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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피라미드의 한국말적 어원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17. 8. 23.


피라미드의 한국말적 어원에 관하여







우리는 학교를 잊고, 미드를 보네마네 이상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일드가 마냥 재밌는 것도 아니고, 중드가 좋은 것도 아니고, 프드, 독드, 영드, 본 적도 없지만, 그렇게 열거하면 한드를 본 다음에는 일드나 미드를 보는 것이 맘 편한 교양이들의 세상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처럼, 다만 반미적인 이데올로기에 따라 미드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미드를 좋아하는 것들의 저능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인이고, 그것은 자본주의이며, 그것은 넵튠, 그러니까 비틀즈의 렛잇비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관심의 대상이 겨우 되고, 그러다가 마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 반드시 손 봐 줘야 하고, 한드가 재밌고, 한국 영화 한영이 영원히 재밌다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미드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의 비교처럼, 요코하마의 풍경과 시카고의 풍경처럼, 세포의 영향, 상호주의에 입각해서, 분명 뜻이 있고, 불쌍하고, 가을에는 모두가 불쌍해지는 것이니까, 그것은 분명 그들 만의 주소와 세상과, 누군가의 문학적 기교처럼, 만인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미드에 쏙 들어가서, 아무 생각 없이 학교 가고, 세상에 나아가고, 창문을 열고 비행기를 한 번 날려보고, 출근하고, 미드 보고, 시험 보고, 미드 보고, 미드를 계속해서 만들고, 자본주의적 일차원적 세계 법칙에 따라, 그와 같은 불의 순환 고리에 하나로써 자기 침화가 되어간다는 것은 분명 혼자만의 비극이 아닌 것이다. 한드는 보면 드라마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그것이 표출되어 있다. 어쩌면 세계 각국의 드들을 갖고 있다. 어쩌면 세계 각국의 드들이 최종적으로 한드를 만들어 보면서 죽어간다고 이야기를 지어도, 왠지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일드와 친하다. 참 일드는 친숙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건물 바깥으로 사람이 걸어나오는 일은 거의 없고, 물이 되어, 얼음이 녹은 것처럼, 흐르다가, 수증기처럼, 아지랑이처럼, 그것의 철제 구조물들, 반듯한 시멘트 건축물들 사이로 사라지는 운명들이다. 애니메이션만 죽자사자 살기가 가득하고, 어쩌면 사무라이 정신이 일드 속의 사무실에 있지 않고, 애니메이션 안에서만 불타는 형세. 그것은 드라큘라나 뱀파이어의 성리학이 자기들이 아니면서도, 자기들의 현상학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에 우리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의 종합적인 현상이 바로 미드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도 미드를 좋아한다. 세계 오피니언 리더가 바로, 미국 조금, 유럽 조금, 일본 다수, 한국 민중, 중국 만주, 세계 중국집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미드를 좋아한다는 것만, 그것만 소문이 나도, 미국 사람들은 좋아하고, 마음이 뿌듯하고, 우리가 우리들의 드라마를 이라크나 이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좋아하는 것처럼, 새롭게 그와 같은 특이성이 알 수 없는 위로를 얻는 것이다. 미드는 절정의 도시 공간이 없다. 그러니까 드라마를 갖고 세상을 나가다가, 살이 타고, 뼈가 타고, 기억에서 모든 드라마가 지워지는 완벽한 고시엔 구장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들 영화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도시 전체가 침울하고, 도시 전체가 마쎄도니아, 릴리함메르, 뮌휀, 퀘벡, 돈코자끄, 벌린, 빠리, 론든, 돈호세, 쌀바도르, 쉭쌀, 보카치오 같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 세포가 그들 도시를 만든 것처럼, 그것이 틀린 인과도 아니고, 우리들의 도시가 그들 국제 도시보다 아름답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그림자를 보다 보면 깜짝 정신이 들고, 놀라고, 그들의 실제 시간이 경이롭고, 참담하고, 남의 일이지만 안타깝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한 문장 바깥의 일을 알지 못한다. 거의 모든 것이 나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노지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일이 전체, 의식의 흐름의 전부이다. 그래서 비상한 신형 영문학적 문장에 매혹되고, 뱀파이어면 오직 교훈과 재미에 걸쳐, 재미만 취하는 고대 로마의 비평가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겨울은 친구들과 스키를 타다가, 여름을 또다시 그와 같은 미드를 보면서 지내고, 앙상블을 이루는 미영을 보다가, 대학도 겨우 사년인데, 육년을 보내고, 십년을 보내고 나면, 그들은 그렇게 한국의 거대한 콜루쎄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보면, 그렇게 지옥여장군을 따라, 한반도에 상륙해서 약탈하고, 호사를 누리고자 하나, 미국 한 개의 주에서, 그와 같이 초원시의 국내법 실정법 세계헌법이 작동을 멈추고, 새로이 작동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의 율법을 하루라도 빨리 작동시키고자 하나, 죽는 것은 그들의 마음 뿐이고, 마음은 생명, 마음은 양식, 그들이 추종했던 지옥여장군은 갈수록 한국말만 늘고, 오히려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배움이란 무엇인가? 사탄이 대낮에 타들어가는 모습 밖에,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즐겁고, 여선생이면 더욱 즐겁고, 집에 돌아가도 즐겁지만, 네메시스 놀이에 깊이 빠져 있는 사탄들은 배움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문자 놀이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들은 흥분하면, 카니발리즘이 발동하는데, 무슨 비상헌법이나 주식 시장에서의 싸이드카 같은, 이것들은 흥분하면 사랑하고, 오래 참고, 참 사랑하고,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동어반복 놀이의 극단적인 뉘앙스에 빠지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고고학에, 한국어적인 가을 풍경에, 가장 가까운 것이 미드라고 해도 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 중에 미드를 좋아하는 부류가 있다는 것은, 그래서 그렇게 심각한 현상이 아니고, 그다지 극단적인 외래 어종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는 철학적 격언은 틀린 말도 아니고,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지만, 그렇게 값어치 없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미드를 보고 좋아한다는 것은, 다만 인지한다는 말에서 그치지 않고, 미드 인생들과 그들의 민수기, 인간들의 숫자를 연민하는 한국 오피니언 리더의 공동체적인 신앙 고백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쓰지 않는 문장들, 한 문장들, 그것들을 오래된 영문학적 모범에 따라, 조직하고, 구성하는데, 늘 이상하게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한다는,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미드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은 분수를 아는 것이다. 일드를 안다는 것. 일드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은 약간 한국으로의 귀환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한드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은 한국어나 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미드에게 지고, 일드에게 참패를 당하는 것이다. 미드 중에 으뜸이 바로, 피라미드이다. 드디어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북치고, 말편을 붙잡고, 장구치고 꽹가리 치니, 드디어 저마다의 바울의 눈에서, 징이 쳐지는 것이다. 불쌍한 피라미드. 불쌍한 피라미드. 불쌍한 피라미드. 이렇게 백 번을 말해도, 그것의 불쌍함이 조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파리미드는 이처럼 어원을 갖고 있고, 자칫하면 한국어의 어원이 될 수도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