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축 한강 노벨상 수상: 일본은 어째서 헤겔의 스즈키인가?에 관한 소고
이것은 첫 단추이며, 마지막 단추이다. 단추 하나이지만, 영원히, 한강의 노벨상 수상, 채울 수가 없다. 한강 이전에는 채운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내 능력이 미약해서,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세월호처럼 죽는다. 세월호는 우리들의 국문학사, 교육대학교 역사, 학생처장사, 그런 것들을 갖고 있다. 누구도 헤겔을 공부하지 않는다. 어떤 일본 수상도, 일본 수상에 맞춰, 내게 방문하려는 의지가 없다. 한국 대통령도 그러한데, 어떤 일본 수상이, 한강 노벨상 수상을 했다고, 하이든의 수상음악, 나를 찾겠는가? 내가 있기 전에는, 그들 모두, 멋진 인피니티들을 가졌었다. 우리가 피니티이니, 당연히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무조건 인피니티인 것이다. 그것이 다른 누구의 말도 아니고, 한승원의 말도 아니고, 한수산의 말도 아니고, 이창동의 말도 아니고, 그 아무 것도 아닌 보이그룹, 걸그룹 같은 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인 것이다. 그러니 화이트 헤드의 말을 번안하자면, 인간의 철학사, 어학사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각주에 불과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각주인 것인데, 그것의 각주인 셈이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성경의 각주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너무 큰 문제이고, 그것의 문제를, 서양은 대충 아라비아에 떠넘기면서,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장고한 철학의 심연을 가지고 있는데, 어떠한 철학, 어떠한 문학, 노벨상, 어떠한 한강, 어떠한 음악이 나와도, 사실은 다들, 그들에게 먹히고, 그들의 먹잇감이고, 사람 이름이나 집단, 이름들을 한국이라고 짓고, 그들을 무찌르는 일들이 그들의 전통인 것이다. 가다머. 이름도 이상하고, 무서운, 게오르규.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지치고, 갈 수가 없고, 먼발치에서, 그냥 전지현처럼, 자기가 여자라고 울면서 외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헤겔을 전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헤겔을 전공하고, 그것을 이어가며, 그것으로부터 훌륭함을 창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슬프게도, 아이 때부터 알아볼 수가 있다.
아이 때도 묵향이 있다. 서예를 오래 해야만 그런 것이 있는 줄 알지만, 아이 때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나무의 깊은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인이 되지 않고, 군자가 된다. 옆에서 공자와 맹자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한참 그렇지 않고 있는데, 그들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적이기 때문에, 마치, 그 말을 듣는 것처럼, 혹은 듣지 않는 것처럼 된다.
헤겔은 욕쟁이 할머니 같은, 슈투트가르트, 빙헬, 망헬, 추잠멘하이트, 그런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의 호위 끝에, 마침내, 인류가 원하는 철학을 달성하였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처럼, 헤겔이 그런 욕쟁이 할머니의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노사연. 느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우리가 헤겔을 다만 외국어로 이해할 때, 아베체대도 없이, 체육대학교, 그렇다면 바흐가 집권을 한다. 그것은 마치, 일제의 집권, 혹은 명말청초, 아니면 홍콩 영화의 전성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광수가 무정만 써도, 헤겔과 비슷한 첫단추를, 다만 만지기만 해도, 바흐는 그에게 다가가 권력을 넘겨준다. 권력을 넘겨주지 않는 것들은, 목이 없는 부처님들이 된다. 그들은 살아서 돌아다닌다. 그것은 그들이 과도한 권력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친구일 수도 있어서, 때로는 세인트 사이야의 슬픈 브금처럼, 무조건적으로 슬픈 것일 수 있다. 나의 글은 얼굴이 갸름하고, 키가 제법 있고, 목소리가 여자 치고는 두꺼우나, 남자들에 비해서는 여자처럼 가늘고 예쁜 여자처럼 생긴 구석이 있다. 헤겔도, 예쁜 여자가 있듯이. 그래서 그들이 노량진에서 왕뚜껑을 먹다가, 그렇게 비싼 야구 모자챙에 김치국물이 뭍게 되면, 그들이 그립고, 그와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해 영원히 고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요한 세바스찬 바하이다. 바하는 여자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상대성 이론에 따라, 아인슈타인, 여자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고정되는 것도, 어쩌면 대단한 것이다. 바흐는 목이 잘린 사람처럼, 아름다운 향기와, 좋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니고, 거기에, 마치 여성 인권처럼, 조금은 아름다운 숙명 여자 대학교 학생들이 돌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한강은 어디인가? 한강은 건국대학교인가? 동국대학교인가? 아니면 경희대학교인가? 맞지 않고, 틀리고, 허영에 시달리는 옷보다는, 딱 맞고, 옷감이 좋고, 마음에 들지 않는 수천 벌 보다는, 마음에 꼭 드는 열 벌의 옷이 좋듯이, 이순신 장군처럼, 신에게는 열 벌의 마음에 꼭 드는 옷이 있사옵니다, 그렇게 명랑소녀 성공기가 우리에게는 있는 것처럼, 동덕여대 같은 느낌이 있다. 학생인데, 대학원까지 진학하고, 대학원에서 바로, 교수들의 인정을 받아, 전임강사가 되는, 명문대 출신의 공격을 물리친, 그런 전설이 있다고 하면, 어쩌면 한강이 그런 사람이 될 것도 같은 것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윤동주의 개짓는 소리도, 정다운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재밌거나 유별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화성 같은 데에서, 매일 같이 좀비들이 나오고, 그런 데에서 개가 힘있게 짓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 거기서 개신교의 탄생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말들이, 글들이, 마치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만 인간으로 지내기 위한 투쟁처럼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래서, 그 투쟁의 채널이, 보통의 대단한 국제적인 높이를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처음 보고 없다고, 단번에 개좀비들처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패전 이후의 풍경 사진들 같다. 아무것도 없고, 조원선, 아무도 없고, 조원선, 진정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였다가, 공부 잘하는 아이들 때문에, 요한 세바스찬 바하까지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일본이 라흐마니노프를 배출할 때에, 우리는 겨우 이광수의 무정만을 배출하지 않았는가?
헤겔이 다만 외국어 같고, 바하의 음악만 같을 때는, 그런 이차대전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브금 Saint-Preux - La Fête Triste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