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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조선오백년 유학과 한 영화의 마당은 무엇으로 에필로그되겠는가?

by 마음대로다 2013. 9. 13.

조선오백년 유학과 한 영화의 마당은 무엇으로 에필로그되겠는가?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어느 날은 뜻밖의 말을 하셨다. 외할아버지가 유학을 하셨고,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사진 속 인물, 고흥쪽 친적 중에 법률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관촉이 늘 문단에 친척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이도저도 안되니까 독재적인 상상이 뻗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땅을 파고, 풀이 뿌리를 드러내고, 남자는 천자문을 조금 아나, 여자는 약간 무기가 있고, 땅에 그와 같은 사실을 묻고, 비가 내리고, 아다지오 모음곡을 들으면서 수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서울역에 잠기는 것처럼, 콘트라베이스, 콘트라스트라고 하면 정확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어서, 개미가 비를 피하는 모습이 너무나 렌즈처럼 상상도 되고 들어도 드러도 나서, 사람이 흙에서 왔다면서 자기도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번호 만천삼백이십이번이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촉촉하고, 윤기나고, 왠지 모르게 백두대간 같고, 생생하지 않는가? 생생정보통? 그와 같은 비가 와서 습기가 퍼지는 것이지, 아지랑이라고 하지 않지만, 그것까지 아지랑이라고 말하면서 얻을 수 있는 정신착란 속에서, 소설속 가족의 전기가, 할아버지가 남쪽 고흥 지방에서 유학을 하셨고, 가까운 친척 중에 법률가가 있다는 이력은, 이력 중에 이력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능력이 없으면 이력으로 먹지 않는가? 그 책의 형식적 屬함으로서의 책장력.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법은 정말이지, 예수님의 신유의 능력과 비슷하다. 달리다굼. 베데스다. 문둥병 환자.......

 

책은 사람들을 속하게 한다. 그것의 이전을 우리는 어떠한 노력에서도 상상할 수가 없다.

 

남의 집도 좋고, 내 집도 좋고, 그런데, 고란노스폰소노, 남의 집을 축복할 겸 자리를 보는데 여의치 않았고, 내 집에서 집자랑이나 하라는 섭리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럴 일이 있었다. 우리는 보도블록, 우리가 걷는 것만큼의 시야를 갖지 않는가?

 

 

어떻게 영화는 조선오백년 유학의 역사를 만난 것일까? 사람들은 그것의 천박한 데지그네이션이 최신 한국 영화 '관상'을 가리킨 것인 줄을 다 알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지켜낼 수가 없다. 황석영도 유학자고, 박경리도 유학자며, 이문열도 유학자이다. 시묘살이라는 것은 비오는 텅빈 유령 도시 서울을, 사람들과 따로 또 같이 다니면서 무너지지 않는 한 줄기 빛 내려온다 같은 시를 쓸 수 있느냐로 묘사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시묘살이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박경리가 가슴이 아팠다. 하늘나라에서는 여자남자가 없다지만, 그래도 주민증의 성별에서 박경리는 여자로 구분되어 있고, 황석영과 이문열은 남자로 되어 있다. 최종최후의 야탑고등학교는, 미륵사지의 그 신생탑은 무엇이겠는가? 세 명이 다 내 동생들이라고 한다면, 박경리가 그 있음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장은 사람과 같고, 사람이 칠백 개의 문장을 쓴다는 것은, 칠백명의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서희는 일종의 동음동의어적으로 나의 신휘와 영혼결혼식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얼굴을 확인할 길이 없는, 텅빈 이름으로서의 백골제 비슷한 것이다. 조선은 양대 산맥, 거장, 마에스트로, 이황과 이이를 낳았지만, 조선일보가 마키아벨리즘을 좋아하는 것이, 이황과 이이를 음으로 양으로 지키고 보듬고 사람들에게 관심끌게 만드는 일들의 최종 사진 작가가 그만 마키아벨리즘이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다면 단테는 있는가? 단테는? 단테가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즘이 있다면, 단테즘이 있어서, 사람들의 유대인적인 지평과 속성이 지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박경리의 유학적 텃밭을 파고든다. 사람들은 한번도 그와 같은 포멧의 논문을 본 적이 없다. 황석영이나 이문열을 조선오백년 유학의 전통에서 규명하려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 서로가 서로에게 쌍끌이 추와 같아서, 심해로 서로를 끄집고 내려가기 때문이다. 것들이 외국에서 심포지움 되면, 처음으로 물 밖에 나와 숨을 쉬는 것 같지, 적어도 이순신의 난중일기처럼 벽돌이 살아 숨쉬는 것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얼마나 후대의 유학자들이 인해전술로서 형이상학이 아니면 철학이라도 하자고 달라붙었는가? 지방행정관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떠한가? 시황제의 고전이 사람들을 중국황제처럼 만드니, 학자들은 아전인수의 알 수 없는 회전반경을 그리지 않는가? 심청이도, 청년 심청이도, 용왕과 결혼하는 옵티컬 일루젼이다. 흥부와 놀부는 논리학을 우리에게 선사하지 않는다. 제비는 물건을 갖다주고, 논리를 앗아간다. 남원에를 가보라. 어딘지 모르게 춘향의 원귀가 대학에를 못가서, 싸돌아다닐 것 같다. 근대를 만나, 현대에 소설을 쓰자고 보니, 처음으로 서희가 땅을 산 것 같았고, 유학적 문예부흥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기세였었다.

 

 

나는 김약국의 딸들을 사람들 함께 보는 티비로 보았다. 시묘살이는 때로는 명랑대첩 같은 것이다. 뒤늦게 따라가면, 남들이 다 명랑을 갖고 간 뒤에, 원웨이티켓, 텅빈 유령 같은 도시 서울에서 혼자 명랑한 것일 수 있다. 진리는 슬플 땐스 슬프고, 기쁨이 은근할 때는 은근하고, 표정과 내면의 사과가 가장 일직선일 때 드러난다. 진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클래식을 잃어가는 것일 수 있다.

 

 

 

 

 

오늘 서울시청을 사진 찍으러 갔다. 사회복지학과 모임이 있었고, 나는 포비와 코난 라라가 매일매시 닥치는 종말로 인해 사람들이 없는 캔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것을 보았다. 마치 참여정치처럼, 나도 한 캔을 하늘공원 자판기에서 마셔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