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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특종이란 무엇인가?

by 마음대로다 2020. 2. 5.

특종이란 무엇인가?

 

 

 



 

 

 

 

나는 엄격히 말하면 소설가이지, 우리나라가 춘희, 그러니까 신춘문예를 미는 것을 제외하고 나면, 신문사와 상관이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나는 나의 피와 땀, 살과 피가, 소설에 적합한 것을 넘어, 신문사와 하나가 될 것 같은 것이다. 나는 고질라성 같은 조선일보도 사랑하고, 동아일보도 사랑한다. 한겨레 신문은 그 있는 자리가 마음에 든다. 세상 모든 대학신문이 더 이상 북조선과 관련을 맺지 않고, 그 남태평양 같은 순전한 마음, 도리어 북한에는 없는 것 같은 아쉬움, 도리어 남태평양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그 꿈에 부응할 것 같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 낭만적으로 탈북하고, 북한으로 돌아가서 살아있는 모든 형이상학을 말하고 죽고자 하나, 도리어 당에서 부분적으로 린정을 해주는, 그러나 대학이 그와 같은 인터내셔날에서 벗어나자, 금세 잠깐, 동경대, 게이오대, 어떤 일본 드라마의 노력들 때문에, 어째서 서울대는 안 되는지, 어째서 우리 연대나 마데카솔은 안 되는지, 연세대 외국어학당은 제법 유명해졌으나, 우리는 그와 같은 거대한 삼국유사의 공동경비구역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채널을 돌리고, 차원을 바꾸고, 눈을 다시 뜨면,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과 함께 이상적인 한양대학교가 보이는 것이다. 경희대학교. 그러니까 피비린내 나는 한신대학교. 우리는 막연히, 그리고 의타기성 속에서, 하루하루를, 무라카미 하루키를 살아갈 때는 발견이 안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놀다가, 나중에는 그나마 중간이라도 가서, 공부를 하고자 하나, 금세 중간고사고, 잠깐 술을 마시고, 친구 차를 얻어타고 동해에도 다녀오면, 기말고사가 되는 것이다. 방학이 공부를 놓는다는 의미에서 방학은 아닐 것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바를 하는가? 그 시간. 생명과 생명의 간격. 차이. 피아노 연습을 하면, 피아노 실력이 늘 듯이, 키보드 연습을 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 외국어와 외국 사상의 불필요한 간섭과 지연이 없이, 우리가 학도병으로 해변에 나가, 죽을 것으로의 존재를 각성한 다음에, 학교에서 더 이상 불필요한 시위가 없고, 미대 학생들의 열성과 정열, 피를 토할 것 같은 득음과 환희의 포스터들을 배경으로, 가을이 되어 단풍이 들고, 기가 막히게 사슴이 홍대에 뛰어다니면, 고라니가 울고, 고라니의 울음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고, 학교에는 사람이 많을 것이나, 설정이나 시간이 분명 건물과 몇몇의 사람을 배치하는 에스에프 영화를 찍을 수 있기 때문에, 후적음이 생경하고, 촌스러운 청년 같은, 그런 차를 타고 대학 내의 가로수 그늘에 멈출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워 떤다. 왜냐하면, 필라테스. 인필트레이션. 대학이, 그러니까 자기 생명의 객관적 외화가, 이렇게 놀다, 웃고 떠들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그렇다. 중국이 그렇게 신생 건물들에 스스로 놀라고, 그들의 에프씨 바르셀로나에 놀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건물에 쉽게 적응하였고, 야합하였으며, 여자들은 거기서 결혼까지 하였었다. 더 이상 발전이 없었고, 건물이 생기면,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었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그와 같은 시기의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은 차분한 인상이다. 사는 집이 그보다 좋은, 차분한, 객관적 건물의 절대적 가치에서, 자기화가 이뤄지고, 개인화, 인성의 도야가 이뤄진 것 같은 것이다. 아니 학교 비슷한 좋은 건물을 가졌다고, 객관적 이념의 자기화가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것이 묘하고, 신비롭고, 생경한 것이다. 학교에서 마징가가 나오고, 그레이트 마징가가 나왔다면, 우리는 집에서는 거지처럼 살아도, 학교 근처에서 숙식하면서, 사람들 모두 그와 같은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건물만 나오고, 음악적으로, 학생들만 배출되었기에, 건물에 대한, 건물의 독재에 대한 불만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성과급을 받아서, 아주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만 그 모든 것의 배치와 아름다움에 놀라, 방과 후 학교에 다시 입학한 것 같은 것이다. 집이 그렇게 해결이 되니, 나머지는 쉽게 교양을 달성할 수 있었다. 생명은 죽음과 같고, 사탄의 말을 구분할 수 없으며, 결혼도 죽음과 같고, 사탄의 저녁 놀 같은 합성을 우리는 분석하고 구분할 수가 없다. 다만 교양과 예술, 그것의 객관적인 현전을 두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고, 그것의 등급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물화를 그리면서는 창피해하는데, 어째서 결혼을 두고서는 창피해하지 않는가? 우리가 아름다운 정물화를 예술로 인지하지, 못 그려서 탈이지, 창피해하지 않는 것처럼, 결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삶의 특종이 없음을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죽을 듯이 외국 차가 예쁘고 좋아보이더니, 우리가 조금이라도 분발하니까, 그와 같은 성기가 사라졌지 않는가? 학생들이 처음에는, 나와 같은 계단을 오르내린다고 생각했었다. 가위바위보도 하고, 대학생이 초등학생들처럼, 책을 펴고, 나온 사람 수대로 상대를 때리기로 했는데, 도저히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학생들이 물레방앗간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의 기사는 그와 같은 것들로 구분이 된다.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하고, 대학 등록금을 동결하기로 한 것을 보도하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미진한 사람들의 사회 현상이 늘 언제나 막강하고, 마칸, 그리고 그 수가 거대하기 때문에, 기자는 세상이 온통 기잣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기사는, 연세대 어학당에도 오를 수 있는 정도의 휠 베이스, 그리고 다른 전문적인 자동차 용어들을 갖는다. 우리가 자동차 기사들을 그렇게 접하는 것은, 만원짜리 지폐를 두고 만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버리는 데에 쓰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생명에서부터, 그것은 그나마 그렇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장면을 사먹고, 걷다가 또 자장면을 사먹고.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서 있고, 멈추고, 때로는 문화방송 앞의 유명한 조형물처럼, 서로를 보면서 영원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대한항공 사탕만 먹어도, 꿈이 있고, 플랜이 있고, 재미가 있었다. 특종이 언어가 약한 사람들의 영원한 회귀를, 또한 영원히 반복하는 것일 수 있겠는가? 학교에서 사람이 굴러, 다치지는 않고, 그것도 기계 장치, 같은 소학교 같은 집에 이르러, 이번에는 계단을 오를 수 있겠는가? 옛날에는 물건을 훔치면 태형에 처해졌다는데, 얼마나 마음 착한 사람들도, 그와 같은 변기수를 이기지 못하고, 손을 대고, 훔치기까지 했겠는가? 그 절대적인 우주 상수가 있을 것이니까, 사람들이 훔치지 않는, 적어도 거기에까지는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훔친 사과가 맛이 있고, 훔친 닭이 맛이 있고, 그것의 절정에 이르면 훔친 이성이 좋고 하는 것이다. 삶은 즐거우나, 이상적인 홍대, 후적음의 그림에서 보면,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반달 가면인 것이다. 특종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같고, 등굣길에 만날 수 있는 접힌 신문과도 같다. 다섯 자를 보여주었을 때, 다섯 자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검수원과 같고, 보통의 사람들은 세 자, 두 자, 때로는 한 자를 보고, 잇고, 한 자를 보고, 잇고 하는 것이다. 신문을 그래서 만든 사람이 읽다 보면, 재밌고, 속도가 있고, 종이가 별로 크지 않아 보이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름 방학에, 신문을 읽다 보면, 저녁까지 전부 읽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라도 제대로 읽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사상가의 반드시 첫 번째 결심이 되는 것이다. 특종은 그렇게, 특공대나, 불특종 다수를 향한 범죄 같은, 그러니까 기사의 가장 저변, 언어적 기능이 발달하지 못한 사람들의 현상을 탐방하는 영원한 시간에 준해 있는 것이다. 보라. GV80을 보고, 좋아하고, 돈이 있어, 금방 사고, 타고 돌아다니고 했던 사람이, GV70을 보고는, 먼저 산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GV70 또한 대단히 특종을 담고 있는 형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친구가 그림을 그리고 있고, 옛날에는 폣병에도 죽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젊어서 죽고, 그래서 라디오 주파수가 생기고, 조금만 파도, 파고 들어가도, 작은 에메랄드 코딱지가 나오고, 존재가 존재로 바람에 휘날리다가, 건너편의 본질을 바라보다가, 내일 죽음으로 나아가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각성하는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다가, 존재가 언어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렇게 슬픈, 우리 영원한 휴거, 바보 선언의 대학과도 같은 특종인 것이다. 그보다 강력한 로봇 영화가 없고, 에스에프, 바닷가 언덕 아파트에서 문 열여놓고 끓여먹는 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가 없는 것이다. 언어가 존재라면, 도덕적이거나, 문법적이거나, 아름답지 못한 언어는 특종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그 만화. 어느 대단한 절대의 보물을 감추고 있는 문의 열쇠가, 베토벤의 열정 피아노 소나타라고 하면, 갑자기 액션 영화에서 음악 영화로 변하는 것처럼, 그래야 전개가 되는 것처럼, 사실이 그러한 것이다. 악한이고, 거칠고, 생각에 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사탄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그럴 것 같으나, 논리적으로 또한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중국인이래도 그럴 것이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겠는가? 홍대 출신의 민중신학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