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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우리는 지금 국문학의 종언에 직면하고 있다.

by 마음대로다 2020. 1. 2.

우리는 지금 국문학의 종언에 직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인문학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책. 볼륨. 저자. 자기 딴에는 상당한 유명세를 갖고 있는. 그러니까 이재용이 엘지 사람들에게 비치는 모습 비슷한 것이다. 여자 이재용도 있고, 정말 잘 모르는 이재용도 있으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아케이드를, 서울을, 모퉁이를, 대학로를, 신촌을, 서평 삼길을 걷는 것이다. 어제 개그콘서트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있었다. 우리는 개그가 웃기는 이유를 몇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그맨이 웃기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장판 위에서 잠을 잤겠는가? 그리고 예술적인 고귀함을 버리고, 그것의 국문학적 이상, 어떤 말할 수 없는 여자 친구를 버리고, 헤어지고, 스타일을 갈고 닦았겠는가? 모퉁이를 도는 기쁨을 얻는 대신, 모퉁이 돌이 되는 레이피케이션. 그래도 탤런트고, 개그맨이고, 가장 그리스도의 제자 비슷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개그 프로그램이 웃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선이해를 갖는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말들이긴 하나, 우리가 우리 세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그 무엇의 전체가 있다는 것이다. 웃겨? 뭐가 웃겨? 티비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웃고 있자, 밖에서 일이 끝나고, 얼굴을 씻고, 발을 씻고, 뒤늦게 합숙소에 들어온 사람이 묻는 것은, 같은 방식의 인식론인 것이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 그것의 기억. 그것이 저마다에게 육백만불씩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웃기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삶에 희망을 갖고 싶고, 삶의 즐거움과, 기쁨과, 화산고, 그런 것들을 갖고 싶어서인 것이다. 기쁨의 자극에 비해, 유독 소리가 큰 사람들이 있는데, 커피는 맥심, 웃음 성기가 발달해서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티비를 비싸게 구입하지만,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들의 티비가 말할 수 없이 귀하고 비싼 것인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종언을 뿌리고 다니고, 그것을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서울을 지날 때면 언제나 레토릭이 걸리고, 잘 모르는 사람의 비율이 시골 사람들에 비해 어마어마할 때, 그냥 모두 다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낫고, 가장 기독교적인, 불교적인, 누군가는 엔엘이고, 누군가는 피디라고 하는 천사들의 구분표도 있었지만, 기가 막히게 나이가 비슷하고, 마을 버스에서 한 번 보고, 교보문고에서 한 번 보면, 피천득의 인연이 반드시 되고 마는, 그와 같은 아케이드가 가난한 사람 겨울 외투 속에 잘 모르는 종이처럼 있을 때, 정말이지 비슷한 모습처럼, 인문학의 종언을 말하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종언에 비추이는, 합당한, 모든 사실들을 모으고, 조직하고, 결론짓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읽고, 그것에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던, 그러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나는 슈퍼샤이안이었기 때문에, 다른 세계의 집중에 관해서는, 이합 핫산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었다. 인문학이 어딘가에서 죽었나보다 했고, 인문학과 학생들이 또다시 우르르 학교를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비슷한 나이의 여학생들을 보지 말라고 했다. 지금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보아야, 실제 결혼 대상이 보인다고 했었다. 군대도 있고, 이런저런 시간의 엇갈림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인문학생들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 같고, 옛날 사람 같고, 두보의 시 같고, 이백의 시 같고 그랬었다. 영문학을 보면, 범주만을 따져서, 자랑스러운 데가 있었다. 일찍 사물과 결혼하지 않고, 버티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그래도 시간이다, 아프니까 대학생이다 응원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슈퍼샤이안인은, 여자 인문대생과 결혼하고, 사귀고, 바람 피우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빌이고, 그것이 운동의 원리인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박력이 있고, 알 수 없는 장가계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인문학의 종언이라는 여러 책들을 볼 때, 다윗의 시편 같기도 했고, 흥미로웠으며, 세상 어떤 범죄물보다, 내가 당장 늙고 죽는 것에 관한 것처럼, 존재의 실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의 장르처럼, 계속되었으면 했는데, 너무 많은 것을 토해내고, 토한 것을 다시 들여다보고, 위 내시경을 했던 것을 대장 내시경까지 시도하고자 하는 것처럼, 무리한 바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인문학은 죽는다. 어떻게 죽는지 알 수가 없다. 철학은 처음부터 파르메니데스에게는 비존재였던 것이다. 철학은 대게가 신라의 헤라클레이토스들이었던 것이다. 인문학은 게임의 법칙처럼 죽고, 친구처럼 죽고, 팔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죽고, 주홍글씨처럼 죽는다. 인문학은 화랑들처럼, 그렇게 태평양의 한 섬에 가고자 했었다. 김병만이 사람들과 함께 아주 신물나도록 가는 것에는, 다 이와 같은 역사와 족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디자인을 볼 때, 인문학 출신의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한 번 죽었기 때문에, 다만 잠깐 살아났다가,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를 봐도 그렇고, 여배우를 봐도 그렇다. 결혼한 아내가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나와도, 그럴 것이다. 원래는 공부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옷을 사고, 책을 읽고, 새 신을 사고, 친구들과 술을 마신 다음에 책을 읽고, 정리하고, 드디어 감을 잡고, 오성 홍기의 별 두 개를 모으는 것이다. 태극기의 구와, 일장기의 구, 그것이 오성홍기와 만나서, 드래곤 볼이 되는데, 그것이 사구가 되고, 쓰리 쿠션이 되고, 하는 기가 막힌 때가 있는 것이다. 영화 가을로와, 봄날은 간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덤덤한 사랑 이야기이겠지만, 가난한 인문학생들에게는, 뜻을 잘 모르고, 왠지 비장감에 사용하는 사자성어로서의 결자해지 비슷한 것인 것이다. 간다라 미술, 그리고 돈황석불까지 연상하는 사람은 복되었으나, 성공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대게가 저팔계나, 사오정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손오공은 눈물의 손오공인 것이다. 손오공은 삼장법사의 제자였던 것이다. 학교가 우리에게 당구 다이가 되어서, 훌륭하게 나아가고, 모퉁이를 돌고, 만나는 여학생과 마음으로는 다 사귀고, 사랑하고, 남학생이 이화여대생들을 바라보는 마음처럼, 이공계생들이 인문학생들을 바라보는 것은, 국문학과생을 바라보는 것은, 일년 삼백 육십 오일 크리스마스 데이와 비슷한 것이다. 잘 웃고, 키가 적당히 크고, 목소리가 좋고, 무겁지 않은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고, 머리가 단정하고, 외투를 입으면 오래 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남학생은, 정말이지 대학의 비로자나불인 것이다. 여자도 질 수 없는 것이다. 허영만의 질 수 없다. 그리고 우주는 거기서 시작해서, 우리는 나머지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 말의 사실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과장과 의미를 위해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남자가 진실을 향해서, 드래곤 볼을 세 개 모으고, 드디어 네 개 모은다고 할 때,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바깥에 있고,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부모님의 반대로 인문대를 지망하지 못한 사람은, 학교 신문으로 보는 것이다. 다만 유명세를 좇고, 이명세, 대학의 유명세를 좇아, 비슷한 여학생을 사귄다고 하면, 우리들은 영향을 받고, 금방 머리와 어깨에 난 생명 풀이 죽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여학생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씻고, 부모님과 피눈물로 싸워 얻어낸 옷들 중에, 하나를 골라,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길에, 같은 과목을 듣는 것도 아니고, 개그콘서트의 개그맨들처럼, 그것의 희미한, 종이인형들처럼, 남학생을 만난다는 것은, 세상 인간에게는 이런 믿거나 말거나가 있는가 싶은 정도의 이벤트인 것이다. 심리학과가 인기가 있는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 전과를 하고 싶을 정도로, 대학은 이런저런 건물들이 있지만, 심리적인 것은 더 크고, 더 높고, 더 깊기 때문인 것이다. 어떻게 잘 알고 심리학과에 입학한 학생이 있어서, 친구가 되면, 항상 그것을 묻고 싶은데, 차마 묻지를 못하는 것이다. 남학생이 드래곤 볼 세 개를 모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개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그렇게 눈물이 나는 것이다. 같은 과에서, 같은 정도로 주목을 받는 쾌락의 여학생이 있대도, 만일 그것이 자기에게 없다고 한다면, 마음이 그렇게 슬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 국문학은, 그와 같은 연애적인 사실은 갖고 있고,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사라질 위험은 없어 보이나, 그 곽 한 구가 없는 것에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사실, 잠을 잘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국문학이라는 것은, 신학생이 비참하게 오가는 서울에서, 다만 모집되었다가, 배출되는 현상일 뿐인 것이다. 영화가 기를 쓰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 엘리트 신학생의 그 맨 처음의 한 구인 것이다. 두 구가 있고, 세 구가 있기 때문에, 그 맨 처음의 한 구가, 구채구, 시끄럽지 않고, 자랑치 않으며, 온유하고, 한없이 마음이 다감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자칫 사치스러워지며, 한 구의 장난이 깊어서, 사람들을 상대로 한 금속 공예가,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와 비슷해질 운명인 것이다. 그것이 없어서, 시끄럽고, 허세가 깊어지고, 시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다만 쿠션의 기억에나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알지만, 인간의 의식은, 그나마 다른 무의식의 사람들에 비해서, 고급하여, 분명히 깨닫지만, 의식이 육체가 아니고, 그것이 자기 재산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하는 것인지 모르는 언어적, 단어적 상태에 늘 노출이 되고, 그와 같은 음성적인 구의 결합으로 인해서, 필요와 관념의 무시, 헛된 회전, 학과장이 된 정보, 이중 존재 성기와 영화적 가능성의 능선 앞에서, 신이 인간으로 판명이 되는 시간에, 마침내 인문학은 짐승으로 판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땅한 이론가나, 사상가, 그리고 유명한 문예학자, 미학자 한 명 없이, 한국 영화가 발전을 이룬 이유는, 발전했다기 보다는, 죽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은 것이 될 것이다. 영화는 일종의 보장자산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보장인 것이다. 교도소도 괜찮은 곳인 것이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교도소에 가고, 그곳에서 성기만이라도 이겨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른다. 성기만이라도 어떻게 섹스피어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영화가 현상적으로는 크고 웅장한 것이 되었다. 그것을 실측할, 아무런 평론가도 없는 상태로...... 



국문학은 영화평론을 배울 수가 없다. 그것은 죽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