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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마광수 교수와 더 킹 그리고 루갈

by 마음대로다 2020. 4. 19.

마광수 교수와 더 킹 그리고 루갈

 

 

 

 

 

 

마광수 교수는 그것의 이집트 벽화가 한국의 프로이트 같았다. 사람들은 야한 여자가 좋았고, 그의 선진적이고 선동적이며, 착한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읽어보지 못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어째서 할 수도 있지만, 루갈의 자꾸 다운되는 인공눈처럼 그런 책에는 아무런 속도가 발생이 되지 않았다. 루갈도 재밌게 보다가, 이제는 그만 보기로 하니까, 마음이 예전처럼 다시금 안타까워진다. 루갈은 어감이 눈깔 같다. 아이들은 별로 좋지 않은 언어적 환경에서 자라는 것 같다. 책을 읽지 않아도, 마광수 교수의 맥심은 나와 함께 걸었다. 사람들은 김여름이 그렇게 예뻤냐고 하겠지만, 정말 모델 같았고, 야한 여자인지는, 내가 야해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즐거운 사라도, 내게 던지는 미국의 얇은 플라스틱 원반이 되었다. 내용도 좋겠는가 싶지만, 멍청한 한국의 지방이 아니라, 유능하지만 관심이 없는 중국의 어느 도시에 갈 것 같아서 마음이 또한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야한 여자와 같이 즐거운 사라도, 나와 함께 걸었다. 여자들은 속옷을 가슴에도 달지만, 팬티와는 다르게 영 성가실 것 같은 것이다. 남자들도 메리야쓰를 입다가, 런닝맨, 그것을 여름에는 덥다고 입지 않으면, 당연히 땀 같은 인체의 물질이 묻겠지만, 나름의 방식이 되었던 것이다. 메리야쓰가, 런닝맨, 브라만이 아니지만, 여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도시를 걷는 내내, 그에 관하여 마음이 많이 부족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런 말들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해주지 않아서, 더더욱 마광수는 내게 포인트가 좋았었다. 서울은, 그런 사람이 몇 명 있을 법한데, 서울지방법원,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다. 대게 일본거류민단 소속처럼, 식민지 지식인인 척 거류하는 것들이 전부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해바라기의 지금은 헤어져도 노래가 있다. 서울은 그래서, 그 노래는 춘천에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다고 해주자. 주자. 주자학. 그렇다고 해주자. 제발. 제발. 그런 아름다운 노래가 광주나, 순천, 밀양에 있다고 하지 말자. 서울에 즐거운 사라가 있는 것처럼, 해바라기의 불후의 명곡도 서울에 있다고 해주자. 우리는 대게 이성이라고 하면서, 짐승을 사귄다. 코로나 바이러스 일보 직전인 것이다. 그래도 사귄다. 아직 문리가 트이지 않거나, 영원히 트이지 않거나 한다면, 인민 대중은 염으로 산다는 말이 있듯이, 서로의 속옷이나 여름 겉옷에 적당한 땀이 나는 것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의 어디에 문자가 있는지, 우리는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에 창궐해도, 세상에 어떠한 마광수가 없어서, 미국 사람들은 특히, 가난해서도, 마음이 답답해서도, 플로리다에서, 해변에서 유리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다가, 자랑스러운 분위기를 먼저 획득한 한국 댓글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자기 바이러스는 깨끗하다고 자부를 하는 것이다. 멍청한 대중들이라고 에스비에스에 나왔다고, 덩달아서 자기들도 그런 입장들이라고. 코로나 댓글들도 한 발짝 물러서면 불쌍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전철을 타고 집에 가는 것이다. 나는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아침과 저녁이 다르지만, 그것의 차이가 여간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저녁에는, 먼저 사람을 보낼 수 있다. 집에 가서, 먼저 발을 씻을 권리. 조금 늦게 가면, 이상하게도 빈 전철이 오곤 하였다. 너무 이런 식으로 살면 고란한데 하면서도, 서울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유흥과 향락, 정처 없는 영혼의, 끝없이 떠도는 한강 유람선, 유리하는 민족의 영원한 광야와 같아서, 무슨 체력으로 다시금 술을 마시고, 체력적으로 보면 다시금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을 좀비로 만들 때, 그것의 괴력의 원리를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게의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조심해지는데 반해, 힘이 정발산역하는 것들이 또한 있는 것처럼. 티비를 보는 것도 그렇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아파서 보지 않고, 입장이 달라서 보지 않고, 바이러스가 있어서 보지 않는데, 씻고, 씻지도 않고, 욕하고, 욕하면서도 보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술을 마시고, 치킨을 먹고, 어떻게 일찍 들어왔으면, 술로 따지면 삼차를 가는 것이다. 티비는 평면이 되었으나, 사람들은 그와 같은 큐엘이디로 인해, 뿔이 솟았다 말았다 하고, 혹이 솟았다 말았다 하고, 눈이 튀어나왔다, 손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볼 수 없는 권리가, 더 킹,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국 사람들처럼 없는 것이다. 비싼 팔십 몇 인치 티비를 샀는데, 티비 보는 재미로도 보는 것이다. 학생들은 얼마나 복되었는지 모른다. 공부에 지치고, 하지만 그와 같은 왕관으로서, 드라마의 알현을 맞이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적인 형상인 것이고, 자기화나, 실현이 없으면, 그것이 공중으로 떠서 스크린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살갗이 없는 육체가, 사진을 그렇게 바라다 보는 것이다. 즐거운 사라도 그런 내용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마광수가 천재적인 느낌이 있는 것이, 그와 같은 북청 사자의 탈을, 올록볼록, 눈이 튀어나온, 춤추는, 그것을 지금과 같은 제일의 티비 제조국적인 조건에서, 예언한 것 같은 것이다. 사자와 살면서, 사자와 자면서, 라이거를 낳는 것이다. 미국의 폭스 티비는, 너무 솔직한 것이거나, 너무 아무 생각이 없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씨엔엔은, 한국 청년에 대한 영어 회화 수업이거나, 미국 콜럼바인 총격 사건이거나, 아마도 코로나 구십일퍼센트는 후자일 것이다. 누가 라이거를 낳고 좋아하겠는가? 우리가 싫어하지 않는 것은, 좋아하는 기준이 늘 언제나 알아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제일 국가였으면서도, 늘 언제나, 좋아하는 기준이 떨어지다 보니, 러브스토리는 한 번 뿐이고, 프레데터는 프레데터스까지 나오는 것이다. 로키원은 약간 러브스토리 같았고, 나머지 시리즈는 미국의 새로운 서울지방법원을 따르는 것 같았다. 람보원도 처음은 러브스토리 같았다. 김여름에게 전화를 해서, 언제 한 번 만나서 차라도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러나 만나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전화를 받아서, 영 기분 나쁘게 대하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아쉬운 것이 많은데, 도리어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군다는 것에 대한 판대믹이, 재판을 거대하게 하는, 믹은 모르겠지만, 내게서 일어서 더이상 전화하는 것을 멈추었었다. 그래도 그렇게 예쁘게 생겨서, 문창과에 가고, 한신대에 가고, 내게서 전화를 받을 때는, 전화상의 자기 관계에서, 사람은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자기의 생각에게 하는 경우가 몇 개 있는데, 그런 전화상의 자기 관계에서 호기심이, 그러니까 얼굴 예쁜 여자치고는 많은 것이었다. 대기업의 비서를 상상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비서라도 되는 것의 모습이 선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대생의 꿈인 스튜어디스보다도 지나쳤다. 내 신학과 후배 중에 스튜어디스가 조금은 꿈이라는 얘가 있었다. 항상 나를 보고 웃고, 나도 여름 티셔츠처럼 오염이 되었는지, 웃고 했었다. 그것의 불빛이, 장공관의 계단에서, 적당하였었다. 내가 사자를 죽이면, 티비가 없고, 주위는 조용해졌다. 내 후배도, 김여름도, 어제 꿈에 보았던 예쁜 개그맨도, 나와 함께 적당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앵글로 색슨, 그러니까 착각이었던 것이다. 마광수 교수도 죽었고, 사자의 죽음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티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편능화되어 있는 두뇌가, 티비가 없으면, 입체를 회복할 수가 없다. 가끔은 다큐멘타리라도, 마타하리처럼, 재밌게 봐야,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드라마를 보고, 드라마를 보는 것은, 드라큐라처럼, 그 사이에 다큐멘타리가 있을 것 같은 앵글로 색슨 때문인 것이다. 여자가 남자와 헤어지면, 남자가 책과 같이 뒷모습을 보여주면, 여자는 책 한 권 없는 자기 만의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못 만날까? 따뜻한 시는, 결코 차가운 소주를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럴 것 같은 것이다. 일부러 냉정한 척 한다. 냉장고처럼도 군다. 그것은 남성적인 방사능이, 마치 태초부터의 비극을, 현대 물리학적으로 상정하는 것처럼, 압도적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공식인 것이고, 얼마든지 대학 수업을 하듯이, 자기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 티비와 같은 신경증적인 북청 사자는, 아름다운 해바라기 노래들처럼 살려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용도 때문이다. 다만 이념이나, 권선징악이나, 어떤 자연법, 자연악, 포스트 모더니즘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삼성이나 엘지 티비에 굴복하지만, 극심한 정신착란의,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그런데 그와 같은 티비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는 말이 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알면, 분명, 아침에 일어나 정신이 맑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