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목적이 있을까?
프랑스 시인 앙탈은 그런 말을 했다. 시의 목적은 목적 그 자체이다. 그 말은 목적이 있다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목적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 앙탈은 유미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앙탈은 피라미드를 자주 갔는데,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한 것이 그래서 아주 유명한 인터뷰가 되었다. 우리는 시에 목적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 항상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시를 접할 때, 그래, 결정했어, 시인이 될 거야 하기도 하고, 시를 접할 때, 접동새, 다만 접하고, 헤어지고, 슈퍼에서 뭔가를 사고 돌아오기도 한다. 서정주 시인만 하더라도, 그의 국화 옆에서 시를 보면, 그냥 국화 옆에 있는 느낌이 든다. 원래는 사람이 없었는데, 사람이 있다는 시적 사건을 높이 산 것이다. 작중 화자는, 누나가 굉장히 예쁘다고 했는데, 사실 거기서 시와 헤어지거나, 혹은 시에 몰입하거나 하게 된다. 나는 시와 헤어졌었다. 김홍도의 미인도를 보고, 국화를 연상한 것일 수 있다. 원래는 누나나 누이가 없는데, 김홍도의 미인도를 보고, 누이로 삼고, 국화꽃까지 닮았다고 말한 것일 수 있다. 잠을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눌리지 않는 이상, 국화의 세열 원형적 꽃잎들을 닮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서 사람들은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목재소 언덕이나, 거리들을 상상할 수가 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무 냄새 가득하고, 해가 지고 있고, 어스름에 서로들 헤어지는 인사를 주고 받고, 국화 문양의 한복을 입은 사람을 누이로 두고 있는 사람이 상점의 마지막을 정리하면 끝인 것이다. 그러니 시가 목적이 없고, 다만 유미주의로 나아가는 경우에는, 우리는 끝없이 사소해지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시적 단절은, 서정주의 경우에는 우연한 것일 수 있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에서 발견이 되는, 일종의 시적 특유의 속성, 혹은 본질적 형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되는 것이다. 대게 달이 멈춰 있고, 구름이 지날 확률이 높은데, 인간적인 유사성으로 놓고 보자면, 서양의 브라이드 구름보다는, 우리들의 보름달 같이 생긴 사람에 눈이 가는 것이다. 독자의 마음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시적 단절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시적인 결합이 되어서, 아직은 밝은 날의 영광은 있지 않지만, 세상 모든 존재자들이 달을 보고 한 마음이 되는 것을, 시를 통해서 염원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소아 아르디의 유명한 노래가 있다. 다른 노래들을 듣다 보면, 금세 프랑스로 떠나는 주인집 딸이 생각나지만, 그 유명한 노래를 듣다 보면, 우리에게도 드문 멋진 한국 신사와 결혼하는, 부유하는 자타기성의 여인을 만나는 것 같은 것이다. 그렇게 시적 단절을 하고 나면, 옛날의 기가 막힌 서양의 노래들은, 그렇게 동양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었다. 사회적이고 형식적인, 그런 객관적인 산문의 단절보다는, 시적인 단순성의 보편성이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서정주네, 박목월이네 하는 사람들의 시는, 그다지 대학 교육의 끝까지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르디의 노래는, 방송국, 가수, 음반출판사, 유행, 사진, 상품, 달력, 향수, 시계, 화장품, 그렇게 영향력이 있지만, 서정주는 국화차, 그리고 박목월은 어린아이의 아름다운 기억에서 빛을 발하지, 도시의 소유권 전쟁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다. 막 소유권을 주장하고, 전쟁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말했지만, 표현을 다듬으면, 그마만큼 눈에 가시적인, 그런 관계적인 긴박성, 기계적인 포괄성, 범주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까지 아모레 퍼시픽, 그런 것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정주는 문을 닫을 때, 다소 고답적이고, 우리들 특유의 시적 화법, 박목월은 문을 닫지 않을 때, 그런 초월적인 고답성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 고답적인 것이, 고담 시티, 처음인 것이고, 한국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말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일단 찬성이다. 우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듣는 아르디의 하나 뿐인 노래가, 굉장히 짧은, 어쩌면 오대수가 사설 감옥에 갇혀 듣던 노래가 저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짧고, 아.름.답.다.. 그리고 한국어 특유의 시적 고답성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광주에서 무안 이모집을 가려고 할 때는, 항상 몽탄을 지나야 했었다. 나는 예쁜 여자들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티비가 나를 그렇게 길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지인을 보면 기분이 좋았고, 정윤희를 보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내 둘째 누나가 그렇게 기분이 좋다가, 그냥 그렇다가, 벌써부터 불쌍한 연탄불 같다가, 누나의 다른 친구를 보면 기분이 좋다가, 자세히 보면 안 그렇다가 그랬다. 교회에 가면, 기분이 좋다가, 다른 교회에 우연히 갈 일이 있으면, 비로소 기분이 좋다가 그랬다. 또 다른 교회에 갈 일이 있으면, 처음부터 교회 같다가, 끝까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엄숙하고, 교회 같다가 그랬었다.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가? 나는 아는가?
바로 이 부분에서 안 향수가 분무가 된다. ....
내 현정이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같았다. 같이 다니면 기분이 좋았다.
원래 프랑스는 믿음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비전통적인 자기애적 에세이의 전통이 강하다. 일종의 이중 전통 같은.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래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다. 시의 목적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서로 함께 실패의 연대를 겪는 것 같은. 그와 같은 향수는 어떤 것인가? 내가 갖고 있는 안 향수 비슷한 것인가? 나는 무안으로 쉬러 갔었다. 거기 가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몇 시간 일을 많이 하고 나면, 따로 일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정말 쉬러 갔고, 놀러 갔고, 그랬던 것이다. 사촌 형은 유덕화를 닮았고, 동생은 프랑소아즈 아르디를 닮았었다. 현정이도 좀더 얼굴이 펴지면, 소피 마르소를 닮았었다. 그러니까 프랑스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사람들의 욕망이 항상 남의 것이 되는 것이다. 박정현이 이태리에서 아베 마리아를 불렀던 것처럼, 학교 시화전에 제출하여 상을 받았던 어머니라는 시도 그렇게 싫었었다. 사람들은 둘 사이에 아무런, 연꽃이 피지 않는 것을 두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었다. 시의 목적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다.
연속하지 않고, 우연적인 것의, 필사적인 기억 같은 것들......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이, 병인양요나, 근대 식민지의 기억이 하나 없이, 다만 프랑스 노래에 혹해서, 죽어 잠을 자듯이 무안에 간 것이냐, 그런 것이 과연 좋은 것이냐?
Le Premier Bonheur du Jou......
우리나라 성리학은 참존 화장품처럼, 약간 그런 데가 있다......
공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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