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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세상 아름다운 내 말

by 마음대로다 2020. 1. 12.

세상 아름다운 내 말






박정희는 불쌍한 데가 있다. 이름이 이후락보다 낫고, 차지철보다 낫다. 김재규보다 낫다. 김영삼보다 낫고, 김대중, 김종필보다 낫다. 금성산성에 올라가 보면, 거기서 나라의 한쪽 절벽, 그리고 다른 한쪽 절벽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알 수 있다. 일하는 작은 손의 실제 감각이 있으면 좋을 일이나, 오래도록 통치하고 있다 보면, 이가 다 썩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가 썩는 것 같아, 얼마나 피가 나도록 이빨을 닦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금니가 다 썩고 말았다. 지금까지 임플란트를 하지 않고 그나마 지내는 것은, 그때 뒤늦은 노력이 기도의 힘을 발휘해서일 것이다. 썩는 것 같은 물리학적 그래프가 무엇인가? 그것은 수학이라는 말이고, 생명이라는 말이 아닌가? 조선이 우리들에게 가발만 팔 수 있는 경제력을 남기고 사라졌다면, 나중에는 중공업 중심의 경제 패턴에 발목 잡혔다고도 하는데, 어딘가에 써먹지 못할 제품을 남긴 것도, 어찌 보면 생명이라는 소리인 것이다. 차지철이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언급한 것도, 따지고 보면 박정희학이라는 유사 학문적 대상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일 것이다. 다만 그것의 방향이, 절묘하게도 마지막 시침을 뜻하는 것이, 과연 계획적인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같은 배 안에서 넘실거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연히 영화가 만들어진다기에, 옛날 영화는 보지 않고, 내가 최근에 쓴 소설도 있고 해서, 그것과 연동하여서, 관심이 갔다. 당연히 우리들은, 유림들은, 박정희가 우리들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투사이지, 실제는 아니라고들 하였고, 우리들의 그와 같은 물리학의 마찰 계수를 끊임없이 만난다고들 하였다. 그래서 한국 문인들은, 철학자가 있고, 문인들이 자유로운 문화를 향유하는, 그와 같은 시대를 살지 못하고, 항상 성경의 예언자, 그것의 칼을 내가 무느냐, 무당들처럼, 작두에 올라타느냐,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훌륭한 정신적 독재자가 나타나면, 물리학적 마찰 계수의 절정에 있던 함수가 무너질 것이라고 믿고, 생각했을 것이다. 철학적 문장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그렇게, 직접적이지 않다. 경찰의 조사를 받으면, 당연히 알 수 없는 말들 천지인 것이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협력하였다고 하나,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경찰은 있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검정색을 잘 쓰는, 그와 같은 카릴 지브란 같은, 마틴 부버 같은 철학자가 한국에서 나오면, 우리는 차지철 같은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차지철은 자기가 철학자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가 나오면, 마침내, 박정희는 어느 다른 나라 활주로에 육영수 부인과 함께 착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학생 같고, 김형욱은, 김재규는 선생 같기 때문이다. 차지철은 학생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몇 년이 지나도록, 일차 세계 대전, 공화국, 삼차 공화국, 사공화국이 지나도록,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독재자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차지철이 한국을 킬링필드 선언하는 시간에 도달하고 말았던 것이다. 김형욱은, 선생 같이 생겼는데, 회고록 밖에 쓸 줄을 모르는 것이다. 최규하도 선생 같이 생겼다. 김대중도 선생 같이 생겼다. 김영삼은 삼촌 같이 생겼다. 대도무문 서예가처럼 생겼다. 옛말에 철학은 죽음의 학문이라는 말이 있다. 박정희가 아무런 철학이 없다가, 다만 버티고, 자기 집단에는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하다가, 누군가 죽음의 철학을 깔아놓으니까, 눈을 뜨고 보니 거기에, 그곳의 카펫에 자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말이 함부로인 것이고, 그래서 말이 여러 번 반복될 때까지 기다리고, 그것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발견함으로써, 우연적인 언사 같은 것은 제하는 것이 담론의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김재규는 철학자가 아니라, 재규어였지만, 차지철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공장과 산업, 제도와 교육, 육성과 국제 관계, 그런 것들이 모두, 서예에 담기 좋은, 철학들이 아닌가? 꼭 공장을 짓다가 말고, 그것을 바라다 보이는 느낌이 철학인 것인가? 철학 논문을 모집하는데, 공장 청사진을 제출하면, 그것을 이것은 철학이다 받아들이겠는가? 전 세계에 박정희 같지 않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아내가 육영수 부인 같지 않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이름으로 보면, 김대중보다 낫고, 김종필보다 낫고, 김영삼보다 낫다. 이문열보다, 나을 수가 있다. 박정희가 오랫동안 집권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현상학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던 것도 같다. 독재가 있고, 그림자가 있고, 킬링필드가 있는 것이다. 선정이 있고, 난정이 있고, 그래도 우리는 선정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메모리 칩인 것이다. 사람들은 신경질적이 되었고, 하루 빨리 마르틴 부버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였다. 혹시 마르틴 부부가,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미야자키현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적인 상상력이다. 우리가 겉바속촉이라는 말을 듣고, 것봐속초라는 이름의 유령 전단을, 어느 종말론적 상상 속에서 만나는 것처럼, 분명히 페루나 안데스, 그와 같은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부부를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사람을 죽이고 만다. 소설의 문고리는, 마르틴 부부와 같은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잡으면, 살인 사건이 튀어나온다. 이문열은, 박정희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현균 목사를 잡은 것일 수 있다. 잘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을 수 있는 것이다. 소설적인 진행이라는 것은, 배고픔의 마찰 계수를 거의 운명처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 뭔가가 먹히지 않는 것이다. 이사야가 길을 닦아라고 자꾸 말했던 것은, 평소에 자주 먹던 떡과 고기가, 너무 딱딱하고, 먹을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파서였을 것이다. 독재는 정치가 아니라, 상징으로 나아간다. 육영수라는 이름도, 사람들의 참을 수 없는 독재 정신에 위배되었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박정희와 김재규의 처음 전기를, 무슨 식민지 시대 때의 일본군 군인으로 하지 않는다면, 슬픔은 것봐속초하는 세기 말의 전단처럼, 더더욱 제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가 독립군은 아니었대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지금은 레토릭으로 잡히지만, 그렇게 그 시절의 출구가 차단된 이들에게는, 가까운 화성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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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79년 1학년, 봄 운동회 때에, 다른 학생들은 부모나 나이 많은 형제가 와서, 김밥을 맛있게 먹는데, 나만 혼자, 아침에 어머니가 싸준 맨 밥에 김치, 멸치만 먹자니까, 울음이, 마치 남이 우는 것처럼, 황하의 낮은 폭포처럼,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완전 꼬마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


누군가 내게, 가족이 안 왔느냐고 했고, 우리들과 함께 먹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