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근찬 '수난이대'와 유리왕적 백제의 현대적 거슬품.....
우리는 인문학도로서, 어디든지 가는 것을 매우 좋아라한다. 그대가 만일 신촌 아무런 대학의 국문학과생이라고 하자. 무한도전이 부럽겠는가? 누군가 공부하는 학생이면서, 기름을 나돌아다니는데 소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케이쓰리 포르테쿱. 사람들은 그 차를 볼 때마다, 쿱 한다. 달리다가 멈추면, 옆에 뒤에 타는 사람이 달리다 쿱 의성어 의태어를 맞춘다. 우리는 하근찬의 명단편을 두고 가타부타, 가타부타 쿱 말을 할 수가 없다. 사와디캅. 사장님 나빠요 누군가 아무런 맥락 없이 말하면, 대체 어떤 이데올로기에 빙의된 것인지 추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재미이다. 엔터테인먼트. 하도 사람들이 반복하여 쓰기 때문에, 영단어는 몰라도 한국어로는 불러주지 않아도 받아쓸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고 하근찬의 단편이 그렇게 재밌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데이스타의 엔진과 비슷하다. 이것은 독재이다. 내가 탔다고. 그리고 나의 신민. 어느 바람 부는 날의, 기분 좋은, 허름한 농기구의 창고를 데이스타의 차고로까지 사용하는 농촌불분명의 인간이 있을 것인데, 그에게는 복이 있다. 아주 빨간 사과 같은. 하근찬은 인문학적인 도를 갖고 있고, 쿠페 종류를 알지 못한다. 그는 시골 목사였을 수 있다. 현대인이고, 나나 되니까, 그것이 쿠페 종류이며, 우리끼리는 쿱이라고 사와디캅 언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뜨거움. 가난함. 양수경 칠집. 말이란 본시 바람에 날리는 예수님의 가라지 같은, 가라지 비유 같은......
지금처럼 유리에 둘러 싸여 있어서 유리왕이 유리에 둘러 싸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아무튼 삼국사기의 작가는 대단한 소비성향을 지니고 있다. 고구려의 태조가 유리왕인 것이다. 동명성왕이나, 태성왕 정도로 작명하다가, 중간에 유리왕이 등장한다면, 백제본기에서의 아신왕처럼, 그러면 그와 같은 소나타 형식은 우리에게 가납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거북살스럽게, 처음의 이름이 유리왕이고, 그런 유리왕은 자기 아들에게 평과 저주가 뒤섞인 말을 내뱉고, 그런 아들을 달리는 말위에서 떨어져 자결하게끔 한다. 우리는 자발적 지식인으로서, 알튀세, 그런 유리왕이 가능한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소설가가 단어가 규질규질해지면, 필연적으로 인간 운명의 유리왕적인 템포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작가가 유리왕인지, 아니면 인물이 그런 소담스럽고 팔이 하나 부족한 이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사병이 되는지, 아들이 되는지 모르는 것이다. 소설은 사병이 아들이 되는 기적과 같은 함수를 보여준다. 문제와 잘못은 하근찬의 수난이대는 유리질로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선덕을 높이 사고, 후악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선덕으로 살지, 선덕여왕, 후악으로 자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하근찬의 수난이대는
아니다.
서울은 후악들로 넘쳐난다. 관악산도 원래 후악산이었다. 선덕은 그래도 높이 서 있는 상업건물들과, 교회, 조계사, 궁궐들 사이로 루아흐 히브리어로 생기처럼, 어쩌면 한국만화가의 거칠은 검은색 면분할로써만 다가오는 것일 수 있다. 눈 씻고 보고자 하면 보이지만,
하근찬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울 전체가 선덕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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