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톱니 바퀴
우리 인간은, 아니 우리 지구는, 철저한 관계의 형태로 이뤄져 있을까? 유격 훈련에서의 이동줄처럼. 앞에서 흔들리면, 뒷 사람도 흔들리는. 아니면 무관중 여자배구처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추사 김정희 독재 체제를 우리가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게 다, 흑백 사진의 톱니 바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비슷한 것이 일회용 사진기에 남아 있다. 친구가 소풍에, 일회용 사진기를 가지고 오면, 우리가 조금은 톱니 바퀴, 존재가 태엽 감는 새, 나아가거나, 조여들거나, 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의 환희가, 미국 영화였다. 한국은 벗는 영화였고, 그래서 한국에 지적인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미국 영화는 에스에프 영화들까지도, 잔잔한 도로 위의 작은 웅덩이 같은데, 장화 신고 뛰어들면, 안으로 쑥 빨려들 것 같은 것이 있었다. 한국 영화는 누나 같은 사람이 벗고 나오니까. 그렇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 홍콩 영화, 그 맨 처음의 단추를 아는 이가 이처럼 없다 싶다. 일본 영화를 나중에 보는데, 그 때가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영화가, 삼성이 그 모든 일억만 화소, 카메라 바퀴들을 가져와서, 사람들에게 제품을 시연하는 것처럼,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말 담담한, 정히 담담한 수묵담채화가 아닌가 싶다. 내 친구가 그렇게, 일회용 사진기를 들고, 필름을 감았던 것이, 이렇게 결과지어진 것이다. 아직도 추사 김정희 체제는, 처재는, 상존해 있다. 우리에게 위협적이다. 두뇌가 접히고, 닫히고, 생존으로 피상적인, 고답적인, 가부장적이고, 제주도의 돌담길에서, 누군가 죽어서 피를 흘리면, 과부가 그렇게 단정치 못했던 것이다. 그리로 우리는 뻐꾸기처럼 아직도 날아갈 수 있다. 막상 김정희 체제는, 처재는, 그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다. 내게 정말, 김정민 같은 여자가, 키도 적당하고, 예쁨도 적당하고, 좀더 예민하고, 지적인 말투를 가진다면, 대학 때에, 그렇게 내게 고리를 던저 잡아챘다면, 나는 아직도 그와 같은 평면과, 그와 같은 입체와, 그와 같은 바람에 있을 것이다. 사각형은 앙드레 가뇽처럼, 그렇게 다른 톱니 바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박정희 체제를, 처재를, 그렇게 싫어했던 것은, 가장 극적인 것으로서는, 그것이 나름을 인정을 얻었다는 것일 것이다. 옛말에 인정은 무적이라고 했다. 우리가 불만을 가지는 것은, 오직, 대학에서, 통키타는 연립정부처럼, 영세중립국 같았다면, 대학에서 뭘 배울 때, 서정시를 배우고, 한국 가난한 서정시를 배우고, 누군가 우리에게 너의 영원한 잠만 자는 방이라고 속삭였을 때였던 것이다. 그것의 앰비벨런스를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사진이 그렇다고 보면, 닌자의 표창 같았다. 대청 마루에서, 적당한 친척의 남의 질서가, 조국 근대화에 오직 아첨하는 관계로만 있을 때, 그와 같은 기둥에 날아와 박히는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신문이 그렇게, 서양의 대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실질적인 도시의 발전도 우리를 부채질했다. 달동네에 대검찰청 건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언덕에 들어찬 대검찰청 건물이 사람들의 달동네와 같은 정신의 현주소를 자극했는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근거해서, 그와 같은 것과 동일시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추사 김정희 독재 체제를, 어느 좋은 한국사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추존하고, 축사하고, 사람들과 함께 고풍스러운 시간 감각을 키우는 것이면 좋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사진이, 사람들을 선동했었다. 사진은, 조국의 과거 그림들을 모두 밀어내었다. 도트 형태로, 대충 프린트를 해도, 그랬고, 교과서에, 전형적으로 실렸어도 그랬다. 교과서에 실린 상감청자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다. 실재로 보면, 그냥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들떠 있었고, 우리는 우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우리는 항상 그것에 관해 말보다는 주먹이라는 사회 현상에 내던져지고 있었다. 결국은 일이라는 주먹에 빠졌다. 가위는 시나 영화의 컷과 같은 것이고, 보는 정보와 같은, 더 이상 보지 않는 스포츠 신문 같은 것일 것이다. 우리의 직장과 건물들은 대게 바위처럼 생겼다. 반듯하고, 사각형 같은. 사람들이 김정희 독재 처재를 좋아하는 것은, 그와 같은 가위와 보, 그것들의 의지할 수 없음에도 일면, 도형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궁정동 안가에서, 바위에 바위를 보태는, 그와 같은 세속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어떠한 조선주의 멘탈리티를 가진 사람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서까지도, 김정희는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나, 종합적인 경험과 반성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제주도에서의 미대생과 국문과생의 만남 같은 아름다운 밤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철학만이 우리를 불만스럽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지피고, 학생들을 공부하지 못하게 하고, 경제적 우위의 것들에게 신천지만 파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머리가 없어서, 두려움에도, 호기심에도, 그와 같은 체적에 구속되는 경향이 있다, 학생들에게 공부케 하고, 학생들을 여행케 하며, 문을 열면, 황산이, 문을 열면, 화산이, 문을 열면 네팔이, 문을 열면 오키나와가, 문을 열면 도쿄가, 문을 열면 선셋대로가, 문을 열면, 이문열, 파리 모스크바 네덜란드가 있는 것에다가, 오직 철학적인 문제제기로써, 언어를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며, 세포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추가 김정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다시 사는 세상에서 너무나 훌륭한 공격성과 생산성을 보여주었지만, 그런 능력이 없음으로써, 결국은 아름다운 바위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래한 것이, 그 중에 누군가 노래한 것이, 총을 쏜 것과 같은 수학적 진행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조선이 일본의 도움이 없어서, 육이오 전쟁까지를 치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순함이다. 단순함은 이야기를 끌고가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김정희는 결코 추사 김정희가 아니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유사성과, 최소한의 인물 세트간의 관계를 놓고, 그런 생각을 한번 덮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의 내부는, 방주와 닿아 있고, 짐승과 그것의 반대적인 급부로서의 성인에 닿아있더라도, 우리가 아는 바가 없고,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에게 영원한 세한도가 되는 이는 김정희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윤복과, 김홍도는 어떠한가 할 것이다. 붙어 있다. 독립하고, 아름답고, 선명하게, 조화를 이루며, 호조와 병조 판서처럼, 영의정처럼, 갑오개혁, 갑신정변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신윤복과 김홍도, 그렇게 그림을 어린아이가 보고, 김정희 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증은 일본에까지 이르고, 그와 같은 정신 현상은, 반복은, 역사구조주의적 미학은 도리어 그들의 신화나, 아이누족들처럼 오래된 것이다. 현무암에는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들끼리 연결되기도 하고, 닫혀 있기도 하다. 비가 내리면, 바람이 불고, 바다에서도 물이 들으면, 거기에 그것이 들어찬다. 문학이래봤자, 경찰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궁정동 안가에서 핏자국을 발견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의 중력처럼, 무게추처럼, 그와 같은 시계를 차고, 그와 같은 사진기를 지급받고, 그와 같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서, 가을의 저녁, 기생충의 이야기의 전모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공감하였고, 나는 그런 하나가 되기 싫었기 때문에, 내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귀를 막고 있었으나, 마음으로 적잖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의 미개척 처녀지를 얼마나 부러워할 것인가? 나는 기생충에 노출되지 않은 것이다. 기생충은 그러나 경험이기 때문에, 순결만이 장땡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미 순결을 잃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구조주의적 미학은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다. 천재는 있으나, 미시마 유키오 같고, 지식은 있으나, 구로자와 아키라 같다. 일본은 저녁에는 한국말을 할 것 같은 풍경이요, 영원한 갑자원의 가능성이다. 한국에 갑자원만 있었어도, 나는 더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가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받다가, 외줄을 타고는 돌아보는 강원도의 풍경이, 숱한 박정희보다 나았다. 그러나 한국에는 갑자원과 같은 아이들이 없고, 진하고 아름다운 갈색 그라운드가 없다. 결승에만 응원오는 비겁한 학생들만 있고, 안타를 칠 때만 환호하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애늙은이들 밖에 없다. 그렇게 일본 아이들이 갑자원을 지내, 씨비사백 혼다 오토바이를 만든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중심을 벗어나, 주변에 있을수록, 거칠어진다고, 우리는 별다른 바이크 문화가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젓가락 하나로, 몇 명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을까? 잘 박히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나면, 다시금 그 사람을 쫓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것 모두가, 우리 인간의 의식에 있는 도형으로서의, 선의 한 젓가락인 것이다. 차라리 그 짧은 김정희가 나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런 제자가 없는 것이 나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내 앞에서 벗는 영화만 있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가 다만 다이아몬드의 가로가, 날개처럼, 가장 넓게 펴진 때가 아니었나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머지 국가들은, 공룡이 되고, 공룡을 그나마 생산하는 모기가 되고, 그와 같은 순환과 생각과 아무런 저항 의식이 없는 영화관으로서의 호박이 되는, 주라기 공원의 예언의 결과물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서양에, 헤겔을 모르는 철저한 시간이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셰익스피어는 가로로 읽어도, 세로로 읽어도, 재밌지 않은가? 클래식을 연주하지 못하는 서양인들을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에게는 늘 신천지 같은 것들이, 이 비좁은 땅덩어리에서조차, 블레이드 러너에서처럼 쫓겨다니지 않는가? 그것 모두가 어쩌면 세한도에 그려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소나무라고 보지만, 어찌 보면 공룡 같이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림을 본 인간들은 이제, 피날레처럼, 저기 보이는 붉은 화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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