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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잔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보편적인 모음들을 큰 소리로 외치면, 아에이오우, 그런 식으로, 동물들이 움직이곤 하였다. 그것이 그렇게 어린아이들에게는 어필을 했다. 불법 사냥꾼들을, 아에이오우, 그렇게 타잔이 부르면, 코끼리가 나타나서, 나무를 쓰러뜨리고, 그들을 물리치곤 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친구가 별로 없다. 그리고 타잔의 여자 친구는 제인이었다. 하지만 이름만 놓고 보면, 번개 치고, 비가 내리는 밤, 아파트에서, 생각에 잠기다 보면, 너무 장난스럽지 않게, 사탕이 없어서, 젤리나, 과일 같은 것이 없어서, 기네스 흑맥주에다 설탕을 조금 타서 마시는 때에는, 타잔이나 제인이 이름이 다 한국 사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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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는 불법 소유자의 떨리는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 독일 철학자들은, 독일 사람들이 얼마나 조신하면서, 세상을, 세계를 살아가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 하는 해묵은 말을 했는지 모른다. 전쟁 중에, 과연 나는, 프롬의 사그라드는 불빛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사실, 대학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가면, 프롬으로 논문을 쓰고자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적인 언급이, 지나치게 프롬에게는, 노골적인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존재라는 말만 해도, 충분히 성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존재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인식을 지향하지 않는 존재는, 비존재인 것이다. 존재는 주로 의식으로 있으며, 의식으로 있는 것은, 실은 무의식으로 있다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생각해보면, 대학 다닐 때에, 변유와 사유에 관한 언급은 대충 들은 적이 있지만, 남으로부터, 나의 이와 같은, 이와 비슷한 자기 존재의 보편적인 피력은 별로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공부를 해야 했고, 여자 친구가 옆에 있었어도, 가끔은 시험공부를, 구두시험 같은 것을 마음으로 치러야 했다. 그래서 몇 분 동안은, 비슷한 철학 강령 같은 것을 말했을 것이다. 존재는 성적인 것이 아닐까? 영어로는 비긴 어게인 같은 느낌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비나인 같은 느낌이 있을 것인가? 비가 내려도, 금세 조금 공부하는 한국어의 시작이 되곤 한다.
영어 원서를 읽는 사람에 대한 초상은, 젊은, 스스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사람들 앞에서는, 비행기에서 내려오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소위 사회적인, 출판적인, 기성논문적인 존재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친구를 배신하는 것이고, 순간 루카에서, 기적처럼, 전기처럼, 조금씩 있는 문구들에 잘 표현되는 것 같다. 나는 존재를 말할 때, 경기서적에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살 것이지만은, 돈을 갖고, 구입하려는 순간에도, 잠깐 낮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바깥으로는 차들이 흐르고, 사람들이, 먹을 것이 저기로 사라지는 순간처럼, 그림처럼, 그렇게 읽을 수 있었던, 바로 그 살가운 존재로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정말 모든 존재, 여자, 예쁨, 옷을 잘 입음, 좋은 말을 할 줄 앎, 영화적인 센스, 그런 것 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여자를 만나, 신비한 흐름 같은 기대, 없지만 자꾸 착각이 드는, 그 잠깐의 음표가 그렇게 슬픈, 여자들의 무지에 대한 과시와, 경제적인 주장 같은 것이 허구이고, 트랩이며, 엔트랩먼트, 다만 사회 공중이 생명의 출처로써 팔십 점 처리를 하는, 팔달문 같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는 존재들일지라도, 내가 전기 자극을 하면, 언젠가 화성처럼, 화답할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는 아직 철학적 정상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이를 것이라는 확답도 얻지 못한 상태였었다. 사람이 성기의 구멍을 갖듯이, 나는 정신의 구멍에, 밤낮으로 초조하고,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그렇게 플라타너스 가로수, 양산리와 수원역 사이는 거리가 먼 데도, 굴원처럼, 비존재처럼 배회하였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현실 존재만을 생각했다.
경기서적이 크고 아름답게 이전하여서, 만족할만 한데도, 나는 불만이었다. 존재만 생각하면, 나는 끊임없이 여자에게 전화를 거는 나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다 보면, 항상 그와 같은 불완전성과, 불안감을 선사받았던 것이다.
점점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게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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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대논리학을 읽을 때, 그렇게 행복하고, 뿌듯하고 그랬다. 뭘 알아서, 그것을 알았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논리학 책이, 본질 편, 개념 편이 있는데도, 존재 편만 삼분의 이를 읽고서,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읽지 않은 것은, 본질 편이나, 개념 편을 마치 어떤 외국어를 아침에 일어나 하게 된 것처럼, 알 것 같았던 것이다. 존재도 보편이다. 존재는 논리를 갖고, 논리를 자기 부여하면서, 의식의 운동을 하는데, 그와 같은 숱한 운동 속에서, 당연히 논리적 속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속성은 다음의 존재와 같은데, 그래서 결국 속성끼리도 존재의 보편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존재의 보편성과 본질의 이중성은, 다만 의식으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관념의 내부 안에서의 비존재인 것이다. 오직 운동만이 객관적인 것이며, 관념의 객관적인 운동, 그것의 외화, 그리고 그 외화된 것에 대한 지속적인 학문적 검증에 대한 욕구가 바로 개념이다. 존재는 반드시 존재이고, 비존재가 아니나, 오직 본질, 그리고 개념화의 과정을 거치고, 완성된 것만이 존재가 되고, 존재인 것이다. 나의 뇌에는, 아직까지, 그런 것들이, 나의 것과 더불어, 객관적인 그런 눈빛, 전대의 홍도, 건물, 가로수 등이 각인되어 있다. 입각점이 되어 있다. 존재에서 죽어도 사실 되는 것이다. 본질로 결혼하고, 개념으로 성공하는 것은, 사실 존재에서 이미 선결되는 것인 것이다. 의식은 비존재이나, 의식만큼 존재인 것 또한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와 같은 의식 속에서 죽어간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논리학의 스토리는 보편성이라는 허울 아래,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사랑도 정해져 있었고, 주인공의 직업도 아주 단순하게 철학자였었다......
그와 같은 염동파, 소동파 아래서, 그것이 어디 가지 않고, 철학적 불모의, 혹은 절대의 소질의 서울에서 그만한 사람들이 몇몇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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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루카 사람들 뿐 아니라,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지만, 그런 완벽한, 고전적인, 불타는 사랑이 내게도 아직도 가능하지 않겠나 싶다. 여자의 말이 부분부분 기쁘고, 힘이 있고, 년말 같은 때에는, 서로 이야기한 것들이 젠부 기억이 되는.....
그런 느낌, 우리 사는 세상의 말만 넘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