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새종 수상

by 마음대로다 2020. 2. 12.

새종 수상

 

 

 

 

 

 

 

사람들은 새종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알프레드, 그러니까 히치콕이 의도한 것이었을까? 알프레드는, 히치콕은, 까메오로 출연하기로 유명하였다 한다. 감독이 출연자들 사이로 지나는 것이 그렇게, 가난했던 우리나라,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밌고,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범인이 다시, 범죄 현장에 등장한다는 말도 유명하였다. 사람들은 새 같다. 히치콕이 그것을 의미했던지, 아니했던지, 그것은 중요치 않다. 오죽했으면, 이집트의 신상에, 새가 다 있었겠는가? 그리고 새는 거의 모든 문명에서, 그들 문명의 상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들 경찰의 문양이, 그나마 새를 갖고 있는 것이 아름답다 여겨진다. 개나, , 혹은 낙타, 그런 것이었으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민중의 지팡이, 민중의 지팡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지팡이는 가까우나, 새는 멀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답기는 새가 낫고, 가깝기는 지팡이가 나으니, 그렇게 분업을 한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은 정합성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거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고, 거의 모든 것에 공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새를 아는 이가 없다. 우리가 포비아를 가리켜, 공포증이라고 한다. 새가 무서우면, 새 포비아인 것이다. 여자가 무서우면, 여자 포비아. 티비 드라마가 무서우면, 티비 포비아. 시그널이나, 와트슨이 무서우면, 맥심의 본사 영국이 무서우면, 그런 것들 포비아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들 모두를 검토하면, 중요치는 않는데, 하찮은 것도 아니어서, 나보다도 사회성을 갖고 있어서, 내가 중요치 않을 때는, 단번에 그와 같은 소매나, 앞문, 혹은 목덜미를 파고드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포비아인 것이다. 우리가 포위를 당했을 때, 예를 들면 서바이벌 게임 같은 것을 한달 때, 그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포비아인 것이다. 착한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포비아를 따로 느낄 이유가 없다. 착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저녁 늦게 술을 마시다가, 막걸리를 친탁이니, 반탁이니, 그렇게 마시다가,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열려진 창문으로, 창문이 열려져 있었는지, 새 한 마리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으면, 포비아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새가 좋아보이지 않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새가 있으면, 놀라게 되고, 친구들이 일어나, 웃고, 새를 쫓아내게 되고 하는 것이다. 포비아는 그와 같은 계단을 갖고 있다. 혼자 있을 때, 새가 들어오면, 얼른 손으로 잡고, 창문으로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포비아를 푸념해봤자, 들어주는 이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것들이 가득 있어도, 이런저런 피규어, 포르쉐 구일일, 알에스, 나쁜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면, 그날로 저격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도 좋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누구냐고 할 때, 신비로운 초록 드레스를 입고 있는 샤라포바라고 말하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인 것이다. 좀더 배우나 가수 같은 사람을 말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말하면, 사람들은 좋아하고, 좋아할 것이다. 도대체 알프레드는, 히치콕은, 두 사람이 아니지만, 공포 영화 새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혹시 새종을 무서워하고, 어느 때는 얇았다가, 어느 때는 섬세했다가, 어느 때는 거대한 새처럼, 경찰처럼, 경찰청 사람들처럼, 날개를 활짝 펴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볼케이노가 터지고, 그러니까 무서워했던 것이 아닐까? 이집트의 새의 머리를 한 신이, 호루스인가? 혹시 새종과 먼 친척 관계라서, 그런 어떤 비상한 착상이, 포비아로 지내는 감독에게 갑자기 닥치고, 모든 몸과 마음을 장악하여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저명한 미국 영화 전성기 때의 감독이, 갑자기 우리들 역사적 인물을 두려워할 일이 무엇인가 싶다. 어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까메오로 출연을 하는 것도, 보통 까마귀는 까마니까, 까메오로 출연을 해서, 사람들에게 자기는 까마귀가 아니라고 밝히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수많은 갈대밭의 철새들처럼, 그것들의 군무처럼, 사람들을 궁금하게 하는 것이다. 혹시 한국어가 무서웠던 것일까? 지식은 지역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갖게 된 사람에게 전이가 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피라미드의 정리인데, 혹시 그것을 알아서인 것일까? 새종이 그것을 알고 있었고, 미국이 그처럼 어마어마한 규모를 갖게 되었어도, 결국에는 한반도의 까마귀에 의해 장악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미국 전체를 자기가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의 봉준호가 미국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돌로레스 크레이븐, 그래서 더욱 공간이 일그러지고, 사나워지고, 자기는 그냥 공포 영화의 감독이지, 철학자이자, 훌륭한 예술가가 아니라는 푸념이 담긴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가니까, 점점 더 승리에 가까워오는 것 같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새종 대왕의 나라 사람들은, 말이 굉장히 부드럽다. 말을 거짐 다 국물로 다 해먹는 것 같다. 밥도 어떤 사람들은 씹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는 말들이 그렇게 조금도 씹을 수 없는 것들 뿐이다. 그런 것들로, 의사 생활을 하고, 소통을 하고, 친탁 운동도 하고반탁 운동도 하고, 저격도 하고, 다이나마이트도 던지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말이, 혹은 사람의 말이, 음악과 하나가 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한다. 죽음에 가까운 현상이라고 귀하게 여긴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형용사는, 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아무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잘 모르는 말들로 그들의 도서관이며 캐띠드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의 놀란 눈과 같은 말들을 주고 받고, 던지고, 누군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고, 어느 때는 숨이 멎을 것만 같고, 플로리스트가 품에 가득 아름다운 꽃다발을 안겨주는 것이다. 우리도 잘 모르는 말들일 때는 기다린다. 그리고 말을 잘할 때까지 기다린다. 내가 그렇고, 상대방이 그렇다. 끝끝내 잘 모르는 말을 하는 경우에는 헤어지게 된다. 그래도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아름다운, 반짝이는, 반짝이고 계속해서 예쁘고 아름다운 옷을 상대방에게 입히는 것이다. 우리가 저녁 늦게까지 포르쉐 구일일 알에스를 타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젠가 내가 이름도 모른 채 사귀었던 여자들 사이에서, 괜찮은 선구자가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맛있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아는 것이 힘인 것이다. 사탄만 없으면, 어쩌면 프란시스는 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탄만 없으면, 장자끄 루쏘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라 그랬을 것이다. 그때 서양의 말들은 인공적인 음악성을 잃어버리고, 뾰족해지고, 힉소스, 새들 같아지고, 대머리 독수리처럼 볼썽사나워지고, 그것들끼리 연결이 사나워지고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인 기계이며, 쇠사슬이고 하니까. 그렇다고 몰라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가슴에 문양을 달아줄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들을 전부 모아 놓으면, 알프스 산더미 같아서, 사탄이 따로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모르는 데까지 내려가게 되어 있다. 형용사의 풀밭. 수많은 형용사화되어 있는. 영토. 거기서부터, 노지심처럼, 우리는 단 한 번도 학창시절로 뇌가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