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어디까지가 픽션일까? 나는 거의 모든 것에 시큰둥해 있는 인영양을 보다가, 섹스를 하기로 결정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처럼 결정되어 있다. 목마른 사슴이, 시천주, 혹은 노천명, 그렇게 지나다가다 활을 쏘는 것은, 지능이 거기서 다 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지능이 다 하지 않았을 때 만나고, 결혼해서 지능이 다하는 것을 경험한다. 결혼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교육제도는 부지런한 교육을 통해서 그것을 드러낸다. 우리 사는 세상 모든 드라마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프랑스 파리와 같은 섹스이다. 우리가 보통, 알랭드, 음식에서 파리가 나올 때가 있지 않은가? 만들 때 들어갔다면, 무심코 먹는 일에서는 발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다 만든 음식에, 여름 날에 더위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그제야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얼마나 실낙원을 경험하고, 노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도 아닌데, 좋은 그림을 보는 것처럼 꽉 찬 것을 경험하고는, 영국 경험론, 도시를 쫓기는 두 남녀처럼, 모텔 근처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데, 파리가 나온 것이다. 남자가 파리가 나왔다고 소리를 치나, 웃고 있고, 왜냐하면 행복하기 때문에, 그것은 다만 감각적인 이완에서가 아니라, 약속과 성취라고 하는 자연신학적 템포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준다 안준다 십년을 그러다가, 백제 십년의 시간만에, 마침내, 여자도 내심 그것을 얻고 나면 얼마나 행복하고, 생리적으로 내성이 강해져 있겠는가? 섹스를 하지 않으면 초조해지고, 그것은 너무 많이 해도 마찬가지이다. 섹스를 하지 않으면 건강하지 않을 확률이 높으나, 섹스를 너무 많이 해도 이탈리아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러다 서로가 좋은 동반자로서, 노래도 가끔 듀엣으로 부르고, 좋은 그림이 되다가, 드디어 프랑스 파리를 보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 파리를 조금도, 해충으로 여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버터플라이 이펙트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프랑스 파리는, 주자에게는 더 이상, 극동 지방의 두부 한 모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나다. 나는 여자가 사라지는 것을, 손으로 꽉 잡고 놓지지 않고 있다. 여자는 슬픈 사하라 속에서, 힘을 느낀다. 그리고 평소처럼 이야기를 진행한다. 어째서, 전교 일이등을 하는 아들은 어머니를 죽여야만 했을까?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굉장한 이슈라고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나는 과테말라라는 나라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모든 것이 데드싸인이 아니었을까, 둘은 현균탐정이라는 일본 드라마에 출연을 하는 것이다. 여자가 옷을 입고 나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이나, 인영양은 원래 그런 듯 재빨리 갈아입고 나왔다. 우리가 에스엔엘을 좋아하고, 엠심육이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했듯이, 그것이 불후의 명곡과 함께, 아주 좋은 숲을 이룰 때 우리가 산소의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듯이, 그런 것들과 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영양은 어느 드라마처럼, 재미가 없게 묘사가 되어서,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 섹스를 하지 않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너무 섹스를 많이 해도 감각이 당연히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영어로 섹스, 그러니까 감각인 것이다. 우리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혼 생활을 아마조네스의 신화처럼 한다고 해도, 아이들은 유모에게 맡기는, 그리고 합법적인, 거기다 간통 몇 번 정도, 너무 많은 감각의 뚜껑을 열고 나면, 세포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학창 시절의 슈프림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당연히 갈 수가 있다. 학창시절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비 오는 날에는, 사람이건 자동차건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는가? 그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는 인영양을 잃고 만다. 내가 너무 현충일, 볼케이노처럼 그랬는지 반성하였다. 아니면, 인영양이 나의 볼케이노 같은 열정에 호응하다가, 반대로 수녀하고만 했으면 했지 누구와도 안할 것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잠깐 오바했던 것이 과테말라의 티칼 마얀 유적처럼, 너무 창피한 것이었는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의 드라마나, 영화를 찍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동일시라는 것은, 그것이 정열이든, 혹은 순결이든, 우리의 세포인 것 같은 착각을 주고, 때로는 그런 착각이, 우리를, 우리들의 영혼과 기쁨, 소망 등을 불러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병인양요를 일으킨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인영양을 찾아야 하는데, 세미나가 그만 또 생기고 만 것이다. 정확하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정합, 혹은 부합이라고 한다. 그렇게 한낮의 도깨비들처럼 생겼다 사라져 갔다. 프랑스 사람들은 불국사를 좋아했다. 그것이 버려졌을 때는, 그냥 석굴암만, 조그만 진주 조개 잡이처럼 좋아했었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들도 한국인인 것처럼, 잘 조성하고, 다시금, 다리 아래로 물만 흐르지 않게 했을 뿐, 정확하게 재현하고 나자, 우리나라 사람들 뿐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불국사를 행여 자기를 어떻게 하는 것인 것으로 좋아하게 된 것이다. 빠리 바게뜨가 프랑스 회사가 아니라, 우리 회사인 것처럼. 몇 개의 단계가 있다. 1. 전부 프랑스 회사가 담당하였다. 우리는 문화 국가를 싫어하다가도 좋아하는 것이다. 2. 외국의 속성을 우리가 좋아하여서, 그 보이지 않는 속성을 우리식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그것도 선진적이고, 우리나라에 영국사가 있는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도 잃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야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상식에도 부합이 되고, 억지나, 편견, 또 다른 제인 오스틴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과테말라의 티칼 유적을 보면, 그렇게 파리처럼 생겼다. 어느 정도 아름답고, 선명하고, 밀림 속에서 우뚝 선 것 같은 것이, 다른 알레고리칼한 해석이나 설명이 없다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이번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과테말라 화산의 내용을 보면, 우리들의 무분별한 생각들에 적잖은 경종을 울린 것이 아닌가 한다.
인영양은 내게, 이 모든 것이 소설 같고, 아름다운 음악이 들린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섹스를 너무 안해서 들리는 환청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아듀. 나의 프랑스 파리.....
아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