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타기와 자타기의 변화 사이에서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의타기성이란 말은, 살아있는 문어처럼 잊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타기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자판기가 아니냐고 비난할 것이다.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말들을 감수하고, 검수한다. 겸허히 받아들이고, 세월호를 생각한다. 누군가 내게 읽어준 소네트를 생각하고, 그처럼 예쁜 서울 여자를 생각한다. 그런 여자를 우리나라 필름들이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겨울 여자는 있었다. 사람들은 자판을 살 때, 새 것을 구입하고, 장착했을 때, 이제부터는 만주 벌판을 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맨 처음의 그램 노트북은, 사람들에게, 포토그래퍼의 꿈과, 소설가, 혹은 포토샵 전문가의 비전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 여행을 갔을 때, 항상 중국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유혹을 뿌리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만 사스 때문인가? 동남아 사람들이, 선망하던 한국에 여행을 와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잘 모른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여행은 여행대로 있고, 돌아오는 곳은, 고향은, 원착지는, 원 생활권은, 원 생활권대로, 하이마트, 홈플러스처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노트북을 들고, 대화 사이트에서 이성 친구를 사귀고, 혼자만의 도시에서,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권장하는 것이며, 반드시 도달해야 할 것이자, 반드시 또한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가수의 꿈을 꾸고, 노래를 열심히 부르는 것과는 조금 규모와 내용, 조자판의 내용이 다르다 할 것이다. 우리가 음악을 가리켜, 노래를 가리켜, 노래라고 부르고, 놀래미, 혹은 노래기, 노가리, 음악을 가리켜, 옹가꾸, 음악마, 윤상 그렇게 부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설을 어째서 소설이라고 부르겠는가? 그것은 노가리도 아니고, 노래기, 옹가꾸도 아니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영국인들이, 미국인들이, 아임쏘리 그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음악 때문인 것이다. 외국은 그냥, 직장이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우리가 음악을 가리켜, 음습하고, 악마적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는 것에서, 서양은 음악이 우후죽순처럼, 대나무 밭의 죽순들처럼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음악이 음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비행을 할 때, 산과, 나무와, 들판과, 동물들과, 사람 사는 것들이 시체들처럼 누워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행기와 들판이 사랑한다면, 비행기는 추락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마간산, 주마등하는 것처럼, 물론 말이 산을 사랑한다면, 마구마구 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 듯하다. 말을 멈췄을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착륙을 위해, 정해진 장소가 필요하고, 터뷸런스, 급격하게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싫은 사람이 있을 경우, 멈출 수가 없다. 심지어는 돌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의사라면, 누가나, 예수님이라면, 병자들을 향해,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산불제거의 능력이 없다면, 도망가야 하는 것이고, 소방차나, 소방헬기, 소방 비행정이 있다면, 산불제거에 힘을 쓰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데,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에만 있지 않았다. 모으고, 대접하고, 풍악을 울리고, 풍악을 연주하고, 그러는 것에만 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무능력이 있는 것이다. 신문이 음악이 아닌 이유이며, 방송이나 책이, 음악이 아닌 이유와 같은 것이다. 소설이 그나마 나은 것이며, 피라미드처럼 음악을 이기는 것이고, 시보다 나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음절적인 면에서, 시는 자기가 몇 시인지 모르는 것이고, 소설이 되어야 시계 돌아가는 모습이나, 시간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눈을 뭉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맛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 소설적인 성애 때문인 것이다. 경찰에 잡혀갈 수 있고, 경찰에 잡혀가서도 그런 것이다. 소설이 녹으면, 사람은 비로소 자기 얼굴을 손으로 부비고, 눈을 부비고, 머리카락을 넘기고, 어깨와 팔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에 사로잡히면, 눈이 멀게 되고, 피곤하고, 멍청한 옹가꾸 닌겐들을 계속 쳐다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듣다 보면, 눕고 싶고, 그냥 음악이나 듣고 싶고, 자고 싶고, 영화나 보고 싶고, 영화를 보다 보면 섹스를 하고 싶은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평생 교육이라는데, 평생 음악이나 교육하는 것인 것이다. 책거리를 하고, 시루떡도 먹고, 그래야 평생 교육이 미시령의 높은 산들처럼 보이겠지만, 아름답겠지만, 평생 음악 교육이나 하고, 자지와 보지의 알레테이아나 꿈꾼다면, 오늘내일 하던 사람이, 병실에서, 손주들이 병문안 중에 티비로 드라마를 보다가, 그것을 함께 보다가,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를 드디어 알게 되면서, 소리 없이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가 버스에서만큼은, 우리가 음악을 용인한다. 일할 때만큼은, 우리가 음악을 용인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데, 몸매가 늘씬하여 늘 관심이 있던 여학생이 나를 어스름에 먼저 알아보고, 나보고 바쁘냐고 하고, 비즈니스,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하면, 함께 민속 찻집에 가서 음악을 듣는 것은 용인이 되는 것이다. 브금이라고, 음악이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 비지엠, 혹은 칼 뱀, 우리들의 삶과 함께 하는 것인 것이다. 윤상이 그렇게 안타까울 때가 있다. 윤상은 버스 운전자처럼, 기능적이고, 진취적이며, 앞의 화면이 넓고, 서울의 학생들이 모두 마취와 최면, 강간과 의타기 속에서 죽어갈 때, 자타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윤상은 함께 갈 수 없다. 내가 신학대학교 기숙사 창문에 앉아, 음악을 들을 때, 사람들은 인익스플레이너블한 감상에 사로잡혔었다. 친구들은 항상 공일오비, 넥스트, 신승훈, 윤상의 노래들을 들었었다. 그러니까 잘 알아듣지 못할 서양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모아놓고 보면, 버스 운전자와 버스에서 내린 사람의 진취적인 엇갈림 같은 것은 되었던 것이다. 아침엔 커피 한 잔. 점심엔 페스트 푸드. 얼마나 사람들의 시각을, 시력을 되찾게 해주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시력을 상실할 때가 있다. 사랑에 눈이 멀고, 취직에 눈이 멀고, 돈에 눈이 멀면, 좋은 옷에 눈이 멀고, 신현균에 눈이 멀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좋은 터널을 뚫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공식, 운명, 사탄의 조장을 우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만일 나의 협치, 비좁은 계림의 관심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공야장, 함께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면, 그것에 가장 아이디얼 타이프라이터가 윤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자타기성은 약간 윤상과 동시동작적, 그러니까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한다. 미국에는 밥 말리도 있고, 밥 딜런도 있는데, 영국에는 비틀즈도 있고, 퀸도 있는데, 조금은 의외인 것이다. 일본에는 아무로 나미에, 내가 좋아하는 눈꽃의 여가수도 있지만, 이렇게 사람들을 망라한 것은, 다만 인접성의 오류인 것이다. 그것들은 다만 의타기성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차를 타고, 윤상의 노래를 듣는다면, 한국말의 사각형이 보인다. 누군가 소네트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그 때문에 오랜 만에 감상에 젖어, 고개를 끄덕이고, 눈가가, 스모크 겟츠 인유얼아이즈, 마이 아이즈, 촉촉해진 다음에는, 그 말들이 그렇게 다시금 들리는 것이었다. 공일오비가 좋은 노래 몇 개가 있었다. 그것은 간첩과 같았기 때문인 것이다. 공일오비가 그렇게, 신승훈이나, 변진섭과 달랐었다. 공일오비를 보면, 공일오비가 힘없이 사라지고, 윤상이 얼마나 많이 치고 나가고, 예쁘던 그렇지 않던 간에, 한국 차가 다섯 대가 넘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간첩은 사랑할 수 없다. 언제나 당의 지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윤상도 물론, 청년당이나, 간첩의 느낌이 있다. 그것은 내가 슈퍼샤이안인들처럼, 행성의 몇 개를 부수기 전까지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잘하면, 윤상으로 지어진, 한국 노동당 파사드가 강원도 어딘가에 세워질 수 있었다. 가요무대를 보면, 윤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된다. 일본 홍백가합전을 보면, 나와의 케미스트리이겠지만, 한화, 얼마나 윤상이 강력한지를 깨닫게 된다. 미국에는 도얼즈도 있고, 딥퍼플도 있고, 캐쉬미르도 있는데, 어째서, 블랙독, 윤상의 음악을 들을 때, 가볍게 미국 여행을 다녀오고, 동남아를 다녀오고, 백주부가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를 다녀오고, 설명과 사진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무런 경험이 없는 대도 눈물이 나오고, 계속 그렇게 홍콩의 외곽 도시들이 그려지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자타기는 의타기와 비슷한 것이다. 의타기라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자타기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건물을 일일이 콘크리트 타설해가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나의 농담이 시멘트 같다고들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한국문학은 윤상의 노래와 함께 겨우 자타기에 도착하였다. 당연히 문학이 없고, 소설이 없고, 보기 좋은 건물들만 아직은 있게 되는 것이다.....
의타기일 때는, 누군가의 소설처럼, 바닷가의 소년,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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