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렇게 핵심적인 일을, 이렇게 죽기로 결심한 날로부터 십년 가까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다면, 얼마나 나는 나머지 생명들과 연속들에게 결과적으로 폐를 끼친 것이 되었겠는가? 그러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꽃들에게 희망을. 저 하늘에도 희망을.
미스터 션샤인을 지금 방영하는 시간인데, 어쩐지 더위를 먹어서인지, 근로 의욕이 떨어지고, 티비를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방영을 방관하는 처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너무 많이 떠들어서 그럴 것이다. 내가 욕하고, 혼자 떠들고,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운다. 임팔라나, 고라니들은, 주자가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을, 욕지기까지도 아까워하는, 차원의 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얼른 내가 패를 맞춰 본 것은, 우리에게 과연 독립이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직접적이었는데, 갈수록 간접적이 되었고, 지금은 그것의 간접성과 문학성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때부터 독립에 관한 간접성과 총괄성, 혹은 독립에 관한 선험성이 있었는지가 세관의 관심이 된 것 같다. 지금 미중 간에 관세에 관한 전쟁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영어로 많은 말을 하고 있는데, 잘 들리지가 않는다. 세포는 하나도 죽을 수가 없다. 경제는, 그리고 국가 경제나 국제 경제도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 대신에 감각은 죽을 수 있다. 보통 감각이 죽었다고, 아무개가 아무개를 상대로 말할 수 있는데, 문제는 감각이 죽은 것과 세포가 죽은 것의 연관 상태가 될 것이다. 미국은 정말 너무 부침개가 된 것 같다. 옛날에는 신화적인 동토의 제국과 겨루더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북한과, 남한과, 일본과, 중국과, 멕시코와 겨루지 않는가? 캐나다에는 맥길 대학이 있고, 나름 유명하다고, 그것을 누구에게 들었는지, 나의 꽃사슴 같은 귀에도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미국 영화의 감각은 죽고 말았다. 주자의 세포가 하나라도 죽을 수가 없으니, 결국에는 그 위대한 미국 영화의 전통과, 사무라이, 그리고 서부 영화의 콘티들이 죄다 시적인 상승과 전개를 잃고 만 것이다. 그 누구도 앙드레 가뇽의 음악을 영화 음악으로 차용할 수 없다. 누구도 앙드레 가뇽의 음악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불가사리 같다. 일종의 양명학적 계산법으로서, 사람들은 분명 가뇽의 사가 같은 음악을 감동적으로 듣는데, 그것의 영화의 장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계산법에 따르면, 불가사리에 잡아 먹힌 것이 되는 것이다. 미국은 넓고, 아름다우며, 자연이 빼어나게 아름답지만, 소녀가 흰 옷을 입고 나와서, 말을 나눌 만한 리처드가 없는 것이다. 일본말로 그것을 가리켜, 무리데쓰요, 무리처드데쓰요 하는 것이다. 리처드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 관한 오토바이 영화는 무수한 감각들의 죽음, 세포들의 마지노선만 같다.
사람들은 과연 전 세계가 그와 같은 감각에 실제로 노출되어 있는지 관심하는 것 같다. 우연한 표현이 그나마 높게 장식되어 있대도, 해석의 석가모니는, 해석에 관해서 따로 책을 찾아보거나, 할 것이 아니라, 가족들끼리 스스로의 아름다운 컴퓨터로 말하고, 주장을 반하고, 혹은 덧붙이면서, 서로의 판단이랍시고, 거실의 샹들리에에 그것을 매다는, 시간 같은 것들. 그것의 가족을 가리켜 석가라고 했는데, 그러니 석가는 불타는 개인의 무한한 자기 실험이기 보다는, 가족들간의 연대와, 그것의 높은 자연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드라마에 관해서 과연 사람들이 북한식 속도전을 갖게 되었느냐는 것이, 미국 사람들, 그러니까 유진 초이미들의 관심인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먹고 떨어진다. 밥을 먹고, 밥을 먹었다고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는 말은, 보고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이다. 외국 사람들이 우연히, 너무 많은 상차림이 아니라, 잘 지은 밥 한 공기와, 맑고 시원한, 영양 가득한 소고기 무국에다, 김치, 감자 간장 조림에다가, 맛있는 나물류 정도로다가 맛있게 먹은 다음에, 대체 무슨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서는 밥냄새가 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를 가기 전에, 그와 같은 날개의 시간 속에서, 후다닥 밥을 먹지만, 그렇다고 밥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다. 밥 냄새가 인간적인 냄새라고 한다면, 잘 씻기도 하고, 덜 씻기도 하고, 옷을 빨아 입기도 하고, 어제 그제 그그제 옷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입기도 했던 옛날 시내 버스를 상상해본다면, 남자들은 그나마 여자들에게 남자 냄새라는 섬김이 있었던 것이다. 여자에게서도 밥 냄새가 난다. 그것에서 멈출 것 같은 공포와, 잔인함, 염상섭이 필순에게 자유이자 동시에 족쇄로서 선물했던, 쌀을 씻는 손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의 시발점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어떤 민족이, 어떠한 계층이, 자기 몸에서 밥 냄새를 풍기겠는가? 일본 사람에게서, 그리고 중국 사람에게서 우리처럼 밥 냄새가 풍기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드라마 교류의 장이 오래도록 시작된 이래로, 미스터 션샤인 같은 드라마를 또한 오래도록, 이상하게 일본도, 중국도, 만든 것 같은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인형의 냄새가 났었다. 미스터 션샤인이 지금 그래서 위태로운 것이다. 우리도 인형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그렇게 서울에서 인형을 끌어안고 자는 것이 소원이기도 했었지만, 마치 성경처럼, 전쟁 같은 사랑처럼, 우리의 라디오에는 자기 주장이 강했던 당찬 밥냄새가 못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것이 눈처럼 녹기 직전의, 여자 상업 고등학교, 주산, 부기, 타자. 타자. 특히 타자. 영화에도 나왔는데, 황신혜, 정확히 보지 못했었다. 내가 동거라도 할라치면, 여자와 부둥켜 안고 보고자 하는 영화가 꽤 있다. 그 이전에는, 지금처럼 도저히 집중력이 생기지 않는다. 아파야 병원에 가는 것처럼, 여자를 안고, 존재가 약해져야 그것의 채널로써, 운하로써, 물이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여성 영화는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여성 탄압이 아직도 많은데, 그렇다고 하는데, 어째서 우리나라 영화는 그렇게 다른 나라에 비하면, 존재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밥냄새와 육성이 그렇게 강력했던 것일까? 그렇게 이 작은 나라의 드라마에,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밀려 들어오고, 상주해서 살기 시작한 지가 오래되었다. 재밌게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자기들 인형 드라마를 보다 보면,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물 인터넷 같은 용어로써, 방정식으로써, 표현하다 보면, 한국 사람들은 소나무 장작에 흰 쌀 밥을 맛있게 짓고는, 먹고, 그것으로써 공부까지 잘해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다. 그것의 연장은 기록이 없고, 가뇽의 미완성 전주곡만 같다. 청주곡도 있고, 울산곡도 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호미곶도 있다. 자연의 바닷 바람과, 육상의 뜨거운 바람이, 마치 태극처럼 교차해서, 멀쩡하게 서 있다 보면, 덥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너무 자연 현상이 신기해서 바보처럼 웃음이 터져나온다. 엘가의 아름다운 첼로곡이 연상이 되고, 왜냐하면 현이 길고 높게 퍼지고 흐르는 것 같아서. 그렇게 물고기들이 마지막의 동전 한 잎을 입에 머금고 있다면, 나는 이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드문드문 죽었던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처럼, 본격적으로 잘 죽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독립이란 무엇일까? 오동닢 한 닢, 그리고 상평통보 두 닢이 아닐까? 아무리 시스템이 좋대도, 그곳에 마땅한 사람이 끊임없이 헌법과 같은 사랑을, 전쟁 같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와 같은 훌륭한 객관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조선의 역사는, 태어나자 마자 물리학적으로 죽어가는 친구에게 그나마 칼이라도 쥐어주는 시간을 먼저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보면, 전 세계적으로다가 그와 같은 방식이 고루 적용이 되는데, 너무 스케일이 커져서, 다만 가벼운 석가모니로써는 도달하기 어려운 일이 되는 것 같은 것이다.
비한국적인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필사적이다.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사실보고적이다. 영화라는 공기는, 결코 상상만으로는 채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편안하고, 여자들은 드센 것 같기도 하고, 약간 모자란 것 같기도 하다. 대신에 그렇게 필사적이지 않은 것이 보기가 좋고, 만화적이고, 교육은 본시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거의 창세기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해서, 주자의 솔라시스템까지 잘 활용하는 것이 때로는 야비해 보이기도 한다. 주자학은 정말이지 이렇게 정리의 말미에서 보면, 대단한 것 같고, 손자병법은, 다만 병법서인 줄 알았는데, 오늘 이 글에서만큼은, 다른 모든 고전과 함께 드디어 시황제의 작품으로다가 그것의 실체와 의미가 올려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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