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함정
모든 하늘이 빛난다. 가뇽의 음악을 틀어놓고, 자타기가 너무나도 강해서, 음악이 방해하지 않고, 음악과 함께, 음악의 너울을 나의 글쓰기 에너지 삼아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실, 모든 영화의 피날레와 같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 위로, 사람들은 뭔 말을 덧붙이고 싶어한다. 어떤 문장을. 그러나 사람들의 죽음 같은, 결사의 이름들만 나열할 뿐, 조원선 아무도 아무 것도 더 적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기 전에, 그와 같은 시적인, 시적인 낭송적인, 그런 절정을 묘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람들은 반드시 먹지 않는가? 사람들은 반드시 자지 않는가? 그것을 데카당스하다고, 당이 너무 많다고, 그렇게 콤플레인하는 사람이 있는가? 시적인, 시적인 낭송적인, 그것은 또한 하기 따라서는 데카당스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장면을 넣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백제의 무녕왕릉 같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체가 일어나, 돌아보다가, 다시 죽을 때까지, 갑갑했을꼬 하는 것이다. 책들이라고 하기에는, 떡살 무늬 같고, 떡살 무늬라고 하기에는, 책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빛을 만나지 못한다. 스토리를 진행시키지만, 다만, 저 사람이 여자를 만나구나, 지금 헤어지는구나, 지금 떠나는구나, 지금 하는구나, 지금 취직하였구나 하는 것으로 우리들의 시간은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정의가 승리하였다는 것은, 지상 최고의 작전이다. 우리들의 세상이, 이차대전 이후에 만끽할 수 있었던, 위대한 대중문화였을 것이다. 정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멀쩡하거나, 조금 못나거나, 하는 사람이 악역을 맡으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다름 아닌 삶이, 거품이 되어버린다고 하면, 우리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데, 얼른, 대충, 그 모든 것들을 마무리짓고, 다음 시간을 나아가게 하는 힘이나, 공권력, 강요, 영화 자체의 습관 같은 것이 있다. 미국 영화가 이차대전 이후에, 도덕 영화나, 전쟁 영화 뿐 아니라, 평범한 로맨스 영화나 액션 영화까지도, 빛이 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정의의 승리와 같은 있을 수 없는 탑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를 보았고, 아름다운 국가를 보았다. 그러나 습관적인 영화제들처럼, 위대한 평론가 한 명 나오지 않고, 영화만 무한하게 찍어내다가, 다시금 사람들이 헤어지는구나, 사람들이 죽는구나, 사람들이 악당을 물리쳤구나, 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극장 바깥으로 나갔고, 햇빛 아래서 거품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향해서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미국 사람들이, 영화가 아닌 사람들을 향해서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그림자 놀이하는 것처럼, 실루엣이 아름답고, 최선을 다하였다면, 영화가 아무리 사탄의 놀이동산이라고 하나, 적어도 비슷하게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카고에서, 매를랜드에서, 미시간에서, 뉴욕에서, 메사추세츠에서, 사람들은 다만 세추만을 따랐던 것이다. 얼마나 시네마 천국 슬픈지 모른다. 학생이, 여학생이건, 남학생이건, 성기가 크고, 공부도 늦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숨어서 야한 영화는 야한 영화대로 보고, 공부는 판소리 연구가가 피를 토하면서 득음을 하듯이, 피를 토하면서, 때로는 중성적인 코피를 쏟으면서, 공부를 할 것이다. 대신에, 잔인한 영화나, 공포 영화는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욕이 잦아들고, 남녀가 만나 두 명이나, 세 명, 네 명의 아이들을 낳은 다음에는, 공부하고, 여행하는 삶을 살고, 영화를 만들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영화는 삶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정의의 승리 탑을 가졌기 때문에, 영화가 그것을 따랐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고 유미주의 시학이 유행하여서, 다만 아름다움이나, 시적인 환상에 사람들이 열광하느냐, 그것도 아닌 것이다. 마구마구 시끄러우면, 그렇게 라큰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을 것이나, 인간의 청력이 분명 성기와는 달라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사탄은 성기에는 한계를 뚫었지만, 청력의 한계는 미처 신경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탄들끼리 서로 부딪힌 것이다. 이런 정보를 아는 이가 없고, 설상가상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맨정신으로는, 아무에게나 친한 척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의 공포 영화는 결코 장르가 아니고, 정의의 승리 탑의 전통도 아닌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그와 같은 현상이 발발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옛날에도 공포 영화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미국의 공포 영화가 개봉관에서 개봉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드디어 장르가 잡히기 시작하고, 우리가 유아이피 직배라고 해서 걱정했던 내용들과 동시동작적이었는데, 그때부터 공포 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숨어있던, 삼류, 비급 공포 영화도, 사람들이 비급 공포 영화이다보니까, 경험적인 우연이나, 공동체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사람들이 재밌다 보기 시작했다. 원래 터미네이터도, 원은 그와 같은 부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터미네이터 투가, 영화관의 바닥을 흐르는 물기를 완전히 통제하자, 결국에는 쓰리, 포, 파이브가 우스워진 것이다. 자세히 보면, 사탄의 놀이동산으로서의 영화와, 그것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구분되어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터미네이터 투를 영화관에서 보고, 얼마나 환호성을 질렀는지 모른다. 어쩌면 공동체적 무의식으로, 우리들의 개과천선의 기쁨이 있었는지 모른다. 대게의 서스펜스는, 공부와 관련이 있다. 공부는 원래 정의와는 상관이 없다. 공부해서 사탄이 되느니, 공부를 하지 않고, 착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는 것이, 중국 어느 나라 재상의 승부수였던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평범한 미국인의 대지를 맛보았던 것이다. 비현실적인 장르가 학생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언급이 되고, 확립이 되자, 이제는 정신과 육체가 임산부의 등급에 있는 사람들조차, 맥주 마시면서 공포 영화를 즐기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흡수받고, 명분을 발급받고, 삶의 불가역성과 그것의 스펙타클, 그리고는 미국산 공포 영화를 마음껏 찍어내는 것이다. 너무 성적인 문화가 개방되어 있어서, 적어도 사람들에게서, 행동에 대한 약간의 전자발찌를 채운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섹스는 섹스대로 그대로 있을 것이고, 원래 없던 사람들도, 종교주의자나 채식주의자, 그들 사이로 공포 영화는 공포 영화대로 영토를 확장해가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가 싶다. 우리들은 정화되고, 우리들은 정리된다. 우리들은 다만 파리와 같은 현상에 굴하지 않는다. 정말 우리가 학교 공부, 직장 생활, 유사 정신적인 생활의 피곤이 극에 달하고, 기적처럼 이성을 만나, 벌써 일년,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공포 영화를 보러가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미국의 공포 영화가 유명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영화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선하고, 매혹적이고, 여배우들은 아름답고, 선하고, 정지용 시인의 향수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 직장 생활, 유사 정신적인 생활의 피곤이 극에 달할 때, 기적처럼 만난 이성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탄은, 거의 모든 인간적인 능력과 교양에 관해서는 자신 있고, 관대하면서도, 유독 그와 같은 학교 이성 사랑에 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갖고, 탄압하는 것일까? 그것은 거의 모든 인간적인 능력이나 교양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소리인 것이다. 사탄은 그것들을 탄압하면, 국가의 기계가 멈춘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것이 탄로나기 전에, 어떻게든 자본주의적 신화가, 신격화가, 자기들을 중심으로 확립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을 처음 대학에서 접할 때, 정말 약간 충격을 받았다. 약간의 직관은 있었다. 그러나 떨리고, 능력이 없어서, 말.잇.못.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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