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게 일억이 있다면, 형상적 백일몽....... 티아라 데이바이데이.......
대학에 이른 사람이 밀항할 수는 없다. 그것은 티아라 같은 밀양이다. 글을 쓰다가 쏟아진 아름다움 같아서, 순자의 군자라는 말이 그것일 것이다. 얼마나 그의 모습은, 문체는, 소인 같은가? 그러나 마음이 군자인 것이다. 대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자기가 작다는 말을 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개별적이고, 특수하며, 지엽적이다. 그리스 극작가가 있었다고 한다. 내 이런 말은 호불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른, 그것의 습기 같은 것이다. 남자 주인공 이름이 아무개인데, 이런저런 채무 관계에서 승리하는 법을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다. 심지어는 돈을 받기 위해 온 사람을 두들겨 패기까지 한다. 그런데 맞고 간 사람의 아들이 똑같은 것을 배우고 와서는, 뭐라고 말한 뒤에, 그와 똑같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인공 이름이 아무개인데, 더이상 배운 기술을 사용하기를 멈추고, 소크라테스의 집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연극이 끝난다고 한다. 순자의 글은 매우 소인스러운 것이다. 이 말은 충격이다. 너무 결이 세련되고,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세워본 적이 있는 내 오토바이처럼 아름답다. 수많은 건물들을 보라. 호라. 그리고 자동차들과 버스들을 보라. 내 오토바이는 작고, 작다. 물론, 무게와 씨씨를 비례로 하면 이천씨씨 정도 되는 것이지만, 그런 것 말고, 그냥 보이는 것으로만 말이다. 그리고 승용차로 출퇴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 교통들을 이용한 사람인 경우, 그것은 또한 무엇이 되겠는가? 나는 군자이고, 대인이다. 무엇과 부딪혀야 소인이 되는가? 시황제의 문장 만큼 가장 작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 그것은 마치 가을날의 단풍 같다. 만산홍엽. 게임의 법칙에서, 박중훈이 마지막에 죽는지 모르겠으나, 그 시절의 나의 투사가 죽는 모습에서, 만원짜리 하나가 속주머니에 있고, 그것을 꺼내는데 아직 식지 않은 피가 얼룩져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만산홍엽이 아닌가? 그와 같은 세련됨이란, 작가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영원토록 바늘 구멍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인을 끌어안고, 소인들의 활력을 북돋고, 소인들의 교통을 친히 만들고, 소인들의 놀이동산에 축사를 하고, 소인들의 패션까지도 만들었던 믿기지 않는 시간 속에서, 소인을 꾸짖고, 군자가 되라고 하셨다는 것 밖에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종말을 염려하고, 성경을 경외하며, 하나님, 아직은 중국이 매우 작은 나라라는 의미에서 미래를 가리키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자는 얼마나 찬란하고, 축복에 넘치고, 가장 공부를 잘할 것 같은 청년으로서의 박중훈은 되살아나고, 대학을 가고, 어느 한국 영화에서처럼, 마지막 장면, 무슨무슨 긴 포옹(1983), 돈은 돈이요, 붉은 색은 붉은 색이다는 생명이 넘치는 분별의 높이를 달성하는 것인 것인가? 그러나 그것도 고장난명, 수구초심, 낙장불입, 무슨 말이냐면 손을 손쉽게 바꾸는 짓이 아닌가? 그 짧은 순간. 다만 그것을 우리가 보았다 하는, 분신사바 같은, 환상 기도회 수준이 아닌가? 순자는 악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선입견으로서 삶이 하직하는 지식인들도 이루 셀 수가 없다.
내게 일억이 있다면, 당연 오토바이를 살 것이다. 먼저 혼다 씨비알천알알 흰색의 신형으로 살 것이고, 다음은 희미하다. 각축이지만, 우리는 티맥스오삼공이 내 친구에게 선물되는 것도, 내게 이억이 있다면 가능해질 것이다. 가난은 돈에도 있도, 시간과 세포에도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 뜨겁지 않다는 보고를 읽었다. 그것을 나는 감사의 마음으로 보았다. 나는 돈이 없는데, 시간과 세포에도 있는 가난을 염려해주는 높은 사람을 대하는 듯 했다. 로드킹 백색이 다음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얼추 오천만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티아라를 본다. 사람들은 한국적인 선입견, 토대로서의 오해를 갖고 살아간다. 그것에 비추어 보면, 나는 조금도 한국 사람 같지 않다. 배신자들처럼, 우라기니모노, 딴 나라 사람으로 넘기지는 않는다 해도, 우리나라 사람 같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씨비알천알알은 정이 붙었다. 그리고 백색의 로드킹은 금모래 빛이다. 왜냐하면 돈 그 자체는 너무나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두 오토바이가 내가 있는 곳의 마당에 진열되는 것은, 내 삶의 만족 같은 것인가? 슬픔이 나를 잠식하기 전에, 친구를 불러 자주자주 투어가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사람은 다만 보석과 같은 빛으로도 연장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연장이 심각하게는 그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씨비알천알알 같은 것이라면. 그것을 욕정으로 올라타고, 뒷타이어 같은 똥이나 싸고 다닌다면. 로드킹을 타면서 세상만방에 방귀 뀌는 소리나 똥싸는 소리를 내고 다닌다면. 그것은 너무 행복하고, 자극적인 것이 아닌가? 순자는 그것과 같다. 순자는 경제 발전에서만 발생하지 않고, 그것의 위대한 개념과 이념이, 경제의 자기 의식의 시간에도, 문화의 맹아적 순간에서도, 요청되고 재진술되는 것이다. 순자는 백색의 뷔지프이백오십에도 있다. 그것이 티아라다. 꼭 연비의 압박에서만, 비싼 오토바이를 한번 샀다가, 되팔고, 다시금 내 있는 곳에 적합한 오토바이를 구입하는 약간 슬픈 생활 비극에만 그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어느 부분은 넘치고, 어느 부분은 보다 세련되었다. 왠지 모르게 독자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돈이 넘치는데도, 넘치지는 않아도, 연비를 염려하고 아끼는 것이 과연 무가치한 심리인가? 서울 인사동에서 오토바이 예술가들 모임이 있을 때는 할리를 타고, 영암이나 태백으로는 씨비알천알알을 타고, 거의 대부분을 백색의 우리 아픈 내가 등에 엎고 돌아다니는 뷔지프이백오십으로 다니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겠는가? 삼백이 헐리웃 영화와 이름이 겹치는 것이면, 씨비사백 백색으로 구입해서 비중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의, 개별적인 이성계의 영원토록 아름다운 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얼추 칠천만원까지 가는지 모르겠다. 나머지는 옷을 구입하고, 기름값을 하는 것이다. 나무는 사람 같다.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 중에, 가장 많이는 나무들이다. 그러다 사람이 보이면, 나무는 나무이겠으나, 그들은 다만 티아라의 보석과 같은 빛의 희롱만으로도 답답함과 외로움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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