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는 기독교신학을 하지 않더라도, 과연 지금의 문명을 기정사실로 하고, 구한말, 육이오 전쟁을 거쳐, 마침내 잠깐의 민주화투쟁을 해왔던가 돌이킬 반, 반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내 아들은 어딘가에서 방독면을 쓸 것이다. 일본 에이브이에서는 희화화되기도 하는데, 곳자왈, 이 세상에 가스가 없는 곳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두고 예언하는 무리가 많다. 얼마나 많은 말을, 그 무리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했으면, 그 무리만큼은 일본어에서 거의 그대로 들리는 것으로 지금까지 남아있겠는가? 우리는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다. 전쟁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만큼, 우리는 다만 편안하게 공부하다가 속으로는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상상이, 다만 소월의 시 하나만큼도 진정성을 획득하지 못하겠는가? 나는 분식점에서, 충분히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먹고, 공부를 결심하고, 내가 팔다리가 빈약하면, 누군가 공부의 미문에 앉은뱅이처럼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음식이, 하늘의 음식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은 사탄의 것이고, 사탄은 거의 모든 속성이 공부를 포기하는 것에 있으며, 아퀴나스의 전설처럼, 다만 할리데이비슨 팻보이, 그것의 역설, 그와 같은 내용으로나 나아가기 때문이다. 사탄과 동일시가 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다. 내가 끊임없이 사탄과 동일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은 일자무식하지는 않더라도, 다만 일자라도 세상에 써내지 못하겠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작은 오토바이라도 타서, 자기 있는 작은 소도시를, 소돔과 고모라 할 때, 그것을 나와 고모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난다고 해보자. 그것은 사탄인 것이다. 우리가 에스티세븐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탔던 오토바이를, 돌이켜 보면, 천사들의 전쟁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의 자유를, 사탄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고, 없는 팔을 흔들며, 나를 속으로 환영하고, 그처럼 빠른 속도로 배웅하고, 내가 영남 내륙 지역을 횡단할 때, 어느 지방 대학을 들어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저마다의 인애를 쏟아내면서 환영하고 했었는 것이다. 오직 그와 같은 형태로다가, 세워졌다가 사라졌던 대학들도 몇 개가 있다. 회전은 무서운 것이다. 착한 것은 회전과 같다. 회전으로써 골까지 가기라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다. 코스모폴리탄들은 오직 전쟁만을 경험하였고,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전쟁을 여행하는 것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나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아니까, 세상은 그 아름다웠던 겨울 빙판처럼, 봄날에 쩡쩡 갈라지는 것 같았던 것이다.
수애가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볼 때, 내가 어째서 수애를 사랑하며, 프랑스를 그나마 좋아하는가, 프로이트의 성리학으로다가 반성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째서 수녀가 되는가? 그것은 좋은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유 때문에 수녀가 되는가 할 것이다. 얼마나 사람은 대충 결혼하는가? 어려서부터 교회에 있었고, 출석 교인 한 오백인이 되는 제법 큰 교회, 주일 학교에서부터 함께 지내다가, 십오세, 십육세, 서로 남다른 우정을 과시하던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르는 대학교 나이 때에는 동거를 하고, 꼭 불교식의 동안거는 아닐지라도, 동거가 너무 소프트하고, 순대를 거의 그대로 사와서, 충분히 먹을 수 있을만큼 하는 것 같으니, 한 사람은 수행을 하고, 한 사람은 그를 돕고 하는 식으로다가, 마음만 있었지, 그렇게 동거를 하다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그처럼 오리엔탈리즘한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수애를 사랑한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그것의 무의식이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도 수애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만한 우리들의 아무런 경험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플러스 더블 플러스, 더블 홈 플러스이어야 하는데, 만난 적도 없다니까, 별 괴상한 생각들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국왕들이, 종기로 많이 고생을 했다는 것도 그 이유인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금수강산, 그리고 아름다운 말씨와,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서 왕으로 있으면서, 데카르트나 셰익스피어와 같은, 이중적인 국가의 표본을 창작해내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싹을 엿보고, 그것의 가능성을 몇 번을 고쳐 죽는 것까지 봐주다가, 지옥의 문이나 활짝 여는 것 같으니까, 왕조실록에 오르지 못하는 군소 국왕들은 종기로나 썩어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에는 자의반도 있을 것이니까 놀라운 것이고, 인체라는 것은 영원히 미스테리인데다가, 그런 것이다. 수애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그처럼 필사적인 데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얼굴이 흉해지는 피라미드의 마지막 계단. 정말이지 앞으로의 서양 문명은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피라미드가 될 공산이 높다. 다만 우리는 소도시를 나와서, 고모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누가 가타부타,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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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의 기억이, 그리고 민주화 투쟁의 기록이, 다만 어느 정도 떨어질 때에 대학교에서 만난다. 대놓고 한신대에서 만난다. 학교 다닐 때에는 미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수애처럼 중저음으로 아름다운 것들이 없진 않았다. 머리카락이 별로 없는 수학과 조교를 좋아했던 것도, 우연히 만났는데, 목소리가 또박또박한 것이, 그의 학과적인 콘트라스트의 면에서,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동그란 구멍이 촘촘히 뚫린 철판을 서로 갖다대고, 손가락을 어린아이처럼 집어넣는데, 뱀처럼 물어주고 빨아주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대게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언어적 패턴이 생길 수가 없다. 워낙에 욕망의 중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목적인으로 인해서, 내면적인 의식이나 감각, 생각의 스페이스가 협소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다른 곳에서 연극이나 소규모 영화를 찍는 것처럼, 내가 있던 양산리에서, 사람들이 함께 가던 엠티 장소를 넘어, 대부도나 제부도까지, 강촌에까지, 아무개는 속초에까지 갈 수 있는 프로타고라스가 된다고 하면, 목소리가 우리 수애나 남규리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태리 말도 좋고, 그렇게 좋은 구석이 많다, 프랑스, 영국 말도 좋고, 한국 사람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돼지 발음으로서의 독일 말도 좋지만, 그래도 대한 사람 대한으로 애국가를 부르게 되면, 한국말이 좋게 되는 것이다. 거북선에서, 나오는 모습이라는 것은, 슬픔과 기쁨의 태극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들 대학교 때의 피크는, 다만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고,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윤상의 그래도 안녕이라는 음악을 듣는 것이다. 맥반석 오징어는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반건조이기 때문에, 그것의 이렇게 찢고, 저렇게 찢는, 하얀 속사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생각을 못하게끔 만드는 것이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여자들의 가치가 높다. 남자들은 한번 가보기가 어려운 존재와 가상의 그리스 철학관에 먼저 다녀온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의 사진학적 음영을, 예수의 제자이고자 하나, 틈만 나면 생리혈을 쏟는 여자의 비유처럼,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잘 통찰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빠른 나이이고, 나는 대학교 때에, 마치 어떤 그루들처럼, 인도의 그들을 만나는 것처럼, 때로는 나의 라디오가 충만하고 행복하기까지 했었다. 그것의 노이즈. 그것의 리액션. 음악이 그때는 끊임없이 여자의 부족한 말재주를 대리보충해주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나와 같이 죽었다. 생각해보면, 사회복지학과의 매력적인 육체의 여자가, 나의 사귐의 제안에 별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혹시 철학과 마른 체격의 일년 선배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도 그런 처지였다면, 육체의 쾌락보다는, 마음의 바른 질서와 기억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이라는 것은 그처럼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다. 나의 튜브에서, 최근에, 뒤늦은 수애 사랑에, 이퓨 원츠 미인가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멜로디와 가사가 슬플 수가 없었다. 나의 사랑은, 어느 정도는 교사간의 정복 전쟁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것의 눈 앞의 확정적인 스페이스가 없대도, 말의 콩 두, 그러니까 찍어먹는 퐁듀가, 이미, 그것의 전경을 비쳐주기 때문이다. 그런대도 내가 여러 여자를 좋아하면, 한 여자마저도 어려 여자인 것처럼 좋아하면, 그녀에게는 세상의 제일철학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는, 헬레니즘 시기의 쾌락주의가 되었던 것이다. 음악은 우리를 침강시킨다. 베드로건, 안드레건, 예수 그리스도건, 다 빠져 죽는 것이다. 그것의 문둥(mundung)은 사실 우리나라 말이 아니었다. 국가가 없던 열대 지역의 마술사들이 사용하던 말이었다. 음악은 우리를 침강시킨다. 음악은 우리를 문둥. 베드로건, 안드레건, 예수 그리스도건, 따 빠져 문둥. 때로는 명사형으로 쓰이고, 독립적으로 뜻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었다. 우리가 거대한 대포의 포신 안에서, 탄환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그처럼 동시에 쫓겨나기 전에는, 우리는 얼마든지 카페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도가, 혹은 제부도가, 우리의 눈에는 오직 카페촌처럼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날 때에는, 서로 그랬다는 것이다. 네가 나를 만족시키면, 내가 너를 만족시키겠다고 말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또한, 과격하게도 하는데, 브라자 끈을 백미터 잡아당기겠다고도 하고, 남자의 몸에서 단 하나의 물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빨아버리겠다 하기도 했다 한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할 때, 내가 떠오르더란 것이다. 현균이는 돈걱정도 많지만, 그것을 피라미드의 미이라처럼 꼭꼭 싸매고, 철학적 본질을 좋아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근대식 건물에서, 붉은 벽돌, 마치 한신대학교의 미래적인 앞당김처럼, 여학생을 반드시 데리고 싸돌아다니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가지의 음악만 듣고, 그날 하루는 종칠 수도 있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다른 것은 조금도 감각이 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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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불타는 꿈과 같은가? 비슷하게라도 흉내내는 도반들이 많았다. 정말이지 동거가 많았던 것은, 여자가 혹은 남자가 학제적인 주장이 불분명하면, 결혼까지 생각하기가 뭐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끊임없이 우리는 엔조이냐고 항변하였었는데, 내가 무슨 재벌 집 아들도 아니면서, 그런 소리를 듣는 하이어라키가 항상 이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