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영화론이 그래서 다시금 주목을 받는다.
스트라디바리 연기론?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연기는 연기다. 정말 내가 아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아니면, 기억력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도 그 비슷한 주장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묘청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대동강의 물이 반짝인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영화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들의 지금 영화들을 보고, 옛날 사람들도, 칠십년대, 육십년대, 팔십년대 사람들도, 그렇게 따분하고, 지루하고, 만만하고, 더럽고, 사기꾼 같고, 조동팔 같고, 그렇게 보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영화가 가장 깨끗했다. 영화는 반짝였다. 영화는 흑백이었을 때도, 세상의 영화보다 가장 밝고, 아름답고, 오색으로 찬란하였었다. 우리들은 거기서, 영화 음악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잘 모르는 교향곡을 듣는 것보다, 우리들의 얼굴이 나오고, 예쁘고, 잘생긴, 그러다가 슬픈 신파조의 오케스트라가 나오는 것을 좋아했었다. 내가 감독이 되면, 야한 영화도 틴토 브라스보다 더 찍겠지만, 그와 같은 슬픈 신파 음악 영화도 많이 찍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피크, 그것은 정상, 그것은 우리들의 참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감독이 되지 못하면, 하는 수 없다. 사람들은 섹스 영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눈 뜰 때, 기생수처럼, 삼다수처럼, 우리가 맑은 눈을 뜨다 보면, 사뭇 가을로에서 보여주었던 풍경 음악의 합일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짧았고, 봄날은 간다와 어우러져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영화를 찍으면, 사람이 직업이 없는 것인지, 남자건 여자건 정이건 처음부터 우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이 나오고. 사람의 지능이 세상을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들의 학생들을 보라. 직장인들을 보라. 모두가 다 아리스토텔리언들인 것이다. 우리들의 옛날 신석기 옹관들은 사실 신석기가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한쪽 옹관으로 가고, 다른 날은 다른 쪽 옹관으로 가고, 어느 날은 대장금을 보고, 어느 날은 채옥이 나오는 다모를 보고, 하는 것으로 우리들의 세상에 대한 인식은 끝이 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일본군을 넘을 수 없으니, 박정희와 김재규가 일본군이 되어야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제아무리 노력해도, 제암리, 한국에서 세계적인 철학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영화에서만큼은 슬퍼서, 우리들이 떠내려가는 것 같은 영화를 찍는 것이 좋은 것이다. 취직을 못해서 슬프고, 그런 것도 있지만, 버스를 타고 가는데, 다들 자동차가 있겠지만, 설정을 막무가내로 해서, 홍천이나 화천, 대천이나 합천, 고대 이집트 합찹쓰, 거기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떠나는데, 여자가 발작을 일으키듯이, 남자를 따라오는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깊게 좋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늘따라 아무런 사람에게 센치한가보다 하고, 오늘은 뛰고 싶은가보다 하고, 생각보다 잘 뛰는 것이, 좋아하는 마음이 자기도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창문을 열고, 운전사 아저씨는 조심히 그 사람을 보고, 여자에게 그냥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다. 여자는 옷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좋은 옷으로 오늘은 한 옹관에 가고, 다른 날은 그것을 정리하는 것으로 한 옹관에 가는 것이다. 우리가 넓은 치마에서, 항아리 타이트한 치마로 바뀐 것은, 그래서 운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제한된 세계관에서, 인식에서, 부분적인 진리로 나아간다. 부분적인 진리는, 생명처럼 살아있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오직 그 부분이 유독 강조가 되는 것이다. 운전사 아저씨가 좇아오는 여자가 위험하다고 하고, 그래서 차를 세우는 것이다. 잠시 뭣 때문에 좇아오는지 확인하고, 인사하고 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낯선 장면이다. 낯선 국가. 이유는 단 하나인 것이다. 여자는 다만 하늘 천, 천을 뛰었을 뿐인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에게 가지는 요식 행위가 또한 있고, 레토릭이나 관제 행사, 무분별이나, 희뿌연 의식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느 날, 맑은 날, 화천에서, 하늘이 밝고 아름다운데, 좋아했는지 분명치 않는 남자가 자기를 두고 떠나는데, 건강한 산골 처녀가 함께 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려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여자의 의식은 잘 모르겠는 것이다. 교무실에 불려가서, 선생님에게 배가 아프다고 하는 것처럼, 할머니에게 주려고 산 소화제를 남자에게 건네는 것이다. 남자는 소화제처럼 웃고, 좋아하고, 그만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인데, 슬프지 않은가? 무장공비가 꼭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해야지만 슬픈가? 남자가, 혹은 여자가, 그와 같은 무장공비를 소탕한 뒤에도, 사람들은 물 밖에 담을 것이 없는 무쇠솥마냥 슬픈 것이다.
묘청은 시인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고, 아는 것도 많이 없고, 불경도 잘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대게의 선승들이, 중들이, 평범한 중들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가난하다는 증거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혹세무민해서, 무민이라는 외국 만화가 있는데, 돈을 얻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옳지만, 맞지만, 실은 그들이 만성적인 가난에 휩싸여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성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다만 식욕일 수도 있다. 다만 지배욕일 수도 있고, 다만 어떤 주거에 대한 욕구일 수도 있다. 마땅히 돈 쓸 데가 없다는 현상은, 우리 민족이 최근에서야 경험하는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동대문 거대한 은뱀처럼 생긴 것을 보고, 내내 불만스러운 자연스러운 그런 건강한 의식을 가지다가, 갑자기 어떤 아이들이 환영의 높은 기를 드는 것을 어제 보았다. 은뱀처럼 생겼고, 경각심을 갖자, 그와 같은 산불 조심 캠페인으로 보면, 도리어 흥겹고, 그렇겠지만, 그것이 인류의 미래적인 모습이고, 미래적인 가치이며, 미래를 선도하는 것이라고 하면, 세상 어느 묘청이 웃음을 감출 수 있겠는가? 평범한 인간은 떡을 치고 산다. 아무 생각이 없다. 떡을 치다가, 비로소 서로에게서 참기름을 얻는다. 다른 유생들이, 묘청과 같은 가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개경에서, 그와 같은 주장이나, 현상을 두고는, 인간이 어떻게 떡치는 존재이고, 거기서 나오는 참기름이 어떻게 순간에서 영원으로의 영원한 영화가 되겠는가? 그나마 이념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기 의식과 눈이 오직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을,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슬플 뿐인 것이다. 영화 뿐 아니라, 사람들의 분석적인 말이나 문장들까지도, 묘청의 영화론의 여진이나, 테리토리에 복속된 현상일 때가 많다. 그러니까 영화의 옹관에다가, 거기에 대한 첨언에 불과한, 그런 기쁨, 식자연의 신문 한 장, 차지철한 석실묘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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