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어폰어타임인더웨스트와 웨스트월드의 넷플릭스적인 관계
영화는 음식인가? 음식남녀? 처음에는 건물 같더니, 영화는 영화니까, 그래도 비유를 찾다가 보니, 지금은 음식 같아진다. 웨스트월드, 이색지대를, 음식을 먹다가, 보다가, 먹다가, 보다가, 시골의 바보 먹보처럼, 가슴이 철렁하면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한국 영화는 벗는 영화였기 때문에, 미국 영화가 인의애지의 전성시대를 구가할 때가 있었다. 미국 영화는, 한국 교수들보다 나았다. 지금에서야, 에베레스트를 점령한 사람들이 많아서, 나머지 사람들이 겨우 면천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와 같은 낯설게 하기, 작가주의적 소설,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창발성을 말하고, 구가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것이 있다고 해서, 그런 어떤, 대학 학과가 있다고 해서, 과목, 갑자기 선진국이 되고, 사람들에게 입장이 되고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세상에 혼자 있대도, 그 혼자가 오래도록 그렇다 해도, 가끔은 나뭇꾼이 지게를 지고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는 이색지대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 그렇게 율부리너가 조디 포스터와 나오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어린 내가 스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어린아이가 옛날에 말하는 것처럼 상대성의 정도가 없는 것이지만, 어린아이가 지는 해를 하루 빠지지 않고 바라다 보면, 스님들이 그와 같은 센티멘탈리즘에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센티멘탈리즘이, 돈만 많고, 군사력만 많으면, 누구나 될 수 있는 왕의 지위에 있는 것이 싫었다. 어쩌면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들을 내가 쫓아가는 느낌도 들었었다. 한국 영화는 울고 있고, 말에 지식이 없는 것 같았다. 무조건 아멘하는 것도 같았다. 무조건 아멘아멘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설교 말씀에는 항상 들을 것이 있었다. 지금과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브리트니스피얼스. 판단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판데믹, 판단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는 것 같은. 조금씩 판단의 방향을 나눠주고 나면, 태극기의 모습처럼, 가운데로만 뱅글뱅글 돌게 되는 것 같은. 판단을, 판데믹, 하지 않으면, 일본처럼 될 것 같은. 중국은 말하지 않기로 하자. 중국은 흐르는 강물처럼. 손을 씻는. 그와 같은 때에, 나를 말을 태우고, 태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지는 저녁해를 따라 날아가는 것 같았다. 서부 영화라는 것이 지겨운 것이었다. 인디언이 거기서 살아나지 못한 것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기본적인 것이 없는데, 거기서 쏘고, 죽고, 원스어폰어타임인더웨스트는 지금도 다 보지 않았는데, 최근에서야 처음을 조금 보았는데, 어쩌면 나의 그와 같은 활활 타오르는 근본 기분에 기름을 붓는 일을 하였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입장권이 없다. 어린아이는 다만 원한을 갚는, 태공조의 전이에서만 살아가는 것이다. 판단이 흐려지고, 그 많은 신천지 사람들. 예수교 장로회 사람들. 미니시리즈 구해줘도 다 보지 않았는데, 하나 본 적이 없는데, 예쁜 서예지가 굉장히 성적으로 나온다고, 그런 드라마 역사가 세계에 없을 것이라고, 나보고 곁눈질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죄가 없으나, 포괄적인, 컴프리헨시브, 그것의 피라미드적인 속성이, 사탄의 영향에는 톱니바퀴 돌림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는 얼마나 고통스럽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상생. 별 관심이 없다 했는데, 다시 보니, 그들의 환단고기 강의가 영 심란할 따름인 것이었다. 그러니 환단고기가 삼국유사를 이어받는 유일한 넷플릭스 드라마 더 킹덤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바른 대우와 인정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만 휘발성이 강한 상태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산불과 담배꽁초처럼 사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여행하고 관람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함께 책을 읽고, 대학 도서관에 가서, 적어도 한 시간은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목적 없는 여행은 지루한 인생과도 같다 하는. 목적 없는 인생은.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목적을 모른다. 다만,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 그것의 무책임을 삭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지가, 도리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다 죽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제로 죽이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그렇게 알 수 없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 영화는 끝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그때 나에게 말했다. 포맷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그래도 그 때, 어찌 키가 낮은 사람이 담 너머의 풍경을 볼 수 있겠는가 했었다. 어찌 S20를 구입하지 않고, 백배줌을 볼 수 있겠는가 했었다. 그것이 그렇게 안타깝고, 슬프고 했었다. 그리고 내 방에, 함께 사는 방에, 피가 가득 묻은 것도 같았다. 제작년도와, 내가 티비에서 본 해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 영화가 올바른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신천지는 그렇지 않은데, 신대우처럼, 그랬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영화 원스어폰어타임인더웨스트와 서로 대결한다는 것을, 그와 같은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이색지대급의 문제제기인데, 미국 영화 이색지대가 추사 김정희 정권, 처재를 종식시킨 것일까? 원인과 결과 중에, 본질적인 것이 있고, 시간적인 것이 있다. 본질적인 것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가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이고, 훌륭한 학교에서 훌륭한 학생이 배출되는 것 같은, 그와 같은 연관을 뜻한다. 시간적인 것은, 오비이락처럼, 오비맥주를 먹고 있는데, 옆에서 락큰롤 음악이 들리는 것처럼 다만 시간적인 의미에서 선후를 물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쑥스러워서, 말을 조심한다 해도, 이색지대가 사람들에게, 이영애가 좋아하는 단어로서의 지인들에게, 거의 막가파적인 파급력을 주고, 나눠주고, 그것의 연속성 안에서, 돌고돌고돌고, 다시 전인권, 돌고, 돌리고 돌리고, 신신애, 돌고 있다가, 적어도 시간적인 인과 안에서 김정희 처재가 종식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어느 영화가, 그렇겠는가? 예를 들면 일본 영화 하나와 앨리스가 세상을, 한국을, 뭐 어떻게 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하나와 앨리스가 나온 다음에, 해당 년도의 다음 해가 연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때마다, 이색지대는, 그러니까 싱그러운 의식으로서의 대한민국은 계속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부영화를 보고, 캠핑을 떠나고 싶어했는가? 그리고, 서부영화에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로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부산에서 노동하다가, 서울로 얼마든지 문학 공부를 하러 떠날 수 있지 않은가? 미국은 그런데, 달라스, 그렇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이다. 나의 포토삽을 보면, 그런 면에서는, 미국 영화의 나태함에 하늘 높이 드러난, 하나님의 아라비아 반도, 도끼, 은도끼 같은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이해를 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다만 나의 포토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소외시킬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사탄성을 그들이, 마치 음식남녀들처럼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좋으면 끼워주고, 싫으면 조금씩 따로 놀고. 그것이 우리들의 원시적인 시계인 것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한국 속담에, 사람들이 작은 위로를 얻는 것이다. 항상 게임만 하는 것 같아도, 그들끼리 모여 살지 않는가? 리그 챔피언도 하고, 방송에서 하지 않는가? 미국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모텔의 원조격인 곳에서, 공포 소설을 보는 것이다. 해가 지고, 아직 그것의 테두리가 익지를 못했다. 누군가 밀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스 경작도 제안할 것도 같고, 아주 잘 익은 밥공기에다, 채소의 익힌 것, 혹은 신천지, 그리고 그들에게 넘치는 엘에이 갈비를 갖고, 거기서는 자기식대로 스테이크를 할 만 한 것이다. 스피드로는, 달나라에까지 갔는데, 민속적이고, 경험적이며, 미각적으로는, 김치가 맛있다는 말을 세상 어느 사람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꿀 먹은 벙어리라고 말하고, 김치를 먹은 공포 소설 작가라고도 말한다. 최근 에이치비오 드라마를 보았다. 한 십분 만에 보았다. 그들끼리 장면을 나누고, 서로 다람쥐처럼 들어가는 것이 별로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처음 격이 떨어지고, 원스어폰어타임인더웨스트 같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금지되어 있는 성기노출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보았다. 어떻게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미국은 저질의 반경으로 삼투압이 되고, 한국은 한 명 빼어난 소설가나 철학자가 없는 데도, 그들이 원하고 원망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는가? 원래 보통, 삼류 국가의 왕권 정치가,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민주 정치에 대해 항거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이 사랑을 가르치는 것은, 다만 그와 같은 정신의 피라미드 현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사람들은 왕권을 제창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표면적이고, 제도적이며, 시민사회 경험에서 민주적일지라도, 이색지대 안에서는, 그와 같은 문법이 도무지 발설이 되지 않는 것이다. 미국에 왕이 어디에 있는가? 권투 프로머터, 돈킹? 아니면, 던킨 도너츠? 아니면 유명 공포 소설가? 그리고 나는 나를 생각해본다. 나는 왕권인가? 아니면 민주정인가? 그 둘의 영원한 삼투압적 현상학, 헤겔이 그것을 말했다는 것은, 전부이기도 하고, 말이 많은 것의 자기 폭로이기도 한데, 바로 그것으로서의 왕건인 것인가? 사람이 이색지대 안에서 책을 읽을 때, 마치 영단어처럼, 아는 것이 남는 것으로서 별로 있지 않다. 섹스는 다만 쾌락이 아니고, 훌륭한 스승에게 나타난, 훌륭한 학생인 것이나, 그런 것들에게는 천 마리의 동물이고, 수만 마리의 개불로 덮인 해변인 것이다. 내가 코스모 폴리탄들의 지식은 부럽지 않으나,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과, 거기서 살아나온 사람이 공포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그런 존재의 변천과 유기체적 지식에서는 부러움을 조금 느낀다. 내가 일찍 죽었다면, 그와 같은 신천지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개불로 있다가, 개불이 되는. 정말 비유 같은. 그들 중 몇 명이, 늘 항상, 죽기 전에 메시지를 보내니까, 내게서 얻어맞은 사람들이 동시에 발견하게 된 것 같은 것이다. 개불이라고 해서, 사탄은 아니다. 그렇게 생긴 사탄은 없다. 우리에게 천년 고도가 있는 것처럼, 항상 그것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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