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 대한 오래된 상상
미약한 관심의 인자들이, 종교에 대한 비판의 우월주의를 손에 쥘 때, 그렇게 삶의 에피소드 하나 없는 사람들이, 남의 에피소드가 웃기다면서 하라주쿠 댄스를 추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또한 조조의 오래된 공식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내 말이 맞는 것이다. 경찰이, 괴물들과, 변신들과, 사라짐을 상대하다 보니, 사람들이 살인사건을 믿어주지를 않는 것이다. 시체도 없고, 안치환, 핏자국만, 선물처럼, 살인자도 없는데, 유치장에 가뒀는데, 씨씨티비가 마치 미역국처럼 그렇게 생각을 맑게 하고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남은 것은 열정밖에 없다. 그리고 시체는 이동하여 태워지는 것을 본다면, 더더욱 경찰은 마음이 타고, 온 몸이 화장당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선한 개 이빨인 것이다. 우리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들을 때, 그 이빨 사이에 낀, 놓치지 않으려는 오랜 기억들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꼼짝없이, 그것이 양성이든, 혹은 음성이든 간에, 살인사건을 연출하고, 자기가 담당했던 사건을 재현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양성으로 판명되면, 결국은 그것까지 예상한 사탄의 노가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 음성으로 판명되면, 경찰 영화, 괴물 영화, 변신 영화를 찍었어도, 병원에서 퇴원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다시금 양성으로 판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칼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인 것인가? 그것만큼 읽지는 않지만, 야스퍼스를 가까운 사람으로 놓은 것이 있을까 싶다. 사람들은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실존이 무엇인지, 그것이 존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마땅히 말장난 같은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럴 때, 가장 한국적이고, 민중적인, 대중적인 표현으로서의 한계상황이, 머리가 둔한 한국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실존은 한계상황이 아니다. 어쩌면 야스퍼스가 잘못 안 것이다. 조금 잘못 안 것이 아니라, 많이 잘못 안 것이다. 그런데 우습거나, 내 입술, 커피 한 잔의 향기 같은 것이 무엇이냐면, 그래도 야스퍼스를 실존주의 철학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명언이 유명하다. 실존은 본질이다. 그것이 나의 입장이기도 하다. 사르트르가 그래서, 나와 입각점이 다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하이데거가 복잡하고, 어렵고, 난해하고, 이스터섬의 마오리 석상 같기는 하나, 그의 진행은 결국 편안하고, 한국적인 것이다. 사르트르가 많이 서양적이다. 한계상황은 언제나, 우리가 배가 고프고, 배가 부르고, 생각이 혼자여서 돌지 않고, 만담이 가득하여 돌지 않으며, 고전을 몰라서 한계상황이거나, 알아도 그만큼, 딱 한계상황만큼만 아는 것이다. 학생들의 실존은 한계상황이다. 그래서 우습고, 내 입술, 커피 한 잔의 여유 같은 것이다. 여자들은 중국 배우처럼, 한국 남자가 건넨, 볼펜을 손에 쥔다. 조금만 가면, 다시금 부를 확보하고, 비싼 차를 타고 다니고, 봄베이에서는 최고급 호텔을, 두바이에서는 헬리콥터를 타고 갈 수 있어도, 볼펜 한계상황처럼, 그것은 다만 볼펜 심 안에 잉크만 꽉 차 있을 뿐인 것이다. 남자가 볼펜을 손에 쥐고, 겨울날 눈이 내리는 것처럼 글씨를 쓸 수 있으나, 여자는 다시금 모든 범주를 방황하면서, 돌연사하거나, 살인사건이거나, 자연사 하는 것 밖에 삶의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활력은 한계상황이 아니다. 우리가 넷플릭스 리모컨을 손에 쥐고,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매우 직접적인 형이상학에 또다시 진입하겠는가 묻는 것인 것이다. 독일사람들이 그랬다. 공연한 관념의 키 높이만 높아서, 늘 그것에 관한 영혼의 화학적 공식에 스스로 희생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포르노는, 야스퍼스와 다른 한계상황의 계보를, 흔적을, 엿보게 하였다. 그것이 다들 서대문 형무소 같은, 아우슈비츠의 결과였을 것이다. 역사가 비굴하고, 뒤틀려 있으면, 귀엽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섹스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인과가 어찌 되었던 간에, 성적인 한계상황을 경험하고 나면, 야스퍼스의 철학적 한계상황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된다. 신천지도 원래는 일반 교회처럼, 널찍한 의자에 앉게 하지 않았을까? 방석이 있었대도, 넓게 넓게 앉지 않았을까? 그런데 갑자기, 그 어려운 한계상황이 닥치고 만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갑자기 숫자가 늘어난 것일까? 한국 기독교도, 그렇게 원래, 미국의 신화에 관한, 협잡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었을까? 도리어 한국 기독교와 불교가, 그들의 숫자를 차고 넘치게 하지 않았을까? 정말 너무 꽉차면, 성적인 느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간은 범주로 이뤄져 있다. 그것이 사탄이면 사탄인 것이고, 천사면 천사인 것이다. 범주를 가로지르는 것은, 전쟁의 결과인 것이지, 결코 교육받는 중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연주자들은 자폐증 환자 같은가? 정말 그것의 리드는 쥐뿔과 같고, 봉급을 받아 가족을 이루면, 엄마가 뿔났네, 쥐뿔과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성황당에는, 사람들이 던지고 간 쥐뿔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교회는 서양적인가? 정말 우리들의 삶이 딱 그만큼의 크기를 가졌다. 목사들이 서양 사람들을 인용할 때마다, 또다시 내용에 진입하면 상관없겠으나, 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성숙하고, 신천지 이만희 같은 정도가 되면, 술냄새까지 되어서, 갑자기 사라질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이단적인 레토릭은 다들 거기서 거기다. 우리가 넘어가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 가난해서인 것이고, 한국 사람들의 드라마가, 신천지가 교회당의 한계상황에 도달할 만큼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좀더 세련된 남성적인 입각점을 만들어주지 못해서일 것이다. 우리들 고전 환단고기를 갖고, 무슨 종교가 있는 것 같은데, 채널을 돌리다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고, 그것이 신천지와도 비슷하려나 했던 것이다. 주자의 남자들이 할머니들과도 자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까지, 나폴레옹,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은, 그 사람이 예쁜 탤런트를 닮았다고 생각하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보이는 것을 너무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남자가 못생긴 여자와 결혼해서, 여자가 행복하여서 얼굴이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호시탐탐 후대의 주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어떻게 신천지가 생기지 않겠는가? 이만희를 보면, 나를 닮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만희가 죽고, 신천지가 해체되면, 다만 신천지가 해체된 것으로 사람들이 슬퍼하겠는가? 우리나라, 한반도의 역사가, 피라미드의 거대한 스핑크스 앞에서, 단 한 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인가 절대의 회의가 생길까 두려워하고, 거의 모든 범주의 끝에 있는, 파괴의 형상이 두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의 재생에 관한 신앙도 비슷한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고려대학교를 들을 때마다, 들을 때마다 골치가 아프다. 전우가 죽고, 그래도 나와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운다는 것이 좋은 해석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재생은 다만, 바로 죽지 않는다는, 포스트 시즌을 뜻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름답게 살다가, 포에니 전쟁이라든지, 크림 전쟁이라든지, 비너스라든지, 하는 것을 보다가,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건해야 하고, 우리는 채스터티, 처녀이어야 하는 것이다. 나와 헤어지고, 나는 한신대 기숙사를 가는 것이다. 한신대 기숙사는, 잠을 잘 때 쯤,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즉석 만두를 데우고, 얼른 먹자고 하는 것이다. 책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테이블에 매그넘 하나쯤은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와 헤어지거나, 이런 표현은 대단히 생경한 것인데, 함께 데이트를 했던 사람들은, 이상한 집에 가는 것이다. 일본 집에도 간다. 일본 훌륭한 교육 받은 집에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몇 번을 말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태극기 부대 중에 한 명이거나, 공부는 안 하고, 위안부 소녀상 모임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피라미드에 관한 상상은 무궁무진하다. 서양은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다. 우리마저도, 당장에 열대의 동양인들이 삼각형 모자를 쓴 것을 보면, 얼마나 오래 되었는 지를 알 수 있다. 머리가 사각형이면, 똑똑한 사람일 것이다. 행여 동물의 몸을 하고 있을지언정, 사람의 얼굴이 낫지 않겠는가? 몸이 사람이고, 머리가 사각형인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뭘 쓰고 있으면, 그것의 형태를 몰라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동양에서 박사 세 사람이 가자, 그나마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짐승을 보냈다고 한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경쟁할 수 있어도, 절대의 천연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올 때는, 그런 생각이, 그런 천년의 생각이 물러났던 모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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