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슬퍼할 수 있을까?
과연 진리는 노출되어 있을까? 우리는 카메라를 노출하면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그렇게 일단 시적 허용, 그렇게 써본다면,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꽉 차 있고, 아직 덜 차 있고, 그래도 지성이 있다면, 옛날보다 꽉 차 있고, 우리는 그래도 그것이 무엇이 되어, 꽉 차 있는 우리들의 지성이 무엇이 되어 나타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신세계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전광판이, 어느 골목길에서 나가면서 찍은 것으로, 그렇게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 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도 백화점에 놀러 가, 아이 쇼핑하고, 아이 쇼핑한 다음에는, 친구 만나고, 친구 중에 한 명은 음대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소식을 전달받지는 않는다. 소양강 댐의 관제소와 한강 어떤 사무소가, 그 어려운 시기에, 서로 그렇게 소식을 주고받았다는 것처럼, 나는 몸에서 냄새만 나지 않을 뿐, 그렇게 잘 생기지도 않고, 아주 찢어져서 넘어질 만큼 가난하지만 않았을 뿐인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소문이 나고, 우리를 진정한 자아, 진정한 예술, 진정한 학문과 사회로 이끈다. 창작과 비평이고, 문학과 지성이다. 폐간되었대도, 사상계이다. 신학지남. 미립자는 다만 어두운 세포일 뿐, 광학적 현상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인간적인 간섭에 의해서, 모든 미립자는 스파크, 대우 지엠, 그것을 연상케 한다.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내가 음악을 듣다가, 그와 같은 가슴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그와 같은 가슴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는다는 미신의 사람들에게는 어필했을 수 있다. 내가 생각이 많아서, 좋은 생각, 에세이집, 예술적인, 창작적인 생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날 때, 그것이 조금 전이가 되어서, 진정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하며, 동시에 어긋나는 것이다, 누군가 그것을 철저히, 가혹히 교육을 시켜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러브레터나, 그런 무사시노, 아무튼 이와이 슌지 영화를 보면, 그런 바로 나의 냄새가 많이 보이는데, 공감각, 내가 누구를 상대로 사귀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면 했지, 누군가 접근했을 때 차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모든 경제적인 사정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고, 어쩌면 혼다보다 듀카티 가문이 더 가난했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일 수도 있고, 그렇다 보면, 우리는 생각이 많아지고, 투수와 타자가 싸울 것 같으면, 금세 선수들이 출동해서, 그런 생각을 덮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청소년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런 알 수 없는 불만의 미립자를 거쳐, 벌써 젊은 나이에, 유니버셜 솔저가 되고, 혹은 그런 실험의 대상 중에, 실패한 소수의 케이스, 혹은 다수의 케이스가 된 것을 상상할 때, 마음에 적당한 백신을 맞은 것 같을 것이다.
혼다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듀카티 가문이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결국 혼다가 혼자에 가깝다는 이유로, 그것은 무의미해진다.
누구는 대학을 그렇게 조선대학교, 수많은 베이들을 갖고, 컨테이너를 층층이 쌓고, 그런 곳에서 일하고, 항해하고, 그 꽉 차 있는 것을 갖고, 경험하지만, 누구는 방송국에서 에프디로, 피디로, 에이디로, 조명으로, 그렇게 일하는 것으로 또한 사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그 꽉 차 있는 사회의 지식, 감정, 인구, 시간, 역사, 방송, 언론, 현대사, 그런 것들의 항상, 차출되는 인원 같은 것이다. 문학에서 우리는 자유를 맛보지만, 방송과 드라마에서 우리는 헬레이저 원투쓰리를 그림자처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연속이 없는 것이 아니고, 연속이 있다는 것은 전체가 있다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좋은 말을 해도, 사선으로 뚫고 들어가는, 수 많은 언행들을 보자면, 내가 컨테이너 항구에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이것들이 과연 어디로 가려고 이러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바쁜 층계를 오가고, 하루하루 공통된 임무에 충실하며, 정말 누군가는, 피아노 유학을 떠나는 아무개가 평범한 문과생인 자기를 좋아했다고, 그런 물기 젖은 여운의 편지 같은 것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세상이 자꾸 연상이 되어서, 항상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포기하고, 그것을 전제하고, 낭만을 생각하니, 도리어 막혔던 담이, 담터, 무너지고, 조율사가 한 번 조율을 한 피아노 소리가 다정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진리는 과연 노출되어 있었던 것일까? 누구는 셰익스피어의 사대 비극만을 보고도, 벌써 실험실의 비극을 직관하고, 분노하고, 천노역정, 천번 노하고, 역정낸다는, 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도 지금까지, 그의 사대 비극이, 무엇의 카무플라지이고, 그들에 대한 위무이며, 때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뒤섞는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터에서 죽였던 것일까?
아까운 사람들을, 차라리 실험실에 보내면 좋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 티비만 꺼져 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새로운 전체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 비극인 것일까?
끝없는 비극이란, 그것의 정식 명칭이, 죽은 요셉의 꿈일 것이다. 우리는 한 명도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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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화성을 여행할 때, 사람 뼈만 발견해도, 그것이 나사의 공전의 히트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뼈 같은 것만 발견해도, 동물이래도, 유기질이나, 아미노산, 그런 것들, 사람들은 거기에 올인하게 된다. 어째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나사의 그런 것들에게는 어마어마한 투자가 이뤄지는 것일까? 시나 소설, 아름다운 것들,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화성의 티에스 엘리엇의 황무지, 그런 것을 보자니까, 뼈만 나타나도, 인간의 인접성의 원리에 따라 관심이 집중되는 것일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좌표가, 과연 인간의 역사에 있었던 것일까? 그와 같은 비인간적 정신의 정점과 같은 황무지, 화성의 티에스 엘리엇,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성립하였고, 결국 서양에 어떠한 내부 세계를 만들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전체로 꽉 차 있고, 우리는 연애하고, 편지하고, 서로 의사소통하며, 행위이론, 그런 것도 하고, 항상 적당한 역사의 인물들로 낙점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끼리 자주 변하는 경우도 있고, 조금도 변하지 않고, 계속될 때도 있고, 변하는지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뭔지 모르게 거란족에게 가슴이 꽂히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 그나마 온건파가 나타나, 우리가 이렇게 절대 비극 같은 인간 실험을 하는 이유가, 아시아와 붙어서 깨진 다음에 그런 것 같으니, 이렇게 가공할 만한 무기와, 변신 괴물들과,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붙게 되면, 우리가 정확히 어떤 계급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우리 인간들을 상대로 실험을 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야만족들을 상대로 실험을 해도 좋을 것이다는 말도 했을 것이다.
비극은 거기에도 있다.
대다수의 그들은 가루와 같고, 총을 들고 나타나, 한 번 쏘고는, 화살이 가슴에 날아와 박힐 때까지 천천히 전진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괴물들에게 자유의 공간이 주어지자, 사실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자놀이를 하면, 사자들은......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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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모든 역사의 비극들이, 주자를 괴롭히는 실험실의 증거밖에 되지 못하니, 그런 것을 방송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일 년 정도는 안식년 제도처럼,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송국은 이미 실험실의 전체가 되어 버렸고, 사탄과 동양의 정치적 중간 코드 이상의 것을 말할 재주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노래를 들으면 우리가 흥분하는 것은, 그것이 노래 가사가, 혹은 멜로디가, 그렇게 예술적이고, 아름답고, 정서적이고, 이념적이고 해서가 아니라, 처음 우리가 그것을 듣고 환호했던 것은, 우리들의 무의식이, 실험실이 아닌 것으로다가, 우리에게 달려온 것 같은, 동방박사 같아서였을 것이다. 문을 열면, 개구리가 울고, 문을 닫으면, 저녁 늦게까지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에프엠 음악을 듣고 좋아지자, 매우 오래전부터, 음악과는 상관없는 방송들이, 어느 때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그것들이 에프엠에 쏟아져 들어온 것이, 그것의 전쟁의 시작, 그것을 알리는 효시였을 것이다.
서양이 중세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은 것은
셰익스피어의 사대 비극이, 절대 비극을 감추는 카무플라지였다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하찮은 기능을 하는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