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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유학적 집안 분위기와 신권 정치: 관상이라는 중인 출신의 영화를 염두에 두면서

by 마음대로다 2013. 9. 14.

유학적 집안 분위기와 신권 정치: 관상이라는 중인 출신의 영화를 염두에 두면서

 

 

 

 

 

 

 

 

얼마나 우리는 실제에 걸쳐 비좁은지 모른다. 우리는 단어나 글자를 하나 쓸 때도, 백 대를 쳐 맞은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벗어나는 것은 도그마틱스 짤라버린다. 그렇다. 나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언급하고 있다. 영화는 약간 슈베르트의 비지엠을 갖고 있다. 그것은 여자가 일거수할 것 같지만, 끝까지 그다지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김혜수와 같다. 앙드레 김이 약간 꾸며도 남자 같았다면, 그보다 젊고, 그보다 여자 같은 남자가 그것의 분위기와 오메가 시계까지 차고 있다. 이런 것은 일종의 데카당스이다. 성경이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계약 관계를 두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라면, 데카당스는 북두신권에서 라오우나 켄신은 등장하지 않고, 북두신권이 등장하지 않는 세트 그 자체나 사람들의 행동 반경 같은 것이다. 어떤 사조나 예술가 작품들이 데카당스였다고 말하기도 그러하다. 대게의 데카당스는 전통과 규격에 비추어, 빛나는 근대 정신사조까지 끌어들이면, 이념에 반하여, 관계적이고 현상적인 자유를 부르짖으며, 형식 뿐 아니라 인간의 모습까지도 비도덕적이고 예술로서의 자율성을 확보하려 한다. 인구는 젊은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있고, 경제적으로 부르조아와 닿아 있으며 활달하다. 그것의 정치적 안티테제가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라면, 데카당스는 그것의 중간 형태라고 하면 정확하다. 성경에도 있어서, 솔로몬의 후계자로서의 르호보암이 행한 정치 형태가 그것이다. 솔로몬이 예술적인 데카당스를 하다보니까, 액기스, 기가 막힌 도식성이자 정확도로서, 르호보암은 정치 폭력을 과시하고, 주변을 보다 젊은 사람들로 채워나간다. 우리는 헤밍웨이를 데카당스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핏제럴드를 더더욱 데카당스하다고 하지 않는다. 피카소를 데카당스하다고 하지 않으며, 슬라보지첵을 데카당스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주사위 조합은 마치 기적처럼 단일한 현상을 내비친다.

 

서울대 영문학과가 솔로몬 같은 백낙청의 데카당스를 제외하면, 급격하게 르호보암이라도 하고자 하는 가능성으로서의 데카당스의 집합체로 직관이 되는 것이 그것이다. 산출된 영문학자가 제법 많고, 활약이나, 경천사지 십층석탑 같은 논문의 정신탑에서의 독자의 수준을 높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상 포인트라던지, 예술 감상의 것들은 그것을 르네 데카르트를 읽지 않으며, 생각보다 읽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대림의 데이스타를 멸시하는 말투를 생산하는 음지에서의 댓글 달기 등에서 제법 확고부동하게 발견하게 된다. 대개의 대상지가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것에서 벗어나, 사회적 이슈라던지, 영화와 같은 누구도 친구할 수 없고, 어디에서 제작이 되는지 책임 있게 나서는 사람이 없는 현상만을 논하는 것에서는 그 참 데카당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드라마의 미덕은 사람들의 갠지즈 강의 모래보다 많은 데카당스하고 프랭키하며 깊이 특수에 천착해 있는 말들을 일단 한번 튀겨주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것에는 논문이 없고, 통계나 인기 작가의 것은 있어도, 드라마가 사람이 맞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채널을 돌릴 때 얼마나 많은 채널에서 사람들이 맞고 있는지, 경찰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지 않을 수 없는 양적인 무관심성의 그래놓고 인기가 있으면 시청율이 높으면 좋아하는 기현상. 기황후. 드라마가 사람들의 미세한 프랭키들을 한번 튀겨주는 것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안전망을 확인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심지어는 학자들까지도, 틈만 나면 데카당스하려고 한다. 뭔지 모르게 규모가 있어 보이고, 읽진 않았지만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자매결연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유학적 집안 분위기가 과연 그것을 과학적이고, 매초마다 춤을 추는 엘이디 모니터의 그래프로써 확인하는 곳이 있을 것인가? 사람이 주관에도 깊이 틀어지는 맛에 천착하는 한국이나 그것의 선진국 일본, 그리고 허영만의 최근의 유행이 그것의 산맛, 신맛이 아니라, 그것을 잘 보여주었었다. 데카당스의 매력은, 이전 세대의 이념적이고 관념적인 허위를 죽음과 소녀의 강렬한 슈베르티안 데카당스로서 공격하는 것에 있다 할 것이다. 허영만의 만화에도 관상이 있었다. 그러니 사조로써 정리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전통이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도장의 김종서 장군이었는데, 무엇에 불만이 생겨서 맛에 심취하고, 관상에 관심 갖게 된 것일까? 마치 그렇게 너무 빨리 바꾸는 것이, 바뀌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데카당스, 이런 식의 작가도 있는 법이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기 위함이었을까?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송강호가 든든하게 나래이션하는 것에서 왠지 모를 보장자산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