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림을 건져주면서. 하지 못하는 것들의 문학 천국에 관하여
우리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기억하는 것은 여러가지이다. 그의 문장이 행여 컴퓨터가 만든 것일지라도, 그런 것은 불필요한 의타기가 사실 문명 총국 지배 아래에서의 문장력이겠지만, 보다 그를 우리에게 들뜨게하는 것은 마라톤과 외국 음악들에 대한 깊은 조예가 될 것이다. 그것은 뜻밖의 선남자로 우리에게 각인된다.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본 적이 있는, 바람의 내면성.......
오사카 마라톤 대회에서, 후쿠오카인지, 우리는 일본 선수와 한국 선수가 나란히 뛰다가, 외국 선수와 흑인 선수?가 선두권 각축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의 지리는 일본인이 아무쪼록 많이 알겠다 싶고, 한국어가 일본어와 비슷하다는 이니셔티브를 백분 활용하면, 성공할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면, 동경 마라톤 대회라고 한다면 덜하겠지만, 후쿠오카나 다른 지방 도시인 경우에는 지방색이 작동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그와 같은 아사 공기가 좋은가? 늦었다면서, 도시락이 든 가방을 가슴에 품고, 일킬로 이킬로 되는 거리를 한달음질에 달렸던, 나중에는 버스를 타고, 버스에서 내려서 달렸던, 나중에는 자전거가 있어서, 자전거 탄 풍경, 그것은 반드시 카페와 소녀, 소녀에게는 소년에 대한 의지인데, 그것을 내리밟는 것인가? 사랑의 아모르. 그렇게 세포질로 되어 있는 공간에 있으니, 일본인 센슈가 세포 반응을 일으켜서, 이런 것이 그렇게까지 정의롭지 않다 여길 수 없는 것은, 세포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ㅅ. 프. 언젠가 우리들 프로그램에, 시골집에서 여럿이서 게임하다가 자기 하는 것이 있었는데, 저녁 지어 먹는 것도 대단한 일로 해서, 늘 새로운 음식을 해먹는데, 맛이 못미치면 윤종신과 다른 사람들이 스프를 집어넣었지 않은가? 그것은 셀파. 스프. 수풀림. 퍼 스프...... 파도의 넘실거리는 데지그네이션이, 일렁이는 슬픔이 아니라고 어느 청마가 주장하겠는가? 김영랑과 단오덕이라면, 바다에 슬픔된 우리들의 잠재태적인 기억일 수 있는 것이다.........
세포에는 지시성이 있다. 논리가 피크이듯이, 가게는 숱한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고, 사람들에게 가격이 지시되어 있다.
하루키의 글은 그냥 읽히는 느낌이 있다. 초창기의 서툰 배치가 도리어 마음에 드는 것이, 나중으로 갈수록, 스스로 관제적인 세련됨에 깊이 중독된 듯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정을 때기 위해서일까? 차라리 플라톤의 대화록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고 하게끔 하기 위해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드는 것일까? 바다에 뛰어들면, 책을 읽을 수 없다. 기가 막힌 것은, 우리가 책이 물에 젖으면, 물에 불었다고 하기도 하고, 운다라고 하기도 한다. 누가 썼는지, 유스호스텔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표준어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중경삼림에서도 나온다. 대신에, 물에 젖은 것들이, 비누가 줄면, 살이 빠졌다고 하고, 수건을 말리면 수건이 운다라고 한다. 그것의 퍼시픽 림이 종이가 운다라는 한국어를 '예거'한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예거에 올라타면, 무라카미,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표현 그대로, 두 사람의 총체적인 기억력의 힘으로 나아가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누군가와 싸워서 이겼다는 만족감도 없다. 그것은 정의(저스티스)가 사전적 정의를 구하게 하고, 사전적 정의가 정의의 실천적 스페이스를 추동하는 무한반복 공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시카니......
하루키가 카프카 해변 어쩌고 하는 소설에서, 전철을 타고, 누군가 잘 만들어놓은 도서관에 가는 대목은 단순하고, 담백하며, 형식 히스테리컬한 표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학자나 소설가들은 그와 같은 베이직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윈도우 엑스피. 혹은 세븐. 그러나 베이직은 우리가 단순한 미스티시즘이 아니라는 근거가 아닌가? 나는 나의 베이직과 정확하게 들어맞아서, 기분이 좋다가도 그랬다. 단지 동네 오빠의 전기를 모두 기억하는 소녀의 세계관을 동원하자면, 양 사나이를 찾는 모험에서는 아니 그랬기 때문이다. 몇 층인 지를 모르는 곳에 그의 연구소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가고 싶었다. 단지 지시성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죽는 것이 아나라, 슬픈 야훼, 장막을 치고 연장하는 것. 슬프고, 외롭고, 두려워도, 시편 일편과 이편처럼, 세상은 아름답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기는 무한하게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헝가리언스. 처음의 하루키 연구소는 지금 양머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찜질방의 접은 날개일 수 있고, 남의 도서관은 매우 사회적이고 공유적이긴 하나 자기의 하나씩의 '예거'가 아닌 것이다. 책을 한 권 읽으면, 하나의 예거인 것이다. 그것의 거리는 누구도 만들어줄 수가 없다. 두 권에서 심은하와 양정아의 플라타너스를 본다면, 두번째의 예거이다. 그러다가 눈이 오면, 그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스페이스. 감각. 감성을 캐롤적으로 짓누르는......
일본은 지금 그 둘을 손으로 쥐고 있으면서, 삼손처럼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일본 천주교는 그래서 그것의 기원이 즉자대자의 세포적 구성비에서 보면, 매우 즉자적인 데가 있다. 외국 사람도 일본에만 오면, 그 재미 없는 애니들을 한정 없이 보고 있는.....
어묵도 맛있고, 오뎅도 동그랗고, 도형의 지시성이 그대로 폭로되어 있지만, 국물만은 분명히 진하고 맛있는.......
ㅇㄱ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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