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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불쌍한 미국

by 마음대로다 2020. 2. 2.

불쌍한 미국

 

 

 

 

 

 

 

몸이 아플 때, 잘 웃고, 잘 먹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삼척, 그러니까 다 아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그렇지 못하는 것은, 아픈데, 옆에 사람이 없거나, 사람은 있으나, 친구가 없거나, 친구는 있는데, 마치 옛날처럼, 돈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정도를 넘어서면, 몸이 아픈데, 누군가 잘 웃고, 잘 먹고 하는 것이, 내게는 괴로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가, 잘 웃고, 잘 먹고 하는 것이지만,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게, 그 어느 정도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서양 사람들이 지금 동양인들을 멸시하는 것은 일종의 충격요법이 될 것이다. 충격요법이 아니라, 본대로 심 같은 것이면, 아픔이 새로운 형태로, 퍼지는 것이 될 것이다. 새삼 떠오르는 것이 민족자결주의이다. 그렇게 차지철이 울부짖었던 윌슨, 민족자결주의만 아니면 별 문제 없었을 씬이, 새로이 부각되는 것이다. 원래 윌슨의 얼굴은, 아베 총리를 닮았으나, 새로이 검색해서 보자니까, 금세 문재인 대통령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전염병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나는 전염병이 천역과도 같아서,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치료하다가 죽고, 우한으로 칼 기가 날아가고, 데려오다가 죽고, 아산 주민들이 충격요법을 주고, 금세 환영의 마음을 표시하고, 하는 것에서, 그러니까, 백신이나 충격요법이 오히려 전염을 지속시키는 것인지, 모르겠는 것이 우리들의 지금 매스미디어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칼과 같다. 나이프. 우리들이 넷플릭스를 너무 많이 봐서, 충격요법을 개창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수가 변수에 이르면, 차별이 없는, 다만 무차별적 흔적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상인지 모른다. 하지만,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충격요법인 것이다. 착한 사람들이 철학이 없어서, 도리어 사탄의 말을 대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와 같은 구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전전긍긍하여서, 때로는 과도한 사탄의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그것들 모두 아니라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늘 잘 먹고, 잘 웃고 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적 주제가 발생하면, 그와 같은 염려의 방 안에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적인 염려가 생겨서, 문학 공부가 잘 되었는데, 그것을 국가의 덕으로 여겨서, 수거해가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인 것이다. 사람들이 아베 총리가 닮았다고,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을 닮은 사람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이래봤자, 백 개 정도 될 것이니까, 극악한 편법을 쓰는 것을, 그것의 의도를 안다면 괜찮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나와 같은 예술가가, 기억하는 얼굴이, 도리어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충격요법이 되기 위함인 것인가? 말이 얼마나 안 되는 것이 많아서, 모든 말들이 그렇게 안 되는 것들 천지인 것인가? 충격요법이라는 것은 참 슬픈 것이다. 그것은 요법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기에 걸렸을 때, 우리가 우리들의 자랑, 온돌 방 안에서, 이불을 두 겹으로 뒤집어쓰고, 땀을 빼면서, 일종의 신체 리듬을 되찾기 위한 노력 같은 것이 그렇게 과학적이라면, 서양은 옛날부터 그냥 충격요법 투성이었던 것이다. 도리어 차가운 물에 들어간단다. 물론, 인체의 반응은, 저마다의 풍습에 맞게, 적응하여, 최적 상태를 찾으려는 노력이 있다. 인체는 노력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차가운 물에 들어가서, 도리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인체가 발화하고, 우리들의 온돌 치료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삭막한 것이 된다. 지옥은 문이 굳게 닫혀 있기 때문에, 비슷한 사람이 최대한 비슷한 삶의 형태로써, 그것의 문고리라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케이스인 것이다. 우리는 감기에 걸려 온돌을 거치고 나면, 웃음이 나오고, 또한 웃음이 나오고, 이제는 차가운 바람을 쐬고 싶고, 또다시 감기에 걸린다면, 다시금 온돌방에 들어가, 땀을 빼야겠다는 삶의 헬쓰적인 계획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눈이 많이 와도, 가을이 깊어져 차가운 바람이 분다해도, 봄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로다가, 일어나, 동지죽도 먹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서양 사람들은 감기에 걸려, 차가운 바람을 쐬다가, 열에 하나, 마치 십일조처럼 죽어겠는가? 충격요법은, 그들의 자랑, 아테네의 반대, 스파르타에 불과한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은, 그 모든 것이 스파르타즘에 대항하는 것들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글들을 갖고, 늘 언제나, 사탄의 대언, 사탄의 피라미드의 층에 있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스파르타가 있다. 그러나 항상 아테네한 기억들을 갖는 것이다. 언제나 서양은 배터니 휴의 스파르타즘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설명하고, 나열하고, 힘에 의존하며, 과시적이고, 일단 보이지 않는 감시 세력에게 충성을 표시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런 비판의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유리왕의 아들도 그렇게 죽었다. 모든 고전은, 그들의 자랑, 바이킹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다. 도대체 바이킹이 뭐라고, 늘 항상 바이킹이며, 스파르타, 스파르타쿠스를 과시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쳐보면서 좋아하는 동양의 홍콩 우한족들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유리왕의 아들은, 또한 나의 아들이 아닌가? 유리왕은 확률이고, 그것은 드물다는 원리가 있다. 사람들이 전부, 어지러워 어떠한 음악에도, 예술에도, 신문의 칼럼에도, 보도와 뉴스에도, 티비에서의 말쟁이에서도, 마음이 의탁한 배처럼, 두둥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나와 같은, 웃는 것도 같고, 겨우, 먹는 것도 같은 것으로다가 말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들을 줄 알고, 읽을 줄 아는 사람들도 유리왕들인 것이다. 일본 에이브이에, 안에서는 보이지만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차에서, 계획된 사람들끼리 사랑을 나누곤 하는데, 오오사카에서 배로 출발해서, 오오사카가 도쿄 옆에 있는 일본 한 가운데 있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부산항에 도착해 있는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수많은 풍등들을, 그와 같은 드라마들을 밤하늘 높이 올려, 일본인 성격적 근거의 착각에서부터,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다가, 그래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실패하고 나면, 그런 그들에게 한국 음식이 맛있고, 그리고 한국말들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때로는 그와 같은 영원한 격차 안에서 사는 것도 미국 영화, 재밌는 영화, 재밌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의 우한은, 한국 사랑은, 일종의 서양의 스파르타즘처럼, 민중들의 영원한 말주변이 없음으로 인한, 반복적인 것이고, 관습적인 것이다. 유리왕이 국제 결혼을 하였는데, 일본인 아들이 쉽게 죽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랬겠는가? 약한 유리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에테르가, 그래서 스파르타즘이라고 해도, 과도하게 비판하면, 오히려 거기에는 쉽게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세계 지식인 전부에게 주목받고 있는,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처음에 그것은 한글인가? 아니면 영어인가? 같은 수준이지만, 현상학적으로 반복하여 관찰하다 보면, 과연 그와 같은 민족 풍습의 반복적인 현상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 새삼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볼 때, 항상 유럽이나, 미국은 인구가 별로 없고, 그나마 캐나다는 솔직하여 나 같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아프리카는 내전, 아랍 사람들은, 드디어 우리나라 사람들도 문장화에 성공한 것처럼, 어째서 그토록 영원히 서로 싸우는가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게 되는 것이다. 중국은 민족자결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의 인구 국가가 되었고, 지금은 절대의 경제 국가 또한 되었다. 지금 일본은, 맨날 한식에다, 삼겹살에 소주, 잘 익은 김치에 빠져 있다. 새로운 학생들은 운동의 초점이 훌륭하여서, 어떤 세포적인 연대, 한국어적인 문턱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차지철 같은 정치인에게, 그것으로 이끄는 정치인들에게, 그들의 에너지와 관심의 뿔이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른다. 한국의 잘 익은 김치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유산균들이 일어나, 적들과 싸우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일종의 비교문학 같은 것이었으나, 한 번 사탄을 보고 나면, 극도 공포대극장, 눈물이 나오고, 무섭도록 절박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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