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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신중한 뿔피리 소리, bmw의 F800gs에 관한 다윗의 소고

by 마음대로다 2012. 7. 7.

신중한 뿔피리 소리, bmw의 F800gs에 관한 다윗의 소고

 

 

 

 

 

 

 

 

나는 사실 베엠베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런 연속성이 없다. 캐쓸은? 연속하는가? 독일의 하이펜치히? 나만 알고 있는? 라인강의 철십자보다? 무엇과 연속한다고, 나는 따분한 우리의 대지 위를 지나는 버스 안에서 명상하는가? 부산에서 돌아가는 길. 해운대에서 두 편의 소설을 응모하고,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해시계는 내가 다시 동쪽으로 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영화는 조명에 의해, 정명훈, 혹은 조명애, 결판지어진다. 그것의 이름이 해남이다. 뜬금없지만. 나는 비감에 사로잡혔고, 사람들이 후회가 없기를 기도했다. 사람이 긴장을 해야만 사물과 건축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긴장도 없고, 생각도 없는 사람은, 부단히 연예인들로 뽐뿌질을 해야만, 그나마 중국에라도 가는 것인가? 그것의 계란. 그것의 독일 작가. 갑자기 계란 깨지는 것처럼 생각나지 않는. 그것의 문장을 나는 동신대 그 그래프에서 생각했다. 얼마나 궁정 같은가? 손에는 체육복의 미세 먼지와, 수채 물감의 얼룩이 있었다. 사람은 알을 깨고 태어나는 것이란 것이다. 그것을 나는 무엇으로서 해석했던 것일까? 내게 부족한 것은 성적과, 돈과, 좋은 집 등이 아니었는가? 다윗의 장막 같은 것이 드리워지는 것일까? 나는 내 마음에 벌써 들어찬, 이미 교과서와, 숱한 드라마와, 다큐와, 훌륭한 선생님들과, 형과 누나들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아무런 기술도 없었고, 기술 과목이 있었고, 아르바이트를 시킨다면 할 자신이 없었다. 헤겔 철학을 보면, 유사 배관 같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로서는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나서야,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직스를 보고서야, 피니티와 인피니티가 배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내게, 철학은, 헤겔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내가 반드시 얻고자 했던 것일까? 나는 늘 해석하였고, 나의 유리가 있었으며, 그와 같은 해석의 한 길로만 갔던 것 같다. 영문학은 탐탁치 않았다. 죄의식과 같았다. 내가 영문학을 공부하면, 여학생이 사다코처럼 창문을 통해 엿볼 것 같았다. 그러나 딱 소리, 딱 들어맞는 소리, 합정과 충북 연기가 늘 거기에 있었다. 진리는 무엇인가? 사다코처럼, 아닌 척 하다가, 사다코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람은 논리로써 사는 것이 아니라, 기대승처럼 사는 것일 수 있다.

 

베엠베는 헤겔이 독일철학자라는 사실을 배반한다. 그것의 개인적인 낙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벤츠까지는 워낙에 차가 멋져서, 잘못은 오직 내게만 있을 것 같았다. 비독일인. 독일어를 일단 엄청나게 못하니까. 또 써 먹는 에비히카이트. 니히트. 마하트. 그리고 돈이 없으면 내가 못사는 것이니까. 매개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인문학자가 그런 차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선점에서 내려가는 트럭만 타도, 세상 모든 재밌는 차는 다 탄 것처럼, 남의 나라 철학자의 구토처럼 상쾌하였다. 내 차는 없는 것일까? 단 한 차례. 말했지 않은가? 검정색 지프는 갖고 싶었다고. 관용적인 구석이 아니라. 단정함의 정체가. 그리고 나중에는 조그만 대대장 지프 차가 있는지, 파쏘를 통해서 검색하는 편이다. 거의 모든 차량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고, 사람이 내가 가는 길을 제외하고 무수하게 쏟아져 들어가고 나아간다는 법칙에 따라, 칭찬도 하고, 축복도 하고,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빛나는 기아 자동차 협찬을 찬양도 했었다. 그러나 자동차 주인공으로도 볼 수 있는 드라마의 시간은 그렇게 짧은 것일까? 키가 작은 남자에게, 선을 보다가 여자가 키가 작다고 하는 것만큼, 원천적인 유원죄가 어디에 있는가? 자동차를 타고 있으면, 그가 누구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나이 드신 분이, 일을 하는지, 아니면 워낙에 오래된 작은 오토바이 한 대 뿐인지, 비오는 날 비옷 등을 다져 입고 지나가는 것을 보면, 그 인간의 과시마저도 미크로그램적인 도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젊은 청년이 화려한 질주를 해도 그러하고, 저녁에 시끄럽게만 하지 않으면, 누군가 밤바리를 다녀왔다 하면 그 축복된 저녁에 짧은 영화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차는 차단된다. 그것은 국민과 같고, 훌륭하며, 제도적이다. 그러나 샤프하지 않으면, 제도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섹스리스의 피곤함이 말장난 등으로 교환되는 세계에 지하수 흘러가게 되어 있다. 여자의 고급 직조물은 오직 섹스를 위해 있다. 국가가 이성인 것처럼, 냄새도 이성이다. 남자에게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여자에게서는 상큼한 굴냄새가 난다. 남자에게서 냄새가 나지 않으면, 여자의 냄새는 금세 거대한 저울의 악몽처럼 위치가 뒤바뀐다. 베엠베라는 이름은 철학적 무능력 같았다. 동반자살과 같은 아찔함도 있다. 지금 보니 그러하고, 지금까지 약한 이름의 고급 물건 정도의 조합으로 보았다. 로고는 벤츠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보기 싫으면 로고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오토바이들과 지금의 베엠베 오토바이에 대한 인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베엠베는 나아간 것일까? 뭔가에 쫓긴 것일까? 가장 오래 전에 오토바이를 만들었다 하는데, 그것의 대표성, 중국의 전인대는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야마하도 혼다도 투어러를 만들면, 알천이백지에스는 금방 우스꽝스러워진다. 연합군이랍시고, 얼마나 다른 오토바이들이 베엠베를 지지하는지 모른다. 알천이백지에스 때문에, 가와사키는 반쯤 미쳐 있다. 야마하는 약간 그런 기질이 있지만, 혼다는 메인과 그것의 터넌스를 한국에 수입하지도 못한다. 나는 어째서 연결하고, 구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새 모델들은 그것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베엠베는 급격하게 선에 집착하였고, 뾰족함, 짝눈, 알천이백지에스는 볼륨에도 집착하였다. 언급은 효과를 생성시키는데, 안목 있는 사람들은 베엠베의 박스만큼은 기가 막히다고 투떰즈업을 했었다. 슈퍼테네레가 어째서 불만족스러운 박스를 갖게 되었느냐. 그것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좋다고 뛰어다녔다. 물론 그들은 세계 똥과 같은 지위로서의 한국 사람들이었다. 내가 소년처럼 자기들 모임을 지켜봐주기를 바라는 모임을 갖고 있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돼지 돈자 돈들이었던 것이다. 독일이라면. 그냥 철학? 음악? 나는 그들의 아버지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용서하였다. 용기라고는 위리안치나 금치산자 정도나 되는 주제에, 갈등을 조성하고, 지들끼리의 베리어를 구축하는데는 개구리 알 같은 눈들을 끌어모은다. 무엇 때문인가? 사람이 다만 이유를 갖고 멋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박스가 세 개면, 여름 날, 수박을 세 통을 갖고 다니겠다 싶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이 근본적으로 철학적이지 않고, 예술적이지도 않다는 증거이다. 그래놓고 다니는 것이 피와 같은 우리 단풍들이다. 일본이라도 가지? 아니면 중국? 만일 알천이백지에스를 타고, 중국이나 일본이라도 갔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와 같은 마음이라는 중국집이나 중국은 가능하다. 그래도 허술하고, 허생원 같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음악은 바뀌고, 하나님의 변호하는 바람이 불어온다. 박스의 사각형. 그것은 다르지 않은가? 하나님은, 사각형은 너의 민족의 언제나 지금의 산물이다 하시는 것 같다. 자랑은 언제나 죽음과 섹스일 뿐이다. 최루탄은 그나마 학생과 거리 점령이지만. 나도 자랑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가? 황현정을 사랑할 때는 그나마 의무를 생각했지만, 박지윤을 사랑할 때는 도시인의 이기적인 죽음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박스가 없는, 무박스의 에프팔백지에스가, 글래디에이터의 오에스티, 그리고 최신의 한국영화 연가시를 배경으로해서 나타난다. 그것은 매우 신중한 것이어야 한다. 시트고는 중요치 않다. 오토바이의 미칠 듯한 허리춤이 대체 학자에게 무엇이란, 뿔피리 소리인가? 학생다운 배색도 있어서, 최종적으로는 누군가의 명명을 그대로 따오면 트리플 블랙을 보다 북돋운다.

 

 

 

 

 

 

안타는 오토바이로도 불릴 수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