 비밀은 차갑게 해도 맛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바지락 국물은 차갑게 먹어도 맛이 있다는 것. 평행이론. 삼파장처럼 인간의 앨범을 정리하면, 좋아하던 소녀가 국민학교 때에는 코틀리 러브가 없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서로 쑥스럼이 많고, 남자는 남자와 여자는 여자와 다니고, 여자는 선배를 좋아하는 파행, 이사를 가서 헤어졌는데, 서로 좋아했다는 것도 밝히지 않은 채,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 것을 현대해상보험을 지나는 길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평행이론. 존재론이란 것은 고고생물학과도 같아서, 매우 형이상학적이지만, 우리들의 물리학이란 이처럼 생활세계에서는 단순 평행이론일 때가 많다. 그래서 한번 좋아한다는 것은 헤겔의 절대지가 되는 것이다. 이전투구라는 것. 그것의 서울 일간지에서의 레파토리는 엔니오의 무작정 슬프고 보는 음률 속에서, 헤겔의 절대지를 한번 겨냥해보는 것일 것이다. 주여 해가 지지 않게 해주소서. 그곳에서도 해가 지면, 나는 그만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상실한 채 홀로 성화되고 말았다. 대개의 경우는 일찍 수원을 향했고, 거기서도 해가 지면 수원을 거쳐 한신대에 이를 때는 저녁 깊은 시간이 되었었다. 국문학적 염상섭론이라는 것은 내가 천재적이라는 뜻을 가리키며, 그것은 다 아카데미의 정리된 틀 위에서 가능하다는 뜻일 것이다. 결정적인 난점은, 가슴에 권징이 발생하는 사람이 천재를 무조건 좋아하는 여초지역의 인민들이거나, 충분히 아카데미 되었는데도 죽음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는 버려진 이카루스의 날개들일 것이란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에 내 소설 눈사람에 등장하는 용가리를 보기 위해서 갔었다. 그때는 서울 시절이었고, 시대 정신의 거대한 퉁소 소리 속에서, 작품의 자기적 연속이라는 비가시적인 건물, 한국 사람의 에스에프적인 의지를 응원하기 위해서 갔던 것이다. 아이들이 그렇게도 많았고, 나는 삼자의 눈에는 늘 신비로운 사람처럼 비쳤을 것이다. 그리고 등장 인물이, 헬로우 하면서, 외국인 기자,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사람이 안에 있는지 확인하듯이, 그러자 아이들이 따라서 헬로우 답을 했다. 얼마나 고급 오토바이의 것처럼 응답성이 좋았는지 모른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마태복음의 주장도, 그 근거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영화 속의 인물이 안녕? 혹은 여보세요, 안에 사람 있습니까? 물으니, 관중에서 아이들이 안녕? 안녕? 답을 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라면, 뭔가 부족할런지. 그것은 현대 음률 속에서, 최근의 26년 여자 주인공이 격렬한 액션 씬 중에서 했던 대사와 흡사하다. 뭔가 부족해. 부족해. 그리고 그렇게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가 무의미하게 해가 지려고 하자, 광화문이라는 것은, 이렇게 보면 해가 지는 곳이란 뜻도 있는지, 나는 눈사람이라는 소설을 썼고, 그때 인터넷 통신이 된다고 여겼던 황현정 아나운서에게 이메일이던지 아니면 소포로다가 보냈었던 것 같다. 반응은 없었다. 얼마나 좋았을까? 남산 같은 데의 카페에서 만났더라면. 그렇다면 그 근처의 풍경이 죄다, 지각이 융기해서 바닷가에 있던 조개 화석들이 대량으로 노출되는 사태를 가져왔을까? 정말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나중에,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이겠지만, 무슨 영화제에 갔었다. 대종상 영화제였을 것이다. 지금은 십이월이래도 그저그렇지만, 그때는 년말만 되면 <폐소공포증> 같은 것이 있었다. 가진 자도 아닌데, 잃을 것도 없는데, 세포가 가득 혼자만의 새 부대 속에서의 리로만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리도 없었고, 남기도 없었다. 세종문화회관에 사회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갔었고, 이런저런 재미 있는 배우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둘 다 모두, 건축가의 의도에 합하는 것이다. 커트라인이란 무엇인가? 표가 없어서 못들어가는 것인가? 물론 그것도 남기가 없는 아름다운 시절에는 고통의 죽음에 이르는 분명한 가지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커트라인이라는 것은, 이광수의 문학성과 같아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너무 빨리 그것을 사용한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그리고 논리적인 더 이상의 문장은 말할 수 없고, 다만 보여주기의 콘트라스트, 대조의 방식으로 이러한 것도 있었다는 식의, 이데적인 보여주기, 그것은 이념인가? 아니면 반영인가? 그것만이 남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계단이 촉촉한.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들에게 떳떳한. 그럼, 계단은 누군가 열선을 깔아서도 떳떳하지. 몸과 마음은 찬바람에 적당히 노출시키면서 촉촉한. 그것만으로도 무슨 영화가 되는 것 같은 모퉁이. 부퉁이. 자퉁이. 국문학적 염상섭론은 삼대에 걸쳐, 이광수와 연대하기도 하고, 이문열을 낳기도 하며, 나와 비슷하기도 한다. 나는 이때, 음악적으로 현현하는데, 나의 숱한 평론들 뿐 아니라, 소설들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는 광화문에 해가 지는 것을 감독하는 사람도 아니고, 현대해상보험의 눈에 들어오는 몇 개의 계단적인 프레임과 세종문화회관의 기둥을 매치시키는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예술가적 건반짐 같은 것. 주장 다음에, 제도적인 느자구에 옷깊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경건한 것처럼 주희의 주장 완장을 찰 뿐인, 죽음의 전면성 같은 것. 국문학적 염상섭론은 이와 같은 거룩한 계보에서만 측정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형이상학을 조직하기 위해서 삼대를 처음부터 섬세하고 면밀하게 조사할 수 있는 높은 대상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일까? 김윤식은 미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서울의 국문학적 염상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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