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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스파이'(2013)와 인지물리학적인 쌀의 눈

by 마음대로다 2013. 9. 10.

'스파이'(2013)와 인지물리학적인 쌀의 눈

 

 

 

 

 

 

 

 

 

세상 어디에 폭력적으로 클래식만 듣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것의 합종연횡. 클래식을 연구하고, 신품들을 작곡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관념은 개별자의 시험에 도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장에서 나온 아이폰을 좋아하고 즐겨 애용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옛날은 학생 운동이 전경과 싸우다가 거리에서 죽을 것 같았고, 살아돌아와 술도 마시고, 다만 생존의 높이가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반응으로서의 우리나라에 클래식 작곡가가 나올 것이다는 믿음이 있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을 줄인 것이 클.래.식. 팥. 클. 콩. 클. 그런 방정식. 우리가 환하고 높은 마음의 연장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더이상의 외국 사람이라던지, 유학이라던지, 그런 식의 채무감이 사라지는 국가 민족 음악의 진리 단계에 반드시 진입할 것이다는 것이 바로 학생 민주화 운동의 요체였었다. 그것의 전제는 무엇인가? 클래식이 사병들끼리 어떠한 모포 털기인지를 설명할 수 없지만, 직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산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수상음악처럼, 배를 띠워놓고 연주를 하게 하고, 그것을 음악 학도들에게 자주 보여준다면, 콩. 클. 팥. 클. 작곡가가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늘 바깥 바람에 입술이 얇아지고, 종아리가 늘 차갑게 보이면, 사람의 생각이 송과선 위에서, 풍경이 울리는 것처럼, 선운사, 정말 그럴 것 같은 느낌은 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상태. 그러나 주리론과 주기론의 대논쟁의 끝에, 그것의 통합으로서의 학교 생활이라는 삽십년까지를 단일체로 묶는 라퓨타의 공중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성경까지도 학교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폭력적인 언사가 아니다. 그것은 증거도 없고, 그래서 얻는 전리품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학교는 왜소하고, 늘 어제 같으며, 한가위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 근처에 오면 늘 이런 소리를 듣는다. 공부를 해라. 공부. 그러면 입맛도 살아나고, 라면도 왠지 모르게 맛이 변화산처럼 변할 것이다. 공부는 빈자의 기도. 왕후의 반찬 같기 때문에, 그렇게 지내다 보면, 다이어트에 성공한 뒤에 적당량의 음식을 섭취하는 기쁨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는 보다 타이트했고, 가열찼다. 어제 친구를 만나고 수원으로 내려오는데, 과거 학생운동의 사람들이 예방을 했다. 나는 중얼중얼 변호사 아니 예언자 같은 말을 했고,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그것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양희은처럼 생긴 사람에게, 어째서 전화를 하는데 받지 않느냐고 잠꼬대를 했었다. 우리들의 과거는 오직, 클래식의 작곡, 연장이 가능한지에 대한 죽음 같은 탐구였었다. 다만 물 위에서 연주하고, 공부하는 학생의 종아리가 차가운 것이 아니라, 각반, 학생들이 을지로에서 페퍼고고를 세금 소비하고, 여자들의 절규하는 소리와 남자들의 보호하는 외침. 그리고 흩어지면 시위는 끝나는 걸로. 우리가 공부를 못하는 사람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처럼, 잡히는 사람은 너무 인지물리학이 없는 것으로. 돌아오면 술을 사주는 것으로. 그것은 정말이지 존재와 행동의 최대치였었다. 존재 다음은 무엇이겠는가? 존재 다음은 존재이다. 존재 다음은 존재인데, 그 다음은 무엇이겠는가? 그 다음도 존재이다. 존재 다음은 존재 다음도 존재 그 다음도 존재이다. 처음 존재는 우리가 철학에서 숭상하는 존재이나, 두번째 존재는 다만 외롭지 않은 것이고, 나머지에서부터는 급격하게 그것의 빛깔이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안다. 어째서 아는 것일까? 그것은 학교 경험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논문의 존재는 알지만, 논문의 어머니 논어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어째서일까? 신입생일 때는 마음이 정말이지 논문의 어머니 논어를 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논문을 읽을 때, 머리 위에서부터 사서삼경이 쏟아진다. 실제의 사서삼경이 아니라, 아티큘레이션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만 말하면 왠지 모르게 서운할 것 같은. 성경 문구에, 슬픔이 가득차거나,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건 이방인이건 간에 사람들이 베옷?에 허리띠를 두르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썼다는 것은, 논문을 많이 썼지만, 일하는 사람의 즉각 상태와, 성경과 논어에 늘 못미친다는 형이상학이 지방관들의 걸침들이 아니었겠는가? 최대한 형식적인 언급만 해서, 불가피성의 옷을 입고 있지만, 나와 이야기하다보면 문외한이 되거나 무뢰한이 되고 만다. 클래식은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때까지 형식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혼. 아량이 넓은 남의 대학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펴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누군가와, 아쿠타카와, 이야기했는데, 인도네시아의 가난한 철도의 의미는 단 하나이다. 위험. 그러나 시인은 그런 단 하나의 가난을 극복하고, 축복하는 것까지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기차 같은 것이나 위에 올라서고, 기차 위에나 올라서고 싶은 것이 아니겠는가? 학교에는 건물들이 많고, 외지인들도 심심해서 돌아다볼 수 있겠으나, 혼이 있는 사람이면 도서관에 들어가 책점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본어로 혼이 아니겠는가........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슬픔이 있었다. 나는 그런 값싼 혹은 투싼 표현주의적 러브 멜로를 근자에 본 적이 없다. 마치 누군가에게 젓을 먹이는 것 같은 슬픔이었고, 공중으로부터의 비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