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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어적 한국

by 마음대로다 2019. 6. 26.













무국어적 한국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그렇게 독립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나라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어떤 나라가 자기들의 이런저런 일들에 자주 찾아오고, 가끔 조언도 하고, 그랬으면 하는 나라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리얼리즘 같다. 그리고 바이욘 사원의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한다. 우리가 앙코르 와트와, 바이욘 사원을 생각할 때, 그것이 그렇게 죽음과 하나가 될 만큼 무섭거나, 사납거나, 누미노제스럽거나, 호주의 캥거루, 그것의 이름의 어원이 된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겠는가? 누구도 킬링 필드 위에서, 음악을 브금깔기 어려워한다면, 내 또 다시 여기 우리 두 사람 있어요, 러브, 러브, 음악을 진공관 앰프를 통해서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덥다고 한다. 공부는. 그렇다면 공부는. 사랑은 더워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공부는 더우면 아무래도 속력이 떨어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시원한 에어컨 안에서, 동남아 람보 영화를 보는 것을 그다지 문학적인 큰 잘못으로 여기지 않았었다. 다만 천장지구에서, 유덕화가 영화 마지막에서, 공부할 수는 없고, 사랑의 연장만을 겨우 끌고 가다가, 쇼윈도의 유리창을 깨고, 웨딩드레스, 오천련에게 입히고는, 혼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시간이 결국 동날 것이라는 예언이었을까? 에어컨이 언젠가, 동남아 전역에, 필요한 공부의 자리에 설치될 것이라는 뻔한 예언이었을까? 사람은 시집과 같고, 시지푸스, 갤럭시 폴드와 같이, 시집이 전부인 것이다. 시를 가르치고, 때로는 과장된 관념들로, 생각의 콧날을 세우고, 거의 모든 중국 도시를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있는 것이다. 교육은 자격과, 능력, 그리고 양심과 같다. 생명의 양식은 그 자체가 음악과 같고, 기생충과 같다. 다만 시집만을 보았지만, 그것이 역기처럼 무겁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지 않은가? 그리고 너무 단순하고 뻔한 시는, 시가 아닌 것이다. 유덕화가 아파서 코피를 흘리는 것은, 단순하고 뻔한 시는, 시가 아니라는 바이욘 사원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무희들은 춤을 춘다. 좋은 노래도 계속 듣다 보면, 질리게 되어 있다. 그것에도 무희들은 춤을 춘다. 어떤 이는 앙코르 와트에, 주변에 사람들이 살았고, 중국인이 일부러 찾아와서, 보고, 사실들을 기록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첨단에 도달하였다. 서양이 우리와 똑같이 시집을 가고, 시지푸스, 쉘부르의 우산을 쓰며, 사랑하는 사람은 기와 같은 것 같다가도, 그래도 엄연히 당대의 위대한 석학들이 있어서, 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우리가 마시는 것이다. 서양을 보면, 그런 작은 시집으로도 보지만, 그것들의 정성스러운 연결로도 보지만, 지폐의 얼굴을 누구로도 해도 좋은 풍요로운 인물들의 향연으로도 보는 것이다. 앙코르 와트 같은 것은, 연구했던 역사가 있고, 발견에서부터, 약탈, 그런 것들이 있고, 지금에서도 얼마든지 음악 다큐멘터리를 엮어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앙코르 와트와 더불어서, 그것의 능력이 엿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힘이 든다. 우리는 하루방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방을 두고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남아시아는 덥다고 한다. 대만에서부터 사람들은 그것의 더위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대뜸 드는 생각이, 그들이, 엘리트들이, 에어컨의 도움과, 시집의 정의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다가, 한국에서 가을 날 아침을 맞이하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싶은 것이다. 한 며칠 친구가 나타나, 동남아가 너무 더웠던 충격과 기억 때문에, 여기저기 맛있는 곳을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가을 날이 되어도, 공부는 제자리 걷기이기 때문이다. 부끄럼과, 슬픔과, 우리 사는 세상의 장편소설 같음과, 서양 음악적 증거와, 항상 더위로 핑계되던 톱니바퀴가 생각의 저 안쪽까지 뱅글뱅글 돌면, 어떻게 되겠는가? 캄보디아 친구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내가 운이 좋아서, 중경 대학 유학을 가서, 기숙사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나라 음악을 듣는다면, 나이 어린 친구들이 와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작은 진공관 오디오를 몇 시간이고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겠는가? 앙코르 와트, 앙코르 와트, 도대체 이게 무엇이냐고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일본인과 중국인을 가리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들과 우리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다만 한국어를 하지 못할 뿐이다고 했었다. 서양의 언어는 철학과 관련이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연결이 되어 있다. 어떻게 매우 기대가 되는 예스터데이 영화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비틀즈는 그래도 전후 영문학적 연결이었던 것이다. 음악을 확대재생산하려면, 먼저의 음악이 있으면 된다. 그것을 어떻게 달리하고, 이렇게 조정하여서, 새 것이라고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치있는 학생이고, 그런 창조적인 크리에이터에게 마땅한 프랑스 영화 연인이 있으면 좋은 것이다. 프랑스의 어감은 너무나 감정적인데, 어떻게 하다 보면 믿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프랑스 여자는 얼마나 나의 말에 눈물을 감추지 못하겠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음악은 어떻게 확대재생산이 되는가? 철학은, 문학은, 예술은, 춤은, 문법은, 영화는, 대학은, 어떻게 자기를 연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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