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황희는 누구인가?

by 마음대로다 2017. 8. 7.

황희는 누구인가?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전기 의자 같은 미국식, 교수형에 처하는 우리식, 그와 같은 죄인의 마지막이 아니라, 한번 메타포나 은유, 그것이 그것이겠지만, 콘테이너가 내려오는 것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을 할 때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피곤하고. 피곤해서. 펜타곤 같다. 그러나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렇게 메타포가 따라 붙는다. 만일 남자의 자격이 따라 붙는다면, 아주 작은 자격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그렇게 쿵쾅, 지금 생각해보니 영락 없이, 혹은 소망 교회, 정말 한번 가봐야 겠다는, 우리네 교수형의 느낌 비슷한 것이다.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고, 계속해서 한 부분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황희는 어떻게 보면, 조말생, 하륜과 더불어, 등장 인물만 놓고 보면, 북두신권의 이름들 같다. 혹은 어디 종로의 깡패 술집의 단골 손님들만 같다. 황희는 깡패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인덕이 있고, 책을 한 시간 이상 읽을 수 있으며, 음악하는 여자와 가끔 만난다. 그것은 추석날마다 저주 받은 듯한 그의 동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된다. 자기들은 누리지 못해도, 그들의 형이, 혹은 아우가, 음악하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오면, 그렇게 안부 인사를 하고 싶은 것이다. 형님. 다녀오셨수? 그래. 어째 재밌었수? 그저 그렇지. 하지만, 음악하는 여자를 만날 우주를, 은하철도 구구구 기약할 수 없는 그의 후배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재밌었겠지. 일부러 재미 없는 척 하는 것이겠지. 너무 과격하게, 음악하는 여자의 다른 남자 친구를 해코지하지 않기로 하자. 그것은 정말이지 갑자기 없던 등급도 비급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황희는 이름만으로 그런 파괴력을 갖고 있다. 일부러 스님이 겨울 장작을 준비하는 도끼의 것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제 티비에서도 그랬다. 동그랗게 앉아서, 폐백 먹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피라미드처럼, 알면 알수록, 캐내면 캐낼수록, 캐내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우리나라 시방 삼세를 보는 것 같은 것이다. 황희는 그런 것을 갖고 있다. 아무런 부러울 만한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초월적인 아름다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들녘에 나가, 가을 논과 밭을 보고 오고, 저녁에 나무들이 그늘을, 그러니까 그렇게 빛을 산란하여 움직이면, 십년이 길고, 이십년도 한꺼번에, 그리고 삼십년을 기준 삼아, 그렇게 두번이면 육십년이 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한동안은 베토벤의 전원을 그렇게 좋아했었다. 얼추 나의 전원 느낌과 들어맞았다. 우리 옛날 사람들은 거의가 전원 느낌을 갖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시간을 내서,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손을 잡고 전원의 느낌을 억지로 한번 가져보지만, 우리 옛날에는, 우리의 옷이 절반 가량은 전원으로 꿰매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을 것은, 그와 같은 황토길에서 비행하는 우주선처럼 날아왔다. 약간 상한 것 같은 것은, 요즘에는 먹으면 백퍼 탈이 나지만, 옛날에는 신기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약간 상한 것 같은데? 그러면서 함께 다들 먹었다. 그러니까 음악이 바뀐 것이다. 얼마나 건강했으면, 외장이나 내장이. 황희는 처음부터 그와 같은 곳간지기와 같은 느낌을 암시하고 있다. 오래 전의 김유신과 같은 터미놀로지인 것이다. 김유신은 무신이 되었고, 황희는 문신이 된 것이다. 가을이 되면, 어린아이 때는 떨어진 감을 하나 더 쳐먹고는 생명으로 뛰쳐나갔지만, 관리적으로 적당히 어두운, 그것의 원인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그는, 그리고 우리들의 사십대는 좀더 블랙 패널이 증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젊었을 때는, 배가 고프면 배가 고팠지만, 지금은 다만 어지러운지 모르겠다. 신호가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굉장히 정확해진 것일까? 우리 어렸을 때는 육체적인 상처나 아픔까지도, 희망이 그것의 고통을 중화시켰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좀더 정확한 생각과 판단이 아니고서는, 젊을 때와는 다른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힐 공산이 큰 것이다. 그것은 더 어둡고, 빛은 있으나 좀체 낙관적이지 않다. 낙관을 많이 찍은 것도, 그래서일 수도 있다. 어렸을 때는 불필요해 보였고, 미감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나이 먹은, 혹은 황희처럼 애 늙은이의 호사가들의 낙관주의였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황희는 오래 살았고, 그것은 경이로운 은행나무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과연 곡물에 대한 금기가 있었을까? 스치는 듯한 개그 프로그램에 그와 같은 메시지가 있었다. 아주머니가 경찰에게, 씨를 뿌린 경험은 있고? 갑자기 전혀 맥락이 필요치 않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곡물에 대한 금기는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다만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이고, 곡물에 대한 금기는, 도저히 계산도 생각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황희는 변절자일 수 있다. 그가 오래 살고, 다음 해에도 살고, 사람들에게 소를 제공하고, 때로는 소를 잡고, 그것은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도 이상도 필요치 않는, 단순한 연장 같기 때문이다. 황희는 어려서 잘 먹지 못해서 황달에 걸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누가 아버지이고 어머니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 무조건, 아무나 차려주면 많이 먹고, 차린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머리는 비상하여서, 사서삼경을 거의 외울 정도가 되는 것이다. 먹을 것을 준다는데,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외울 의지가 별로 없지만, 양반인지 아닌지, 동양인인지 아닌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는 황희가, 가을을 열 번 넘기고, 더하여 일곱 여덟 번을 넘겼는데, 불쌍하고 모자란 의미에서 황달의 아들 황희로 여겼다가, 드디어 가을 하늘의 우주 같은, 그런 정승감처럼도 보여서 황희가 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청년들이 죽는다는 것은 인과가 맞지 않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나이가 많아서, 그런 피할 수 없는 절망 때문에 죽는 것이다. 전쟁을 당연시하면, 청년들이 죽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겠지만, 남의 전쟁까지 가벼이 오늘 내가 덮고 잔다는 것은, 매우 콘테이너 하역 작업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굉음이고, 사무엘 코울리지가, 성경의 잠언을 동조하여서, 지혜의 최고 매질을 언급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깨끗한 죽음에 걸맞는, 편안한 죽는 약이 개발되어 있다면, 우리는 황희와 결혼의 복잡한 계산의 건물을 미쳐 지나치지도 못하고, 소년왕, 소녀여왕처럼 비극적인 화려함으로 생을 마감할 공산이 크다. 그와 그녀의 온 몸에는 상처가 많고, 마음에는 세상의 모든 길처럼, 일찍 죽는 길이 잘 닦여져 있는 것이다. 황희라는 급한 이름에는, 청희라는 이름이 감추어져 있다. 전쟁은 결코 죽음의 향연이 아니다. 계산도 하고, 끊임없이 강화하고 협약하고 그렇다. 무기가 부족하면, 시일을 끌고, 항복할 줄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적이, 그 어리고, 작은 얼굴을 갖고, 맨주먹으로 달려드는 것을 본 다음에는, 청희가 아름답고, 이성계보다 위대한 이름이라는 것을 자기가 더 잘 알면서도, 황희로 개명한 것일 수 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보급품도 없이 와서는, 좀체 겨울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