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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밤 늦은 시각에 글을 쓴다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지만

by 마음대로다 2020. 4. 10.

밤 늦은 시각에 글을 쓰는 것이 반갑지는 않지만

 



 

 

 

옛말에 사람이 나거든 서울로 보내고, 말이 나거든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기이하고, 정치적이고, 그렇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나머지 속성들은 마치 사실이 아닌 것처럼 숨는 경향이 있다. 내가 말을 잘하면, 인간이 원래 말을 잘못한다는 사실이 숨고, 내가 문학을 잘하면, 인간이 문학을 두고 영원히 티켓만 끊는 사람이라는 것이 감춰지는 것이다. 내가 여자 친구가 많고, 틈만 나면 그것을 쓰고 있으면, 인간이 선 자리에서조차, 말을 못하고, 손을 떨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서로 싸우고, 좋은 말을 모두 한 다음에, 집에 가서는 연락조차 안하는 존재라는 것이 숨게 되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좋아하고, 내가 도서관을 좋아하고,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차이나는 클라스, 그러니까 나머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헤라클라스 같은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언론에 의해 통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도시 거대 톱니 바퀴의 춤을 드디어 발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장관, 그러니까 아침에 붓이 되어 출근하면서, 아직은 입체가 아닌 상태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해서, 작업을 하고, 태양신을 섬겼던 이집트의 사람들처럼 집에 오는 것을, 하나의 그림이라고 할 때, 홍대 미대 다니는 엘리트 유채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참 그런 사람이 없다 싶은데, 내가 보고, , 하는, 그런 작가가 한국에는 없다 싶은데, 그래도 있다 가정하면, 서울시의 전체 인구가, 적어도 한 개 구의 인구가, 훌륭한 화가의 그림의 시간에 모두 가둬질 수가 있는 것이다. 입체가 있다면 평면이 있다. 우리가 입체를 향해 모든 예술론이 발전한 것 같아도, 그와 같은 입체가, 아무런 도덕성을 가지지 못하고, 드디어 장르적으로 사람들이 저녁 드라마를 보다 보니까, 기생충과 같은 줄거리를 입에서도 꺼내고, 이토 준지의 표현을 조금 써보자면, 죽은 사람의 항문에서도 그것이 나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평면이 되는 것이고, 다만 평면 위의 아주 작은 차이의 입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석류와 같고, 그것을 마시면 얼마나 시겠는가? 석류를 그릴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때인 것이다. 그것을 그리고, 그것의 이면을 그리면서 동시에 관찰하고 있으면, 굉장히 아름다운 여학생이 일본 영화 링처럼, 그보다는 예쁜 모습으로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평론가도, 주자의 그와 같은 블레이드 러너에 올라탈 수 없다. 이야기라는 것은, 한정 자산과 같고, 제한적인 능력과 같다. 내가 서양의 공포 영화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입각점을 만들어 보라고 하는 이유는, 서양의 공포 영화는, 마치 심해진처럼, 그들의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경제 속에서 기적처럼 표현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명 작가가 아닌데도, 훌륭하며, 형이상학적인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 나오게 되고, 찢어진 만큼, 가난한 만큼, 오직 앞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들이 나중에 유명해진다고 해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지 않은 또한 작가들이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다. 악성 바이러스에 노출되는데, 꼼짝 없이 아프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작품과 표현은 강렬하고, 그들이 직접 좀비가 된 것과 같은 삶의 밀도 속에서, 그에 관한 평론과 댓글들은 난장판이 되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기생충과 같고, 기생수와 같다. 그들은 스펙에 기대어, 때로는 신촌이나, 평촌, 서초 법률 단지에서 사는 것이다. 그들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우리가 언제까지고 모르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판사와 같을 것이라는 것, 그들이 의사와 같을 것이라는 것, 그렇게 우리의 뇌에 그와 같은 전자칩이 들어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바이러스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는 것이고, 나처럼 안 보는 사람을 제외하고, 바이러스인 줄 알고 그것을 보면, 꼼짝없이, 바이러스에 걸리게 되고, 확진자가 되고, 전파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사람을,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한다고 치자.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그것을 모를 때에는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대다수의 영화들처럼,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자의 방에, 내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고, 벽지가 되어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되어 있고, 그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금방 고통스럽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와 같은 전의 단계가 있고, 후의 단계가 있는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계룡산, 그렇게 부산, 서울을 그렇게 챙겼던 허균처럼, 허클 베리핀, 전국에 아름다운 산세의 고장이 많다는 것은 알아도, 김유신처럼 생긴 무등산에, 숨은 인물들이 마치 핏빛 계보를 이루고 있어서, 날이 추워서 도저히 겨울에는 공부를 못하겠는 팔도의 선비들이 전라도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와 같이 계속해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산세에서부터, 어깨가 나오고, 월출산에서부터, 능력이 월출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평면인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나라에 어떤 평론가가 있어서, 월출산과 무등산을 갖고 미학적인 비교와 상상을 펼칠 수 있을까 했는데, 정말 그러한 것이다. 삶은 성난 황소와 같은 월출산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퍼쎌의 슬픈 노래들을 듣다 보면, 금세 무등산과 같이 단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난 황소와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단정함의 요구가 선험적으로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격들을 보면, 그런 구석이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성적인 묘사도, 신윤복의 것이 유일하다. 산은 그렇게 노골적인데, 어찌 인간들은 산을 오르다 말고, 보다 말고, 무등산을 오르다 말고, 보다 말고, 두 산을 두고는 아무런 기억력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월출산을 보고, 두류산도 아름답지만, 무등산을 본다면, 튱격에 휩싸이지 않겠는가? 평생을 살아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고, 기억력이 짧거나, 표현력이 없거나, 그와 같은 다급함이 없거나, 어디 움직일 구석도 없이 가난했다는 것일 것이다. 세상이 그러하다.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있지만, 세삼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 그보다 막중하다는 느낌인 것이다. 신대륙에 있는 사람들은 갑자기 희미해지고 말았다. 그들이 갖고 있는 로키, 그들이 갖고 있는 슈퍼맨, 그들이 갖고 있는 디어 헌터, 우리가 아주 좋은 선반을 가지고 있을 때는, 빛나는 은촛대처럼 아름다웠었는데, 마음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지러울 때는, 금방 필요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어찌 그들은, 모든 예술과 역사, 미술과 향연, 축제, 그리고 경제와 과학, 인문학과 대학, 민주주의적인 어떤 느낌을 갖고서도, 다만 월출산으로만 있지, 무등산의 서석대와 입석대처럼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못하는 것인가? 사탄은 금방금방 움직인다. 의료진이 금방금방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수학적으로 보면 그것이 추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금방금방 움직이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을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이용한다. 우리에게는 미시령의 아름다운 바위 산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관계를 앞으로도 맺고 있고, 뒤로도 맺으며, 외국어대학교로도 맺고 있으며, 생명으로도 맺고 있고, 스콜라 신학적으로도 맺고 있다. 사탄의 나락으로, 영원한 형이상학으로 추락하는 것도, 다 그와 같은 관계의 기억, 경험, 누적된 생활 패턴 때문인 것이다. 세상에는 주자와 같은 평론가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쏘시얼 콘트렉트가 있었다. 장자끄 루쏘만 보더라도, 쌍떼, 그의 문장은 요소요소 선명한 주제를 따라가기는 하나, 시대가 만연체이기도 했다지만, 평론가에 대한 자기 회의가 짙게 배여 있다. 내가 지금 누구나 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토를 달 사람이 누구인고? 그와 같은 매우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태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에밀의 끝을 보면, 서양의 모든 철학, 정치, 예술 같은, 그런 모든 관계가 생명과도 관계를 맺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니 교육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월출산을 보고 누가 교육을 연상하겠는가? 무등산이 교육 중에 교육이다. 조선대학교는, 그 본관 건물이 이상하게 생긴 것이거나, 중성적인, 여성적인 느낌인 것이다.

 

인간은 주자와 같다. 주자처럼 갑갑하고, 슬프고, 티비 보고, 책 보고, 글 쓰고, 노래하고, 마음으로는, 사랑하고, 시 쓰고, 연애하고 한다. 여행하고, 별을 보고, 시를 읽고, 또한 예술을 기획한다. 시간을 읽고, 수상함을 따지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성경의 내용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를 좋아하고, 어렸을 때 사귀었던 여학생들과 다시 만나는 꿈을 꾼다. 그러나 지구 전체의 문명은, 조금도 주자와 같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슈퍼맨에서 나오는, 평면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입체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어가고,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어가며, 국가라고 하는 것으로 들어가고, 교육이라고 하는 것에서 도리어 평면으로 도피하고, 자유로부터 도피하며, 좋은 책을 마다하고, 늘 잡상인과 같은 책들을 출간하고, 그들이 우선이 되고, 자세히 보면 항상 그런 것들을 국제적으로 상찬하고, 책을 말하는데, 사탄을 연상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리 자부하곤 한다. 인간, 아니 지구 평면설이라는 말이 그와 같은 것이다. 입체가 입체이나, 거짓이면 평면과 같고, 도피와 같고, 평면이 가난하고, 아는 것이 없으며, 사랑도 없고, 그랬더라도, 동천이라도 기억하고, 몇 마디라도 평생을 잊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것은 입체 중에 상입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겨우 미시령이나, 월출산, 두류산, 그리고 무등산을 말한다면, 우리는 도리어 서양 문명과 예술, 악마적인 자부심에서 밀릴 수 있을 것이다. 후지산이 때로는 단순하게 일조하는 구석이 있다. 한라산은 조금 평범하고, 영국 런던 같은 데가 있다. 그러나 화산이나, 황산, 그리고 태산, 그리고 다른 산들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다가, 아주 젊어서, 접시꽃 당신으로 죽는다면, 화산이나 황산에 갈 것 같은 것이다. 반드시 인구가 있다. 특히 황산에 갈 것 같은데, 모든 사람이 영원히 함께 등단할, 그런 산이 작으면, 무등산처럼, 우리는 그렇게 죽다가 실망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