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수상
우리는 위기에 처해있다. 보통 사람의 말과 글이, 자기의 전기를 담아 시작하고, 끝을 맺으면, 듣는 이는 참담하게 된다. 사탄은 더욱 참담하게 된다. 그것의 개인성이라는 것은, 전 개인에 걸쳐, 결코 달성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더욱 참참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이 아예, 그리고 일절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은 있다. 그것이 미완성, 혹은 불가능성으로 있을 뿐이지. 그리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할 줄 아는 말들이 개인적인 것들 뿐, 그런 것들 밖에 없다. 저 들 밖에. 한 밤 중에. 그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할 줄 아는 말이, 우리들 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육십년대에 무슨 뉴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겠는가? 칠팔십년대, 팔십년대, 티비문학관 공화국 시대에, 무슨 동경이나 북경, 파리, 로마, 베를린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겠는가? 동백림 사건만 해도 그렇다. 결국은 우리들 밖에 할 이야기가 없었지 않은가? 기독교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그렇게, 이스라엘 사람들, 이스라엘 지명들, 그리고 진정한 유대인의 왕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그 분의 설교를 무한하게 반복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홍콩 반환, 결국 믿음은 우리들, 자기화, 토착화, 한민족화시키겠다는 의지가 아니었겠는가? 그것이 아니었는가? 그것은 아니었는데, 패키지 묶음이 되었는가? 여기서 중요한 말이 하나 나왔다. 패키지 묶음.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술어를 가지면, 주어가 따라오는가? 다만 외적 관계에 있지 않고, 그 정도까지 우리가 침범해 들어가면. 술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 헤브, 혹은 헤븐리 헤븐, 다만 익히고,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억하기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엉터리 목사들이 나오고, 기복적인 신자들만 나왔어도, 그래도 막대한 규모의 교회가 있고, 신자가 있고, 교양인이 있고, 때로는 창조론적 과학자들까지 정신적 방황을 할 정도였으면, 그것의 역사는 엄청난 것인 것이다. 그때 그렇게, 우리들 목사님들이, 개인적인 간증들을 많이 했다. 그와 같은 언급은 사탄을 척살하고, 우리들의 개인을, 북한 개성을, 무한하게 증진시키는 힘이 되었었다. 우리는 눈물이 나온다. 새벽은 기도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도 그렇다. 동대문 밀리오레. 밤이 깊어 맞이하는 새벽도, 기도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먼저의 새벽은, 출근의 아침을 맞이하고, 나중의 새벽은, 즐거운 문화국가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군인은 하루 종일 새벽이다. 일어나기 싫고, 움직이기 싫고, 하늘이 아직, 그러니까 자유의 차양을 만들어 놓고 있지 않고, 하늘이 아직, 다른 집에서 사는 여자 친구의 얼굴을 비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뻔한 농경 사회를 살다가, 갑자기, 중공업 산업으로 투신하게 되면, 그와 같은 성비의 시간에서는, 하루 종일 새벽 같은 것이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루 종일 새벽인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글도 그렇다. 그 모든 것들을 컨벌젼스, 집합으로 놓고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새벽 같은 것이다. 눈 비비고 일어나, 만두. 혹은 비비안. 그렇다면 사회적 인정은 어떤 측면에서 오는가? 발간이 되고, 이슈가 되고, 적어도 발간이 되고, 인정을 얻지 못하고. 몇몇 사람들이 기억하고, 소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고, 다수의 대중들이 알고 있고, 움직임이 바로 핫이슈가 되고. 그런 것이 바로 사회적 인정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새벽이 아니면, 개벽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쩌면, 멋진 브런치가 될 것이다. 항상 인간 문명의 가장 좋은 부분을, 고래하고, 향유하고,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긴장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기독교는 결코 세속적 문화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세속적 문화에 아모스처럼 관련을 맺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언어가 갖는 와플적인 속성, 혹은 패턴 때문인 것이다. 여자들은 와플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고, 어쩌면 거들, 속치마, 그리고 그와 같은 레이스와 유행 때문에, 겉옷까지 와플적인 속성일 때가 많은 것이다. 우리가 법복을 입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줄 모르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장군 같은 철학자가, 여자들에게는 나쁜 의미에서의 언더웨어, 좋은 의미에서의 속옷이 아닌 것이 없다, 하고 말하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에게는 겉옷이 있는가? 남자들도 같은 것이다. 같은 와플이다. 대신에 강요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내고 나면,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국말로 되어 있고, 한국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생각하고, 서로를 생각하고, 때로는 사랑하고,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많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에로스의 아가페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에게 아이들하고, 아이돌하고, 아이 컨택하고, 아이 쇼팽하고, 아이라이크하고, 라이크라하고, 아이러브 뉴욕하고, 씨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 하고, 씬씨아 하고, 아이더하고, 마이마이하고, 그러다가 과감하게 에로스하고, 에로틱하고, 고대 그리스 장군처럼 과감하게 음란 영화하고, 그렇다고 보면, 패키지로다가, 문화력이 강성해지는 것이다. 성경은 타이타닉호처럼, 정해진 곳 없이, 유리하는 수준인 것이다. 성경이 전후 한 세대를 지나, 설교 할 수 없는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그리고 권력적인 의타기성이 갈수록 배가가 되는 것도, 당연한 서양 정신사의 반복인 것이다. 얼마나 헤겔 이후의 서양 철학은 거대했는가?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것들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의타기성이 강한 남녀가 결혼을 하면, 당연히 인두껍을 한 짐승이 태어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사랑하지 못할 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민중적인 성경의 수준이 빙산의 일각과 같은데, 다른 문명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원전이 사랑스럽고, 서설이나 개요, 참고서들이 볼만 하며, 다른 것들이 참담한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의타기성은 무한하여, 걱정하지 않고,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사탄이 쳐놓은 의타기성의 철학에 입성하게 되면, 그와 같은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이 어지러울 때가 그때이다. 자연적이며, 사랑스러운 시간, 나이가 어리니까, 만화같은 의타기성의 시간을 살다가, 장자가 자기를 가리켜, 의타기성인지, 혹은 자타기성인지 모르겠다고 했던 것과 같이, 의타기성이 싫은 때가 있는 것이다. 성경이 문학 같을 때. 문학적인 하나님 아버지를 찾을 수만 있을 것 같을 때. 사도 바울의 육성 녹음처럼, 오랜 공부나 노동 없이, 사람들과의 즐거움의 고기를 먹는 계급의 계단에 오르고 싶지 않을 때. 같은 말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의 반복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을 때. 다만 이젤에다 캔버스를 놓고, 색쓰만을 그리고 싶을 때. 그럴 때가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논쟁은 숨가쁜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만을 관심하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은 시기를 놓쳤지만, 하루키만 알고, 그래도 이런저런 저명한, 옛날 만화가들과 같은 인기의, 서술가, 수필가, 작가, 사상가들이 있을 법했는데, 다만 중국 사람들이 피를 쏟아가면서, 그들의 인구와 존재와 도시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논쟁은 중요한 것이다. 일종의 조선시대 때의 사단필정 논쟁과 비슷한 것이다. 술어는 주어를 가져오는가? 한국어는 원래 한국어인가? 하는 것 같은 것. 안드레와 베드로는 한국 사람인가? 야곱은 한국 사람인가? 하는 것 같은 것. 의타기성의 정확한 한계는 어디인가? 어디까지를 의타기성으로 보아야 하는가 같은 것.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도, 그와 같은 논쟁의 자리를 만드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드보르작의 피아노와 바이얼린을 위한 로망스를 들을 때, 그것을 잠깐 아는 것 같은 것이다. 설인아를 잠깐 안고, GV80을 타고, 서해대교를 지나, 마카오까지 다녀오는 것 같은 것이다. 논쟁은 방치되고, 영화의 효과처럼 해가 빨리 지나고, 아이들이 지나며, 남미의 팔렌케에도 다녀오는 것이다. 사람은 정신으로 이뤄진 것일까? 아니면 육체로 이뤄진 것일까? 그것은 전부 일종의 이중긍정, 혹은 이중부정의 논법이고, 함정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입만 살았다 하는 것으로 단번에 문제의 무효를 주장할 수 있지만, 도리어 그와 같은 함정 논리를 지나고 나면, 드디어 진지해지는 것이다. 정신 두 개에, 육체 하나가 그렇게 이상적이다. 정신 하나에, 육체가 두 개이면, 쉽게 짜증이 나고, 티비에서 보이는 거의 모든 액션물, 공포물이, 바로 그와 같은 논리에 의지해서, 사람들을 포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들을 많이 살 때, 반드시, 정치적일지라도, 정신을 확보해야 하는데, 같은 물체들을, 사물들을, 이런 핑계, 저런 신품, 잔뜩 관심하고, 사고 하는 것은 분명히, 정신의 삭감을 뜻하는 것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은, 다만 그것이 정신으로 있었기 때문에, 감각이 되지 않는 것인 것이다. 정신이 세 개에 육체가 한 개. 그것도 대단한 것이다. 거기서부터는 우리나라 서원에 오를 수 있다. 정신이 네 개에 육체가 한 개인 것도, 매력적인 것이나, 거기서부터는 다만 상상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에 성공했다면, 우리나라는 전 세계로부터,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 대만이나 태국에서부터,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의 나라로 명성을 획득하였을 것이다. 우리들 동서양의 고전이,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적당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곳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전광석화처럼, 그것을 지내고, 평생 원칙도 회복하지 못하는 분쟁 지역에 떨어지는 것이다. 마치 양들의 침묵 같은, 이런저런 아름다운 로망스들을 들으면서, 집으로 향하고, 방의 창문을 열고, 침대보다는 책상에 앉다 보면, 우리는 무한한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 저마다의 나라의 가요들도 충분히 좋다는 것. 그래도 논쟁의 하나를 붙잡고,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 조조와 같은 새벽. 약간 빛이 밝으면 다만 조이겠으나, 어둠에서부터 누군가 움직인다는 것은, 다만 표시적인 의미에서 철학적이라는 뜻인 것이다. 아침마다 절경이고, 아침마다 신의 선물이고, 아침마다 아름다운 동남아의 팬션인 것이다. 의타기성은 자타기성을 안다는것이고, 자타기성이 가장 좋아하는 의타기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사진들을 무한하게 보고, 좋아하고, 잡지 같고, 아름다운 잡지사 여기자라는 의미에서의 잡년 같아도, 그렇다면 자타기성과 의타기성이라는 의미의 합일, 이중합일, 삼중합일 같은 그림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의 포토샵은 가벼운 데가 있다. 처음에는 가벼운 데가 있다. 몇 개의 실기능만 차용하고, 별로 전진하지 못하는 것도 엿보인다. 그러나 의타기성과 자타기성의 합일이라는 측면에서의 자기 자신, 현존재, 그리고 대방, 지하철 이호선 대방역, 대방역에 불이 켜지면, 서울의 모든 곳에 불이 들어오는데, 그런 자기는 있는데, 어째서 그와 같은 그림은 불가능하겠는가? 그와 같은 문제의 답을 주는 것 같은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계단 같고, 성경은 계단 같으니까, 너무나 아름다운 이집트 같은 것이다. 트집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개그맨의 젓꼭지가 조금 아래 있는 것을 두고, 그것을 적발한 개그맨과, 함께 배를 잡고 웃는 이유는, 그것은 바로 트집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들의 존재와, 본질이. 우리들의 개념과 사상은 얼마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다. 몰라서 트집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존재도, 우리의 본질도, 우리의 개념도 트집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삼별초는 그러나 항쟁을 하고, 우리들의 지칠 줄 모르는 작품이, 친구가, 공포물들이 늘 그래서 만만한 것이다. 우리들의 평론이 그와 같은 섹스 관계 때문에 발전을 못하는 것이다. 찰흙덩이에 쇠못을 꽂으면 평론이기 때문에, 그것을 누가 못하겠는가? 조카가 옆에서 지금 뭐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를 때에나,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