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마음의 의뢰를 받고.
브금 더 펄 퓌셔스....
그것을 우리는 수마의받, 수마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우리의 화살촉은, 무의미한 것인가? 사탄은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것의 안전전산망에 걸리게 되어 있다. 사탄이 문명을 허락한 것이,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당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렵다. 우리는 문명도 달성해야 하고, 내 아는 장로님 중에 그 이름이 문명이라는 의사 분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름이 멋지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사탄과 싸우다가, 몸을 아주 조금 회복하고, 숨구멍이라도 회복한 다음에,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작은 노트북과, 중국 유학에 관한 비전을, 부탁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장로님은 이상하게 더 가난하여지고, 어려워지고 했었다. 그러니까 나만의 비장의 카드로 가지고 있었는데, 갤럭스 제트 플립처럼, 품 안에서 그만 서로 달라붙고 녹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만한 관념은 되었었고, 만남은 정히 없었으나, 어려울 때 찾아갈 만큼의 연속성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좋아한다. 내가 조금만 부유하였다면, 만나러 다닐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가난자는 돌아다닐 수 없다. 그런 옛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옛날의 굴원처럼, 겨우 수마의받으로 헤매고, 내가 나를 고치고, 내가 나를 숨쉬게 하고,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면서, 한국 중부지역에 뒤늦은 눈을 보고 다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문명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이 지금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미국 아이젠하워 항공모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언제나 태평양 괌 기지에서부터 출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 땅에 전쟁이 일어난 것을 두고, 투르게네프호가 움직일 이유는 없으나, 그 옛날에 우리 어느 시인이 말했던, 낙엽불가소, 그냥 그와 같은 학교와 학원의 끝, 무슨무슨 칼리지, 그것의 전함과의 만남은 필요한 것인 것이다. 태평양에서 배를 닦고 있으면, 좀비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컬리넌 옆에서, 좀비가 되고, 좀비로 알아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머리가 터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이 서로 싸울 일이 없는 것은, 우리는 문명과도 싸워야 하고, 사탄과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문명이면, 그런 영원한 기회주의적, 옵티무스 프라임 같은, 문명에 속하면 좋지 않는가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생각은,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가지 같을 지라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열 개의 육체와도 같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한국을 벗어나, 일본, 중국, 중국의 폭포성 마을을 여행하다가, 기름에 맛있게 튀긴 꽈배기를, 튀빙겐, 한국과 똑같이 설탕을 뿌려 먹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생각이 아무리 하찮을 지라도, 그것의 한 가지가, 열 명의 육체와도 같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두 개만 먹어도 질린다. 그러나 하루에 하나 씩 먹으면, 질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의 인구가 많은 것 같아도, 없고, 유시무종, 그러니까 시인은, 시인의 시가 시시한 것 같아도, 우리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어는 영국 사람들이 잘한다. 미국 사람들도 잘한다. 그러나 그들 마을에 한국 출신 영시인이 지낸다고 하면, 그 사람이 영어는 못하고, 시를 시를 그렇게, 조디 포스터나, 제임스 조이스처럼 짓는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계산을 잘 못하겠으면, 그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지배인이 당장에 달려나와, 인사하고, 계산을 돕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더블린에는 지금, 조디 포스터도, 제임스 조이스도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단절. 그와 같은 통영. 그와 같은 거제도의 고통과 슬픔을 아는 이가 없다. 시는 시시하고, 먼지와 친하고, 워싱턴 디씨, 가끔 먼지를 털어내어, 읽는 것의 기능이 아닌가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가 그것의 생명의 순환과 흔적을 더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면, 당장에 좀비가 출현한다는 것은 그들은 생활 세계 좀비 경험주의적 기록문학으로써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시가 아니면 좀비인가? 시가 아니면 안시가 아닌가? 우리들에게도 안시성이 있지 않은가? 그 말처럼 안타까운 것이 없다. 우리는 시가 없어도 된다. 다만 성문만 있어도 된다. 그러나 에테르가 확립되지 못하면, 시가 없으면, 안시로 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안시에서는 농부가 일하다가 노래만 불러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쫓아와서, 혹시 그게 농시 같은 것이냐고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문명이 어디 저기 멀리 있어도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장안, 서안, 북경, 개봉, 그런 데에 있어도 되었는 것이다. 하루 종일 좀비에 시달리고, 때로는 성내에서 좀비가 발생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고, 외국 여행도 다닌 적이 없는데, 좀비가 발생하였다고 하고, 그런 고통스러운 표현들. 문명은 좀비가 아니어도, 아름답고, 좀비가 아니어도,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도전의 대상인 것이다. 영국인들에게는, 점점 자기들은 좀비에 동화가 되고, 영문학만 남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의 산문이, 그것의 스포츠 중계가, 그들의 무의식과 전의식을 자유로이 통과하고, 펍에서 맥주를 마신다고 해도, 더 펄 퓌셔스 엔 칩스, 그것의 코리더가, 그것의 아일이, 좀비의 똑같은 통로라는 것을, 그들의 실험주의적이며 경험적인, 너무 많은 경험을 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다가, 말은 조금 자제하더라도, 너무나 잘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폴 모리아던지, 제임스 라스트든지, 펄 퓌셔스를 처음 듣고 얼마나 놀랬는가? 우리가 너무나 좋아서, 중국의 묘족처럼, 굉장히 아름다운 일본 여자와 결혼할 때는, 북해도의 결혼식 전용 교회당 안에서,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주례사가 있을 때도, 음악으로 흘려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도무지 그것의 효용이, 그것의 피쉬엔 프라이,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영화 음악 처음 시작 음악이 그렇게 좋았었다. 우리들만의 화이트 하임에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화이트 하임을 하나씩 깨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집을 사면, 그것의 경축의 의미로다가, 훌륭한 어떤 함안 지역 전축을 가져다 놓고, 듣는 것인 줄 알았다. 모든 음악은 그것의 펑션이 반드시 있고, 우리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매우 정확한 데가 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그것의 펑션은 정확한 데가 있다. 우리가 대나무 제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의 한 부분이 깨지고, 찟기고, 부서진다고 할 때, 그 부분만 어떻게 빨리 대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닌가? 대나무로도 빌딩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 빌딩은, 그것의 보조재는, 생각보다 오래가고, 생각보다 처음과 끝을 함께 하곤 한다. 부분적인 탈각 없이. 그런 것으로 보면, 음악은 거의 모든 것에 정확하다 못해, 선녀는 참이슬만 먹어도 되는 것이 되는, 그런 셈인 것이다. 더 펄 퓌셔스를 놓고, 어느 문명도 그것의 펑션을 드러내지 못했다. 미하일 바흐친도, 윌리엄 포크너도, 제레미 아이언스도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것에, 그들 음악이 있었다. 우리들 축제에는, 아름다운 트롯트 가수들이 열창을 하지만, 그들의 축제에는, 정말 우리들은 경양식 집에서 듣던 음악을 듣고, 연주하고, 청하고, 함께 춤추고 하는 것이다. 손흥민을 보면, 그렇게, 정말 전라도 말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공칠 영화에서도 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은 그들의 대학 학력 고사를 마치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유명인들이 축사를 하는, 졸업식에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슈퍼볼에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배출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조용필, 모나미, 약간 신경 쓰면 만년필, 빠이롯트, 그렇게 위대한 탄생을 주변 사람들 조금 들을 수 있게 축하할 것 같으면, 더 펄 퓌셔스 엔 프라이드 칩스 같은 것을 얼마든지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약간 영국 사람들이 독한 데가 있는 것이다. 만일 국가에 흉년이 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도시만 발달하고, 과학과, 실천과학으로서의 상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당연히 좀비들의 스퀘어 가든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깨띠드랄 것들이 그것들에게 영원한 면죄부를 줄 것 같지는 않다. 나라에 흉년이 들고, 아이들에게도 먹을 것이 없을 때, 나라에서는 벌교의 꼬막을 특별 관리하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상궁들이나 겨우 보다가, 심심치 않게 보다가, 임금이 꼬막을 좋아해서, 흉년이 들면, 호조판서나, 영의정까지도 얼굴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하얗고, 잘생긴 데가 있었다. 함부로 팔지 못하게 하고, 잘 말려서, 가루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임산부와, 아이들이 있는 가족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옛말에 흉년에는 벌교 꼬막들만 뛰어다닌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서양 사람들 눈에는, 더 펄 퓌셔스처럼 보였을 것이다. 두유 해브? 두유 노우? 홧이스 뷰티? 뷰티 풀 네임. 진주는, 그들에겐, 겨우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 불과했는데, 우리는 음악의 고통스러운 생산 기계가 발동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생산 기계가 돌고 있을 때, 무엇을 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단위 시간을 보냈겠는가? 그것의 농경이고, 그것의 천국 같은, 영원한 그림으로서의 숨은 예법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아름다운 음악은, 그것의 출발이 결코 지워지는 것이 아니며, 세상 모든 결혼식과 장례식을 지낸 다음에는, 무슨 놈의 과학적 원리처럼, 항상 그들의 슬픈 주소 좀비들을, 우소다로, 내비치게 되는 것이다. 전쟁이 상대적으로, 그들을 하얗게 만들었던 적이 있다. 존 레논만 봐도 그렇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존 레 짠하고 슬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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