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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집은 모르겠는데, 외출 같았던 박남정의 상점들, 그리고 크레용 팝의 한국 가요의 지층........

by 마음대로다 2013. 6. 22.

집은 모르겠는데, 외출 같았던 박남정의 상점들, 그리고 크레용 팝의 한국 가요의 지층........

 

 

 

 

 

 

 

 

우리나라는 지금 유리성에 갇혔다. 그것의 소스 통신이 걸그룹들의 섹시 댄스 경쟁이 아닌가 한다. 가장 아름답게 꽃필 때가, 마치 셰익스피어 같았던, 그의 연극적 세계관, 메구로 가조엔 같았던, 새 색시의 자기 정체성에서의 영어적인 소프틀리 인카운터였을 것이다. 프레쉬맨은 그것이 직업일 때가 있다. 대학 일년생은, 자부심이 넘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노예처럼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을 상대해서였을까? 아니면 갑자기 거대하고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가 새 집으로 이사온 것 같은 일루젼을 선사해서였을까? 학과를 선택해서 들어온, 단 일 년 뿐인 이념의 시간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신학과를 따라올 과가 없다. 국문학과는 불후의 명곡 시리즈가 연장한다. 그것은 매우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다. 마치 새마을 운동처럼. 우리나라에만 새마을 운동이 있는 것처럼. 호라. 박남정의 노래마저도 새로이 들리지 않는가? 우리는 옆에 신세대를 두고, 묻고 답하는 것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재밌게 들리느냐? 그들은 마지막 노래마저도 대단하게 들린다고 답할 것이다. 안봐도 불보듯 뻔한 구경이다. 그러나 노래가 차단되는 학과는, 프레쉬맨으로서의 자부심이 없다. 현상학적 측면에서, 그것이 섹시 댄스의 경쟁이다. 크레용팝은 그 모든 것을 선험적으로 가로지른다. 어머니와 딸이 싸우고,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많이 맞는다. 집기는 부숴지고, 딸은 울고 울고 운다. 집을 나가고, 갈 곳이 없다. 처음으로 시종장이 붙지 않는 공주의 져니가 된다. 센치멘탈. 사람들은 싸우지 않는다 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이다. 때로는 싸워서 도를 깨우치는 경우도 있다. 이제는 다 커서, 어머니와 싸울 줄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딸은 어머니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도 마찬가지. 부모가 설정한 레벨의 꼭두각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자산은 한정되어 있다. 대사관이기보다는 영사관에 가깝고, 라오스에서 탈북 소년들이 한국에 인계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왕이 입는 용포는 누가 입는가? 그것은 선명한 멜로디 라인과 같다. 화성의 영감과도 같다. 생각의 지평선과의 연합은, 시적인 출가와 그것의 사진이 일치한다. 가출 청소년은 잠재적이다. 담배는 안개이고, 불은 쉽게 죽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부정이다. 어머니가 불을 켜고, 아버지가 차를 타고, 담배를 피우고, 하는 것을 보다가 처음으로 원시인이 불을 사용할 줄 아는 것과 또한 일치한다. 담배가 몸에 해로운 것은 알지만, 정신병이나 죽음은 더더욱 존재에 해로운 것이 아닌가? 담배에 중독되는 길을 걷지 않는 것도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고 있다.

 

그 옛날 학생운동은 거리를 점령한 백마와도 같았다.

 

여학생은 가출청소년마냥,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를 사랑하였다.

 

한번 접으면 개념이 생겼고, 두번 접으면 이념을 주장할 줄 알게 되었으며, 세번 접으면 역사가 잡혔다. 역사가 잡히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다. 만일 국군이 같은 일을 했다면, 여학생들은 모두 학군단에 지원했을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아름답다. 그의 순수이성 비판은 아무런 보조 출연 없이 지금까지도 단독책으로 있다. 철학책이 누구에게 가독적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무인도적 조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은, 아주 뚱뚱하고, 성격이 분명하고 발랄한 여자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있는 사람이 한 장을 읽고 두 장을 읽고 세 장을 읽고 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졌다. 아무런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깊이가 없다. 여기서는 뜻과 의미 가치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신학이라고 갖고 있는 콘트라베이스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직접적으로 여자 친구 이름을 부르고, 그 집 아버지를 문 앞에서 상면하자면, 박남정의 노래들도 같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에게는 먼저 감각이 있고, 시간과 공간은 감각과 경험의 연속을 갖지만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선험적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의 대상을 우리는 늘 만나지 않을 수 없는데, 보통의 이념과 제도적인 것들이 합리적 판단으로써 다가온다고 했다. 우리가 학문을 하고, 시민들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합리적 판단의 집단성과 공동체성을 함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시공간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제외한 상태에서, 감각이 감성과 반성의 영역으로 전개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경험이고, 그것의 방식은 분석이라고 했다. 그래서 합리적 판단과 경험적 분석은 논리적 종합의 원인과 결과로써 우리들의 자아를 구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도식적이거나, 수리적인 조합일 수가 없고, 그또한 선험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 유명한 경험론과 합리론에 관한 비판의 말을 하였다. 뭐 없는 경험론은 뭐와 같고, 뭐 없는 합리론은 뭐와 같다. 오직 선험적 종합판단만이, 그 둘의 존재 양태가 갖고 있는 약점과 한계를 극복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음악적 흥분과 같다. 뭔지 잘 모르겠는........

 

국문학적 집약체와 같다. 그 또한 정확하지 않아서..........

 

 

 

 

 

 

 

 

 

 

 

 

 

우리는 분명 질서와 자유를 훈련받지만, 교육이라고 하기에는 그것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해서, 결과적으로 말하면, 어째서 훈련받겠는가 하는 반문의 역설을 확인할 뿐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도식과 그림, 미장센은 아름답기가 그지 없지만, 주관적 선험성의 한계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다. 물론,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이 그것의 순수한 비책을 따라주고 있다. 그러나 판단력비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선작 순수이성비판의 무용성, 자기자신의 반대적 무용성을 증명하기에, 결국은 남의 실천이성비판에 교보재가 될 운명을 칸트의 전 체계는 사실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전장의 병사가 병원에 와서, 병을 치료하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회구성원이 되던지 빛나는 장성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시간부터 병원장이 된다면 그것의 흐름이 호소력이 없고 실제로는 불확실하다는 느낌밖에 가질 수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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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관적 선험성이란, 한없이 깊은 위로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