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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이천이십이년을 맞이하면서

by 마음대로다 2022. 1. 2.

 

 

 

 

이천이십이 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한양대역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깊은 강촌에 마음이 베이고 말 것이다. 그것은 나이프. 사장님. 우리가 아는 한양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한양으로 보내라는 말도 그렇다. 우리는 아주 부적절한 가면을 쓰고, 가면대왕 프로그램 같은, 한양대 계단을 오르고, 이것이 피크인데, 한양대 계단을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또 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친구가 아주 자랑을 했다. 거기에서 나는 깊은 내면과, 라면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노래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멜로디인지 모르는, 또 다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연주곡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것을 만나고 싶어 했다. 친구가 한양대에서 나의 글쓰기를 좋아하고, 자꾸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 이문열에 대해서 말했던 것도, 어찌 보면, 친구의 두뇌였다기보다는, 백 퍼센트 두뇌이겠지만, 한양대 전체의 전통, 혹은 무의식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계단을, 천국의 계단을, 다른 이의 문장에서는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들의 지난한 관념들 사이로, 평범한 우리들의 풍경이, 계단이, 드러나고, 나타나 자기를 내보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수학이고, 그것은 백번의 고지전이며, 우리나라 영화, 백번의 슬픔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충일한 현상은, 유현상은, 대방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명필화서라는 말을 해서, 화서역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처럼, 제법르네시떼는 쫌, 대방역은 내가 사랑하기 전부터, 사람들의 나의 사랑을 알았고, 그것을 언젠가 언급했던 것 같은데, 그와 같은 작가의 가물한 기억 속에서도, 사람들은 나의 사랑을 재차의,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비탄에 잠겨, 대방역을 지날 때면, 잠이 들곤 했는데, 고등학생으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중고등학생이 아니고서야 어찌 대학생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피라미드적인 질문을 우리가 받고, 포커 게임에서, 마치 도적단이 된 것처럼 콜을 하고, 콜을 외치고, 그렇게 잠에서 일어나 있으면, 우리가 대방역이라는 이름에 너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두려움은, 에스이에스, 그러니까 유사성행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다만 잠에서 깨어 일어났음을 알았을 때, 계속되는 안도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방이 크고, 넓으면, 방이 약간 더럽고, 사람들이 신발 신고 다니고,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빌딩도 짓고, 지하철도, 차들도 다니겠는가? 우리의 인격은, 사랑은, 명목적으로 모노가미인 것처럼 지내면서, 가장하면서,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것이라는 초현대적인 언급에까지는 차마 갈 수도 없고, 오를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는 갈 것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어느새 나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선입견, 혹은 에피스테몰로지, 인식론자처럼 되어 버렸다.

 

대방역은 추운 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피크이다. 그것의 처음은 작고, 어느 골목 같고, 골목치고는 크고, 그런 대방역을 지나가면, 여의도 근처가 나오는 것이다. 내가 만일 가난한 신학생이 아니고, 마음으로는 가난하고, 육체로는 아주 부자였다고 한다면, 서울의 내로라하는 부자였다고 한다면, 그래도 마음은 가난하여서, 그런 곳을 특히 애착하여서, 먼저 뛰고, 나중에 사진 찍고 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지방을 과거로 하고, 서울을 현재라고 한다면, 당연히 지방에 있는 과거의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식의 경주에 따라, 서울의 현재에 다다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보다 연예인 같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여의도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연예인들이 아니라는 것이 치명적인 모순이다. 남자들은 연예인처럼 싸인을 하고, 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여자들은 연예인처럼, 옷을 전문 코디네이터가 있는 것처럼, 사입고, 옷을 못 사면, 부모에게, 부모의 권력에게 대항하면서, 이 시대 사회의, 시민자유 경제, 그리고 사회복지학적 어떤 정책, 그런 것의 의무를 갖고, 자기에게 옷 하나 사주지 못하는 것이냐, 울고불고, 그런 색의 열정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가? 반드시 연예인처럼 되는 것이다. 드라마 “이방원”은 그런 것을 담아내는 그릇은 되는 것 같다. 우리가 그릇이 없으면, 꼼짝없이 밥을 먹을 수 없다. 우리들의 그릇됨은 거기서 빛이 나고, 그보다 더 그릇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의 도덕적인 모순과 경쟁 속에서, 하루 빨리, 도덕 시장 경제로 나아간 것이, 우리가 그릇을 아끼고, 거기서 뭘 맛있게 먹는 것만으로도 되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 누구에게는 백 번 먹으면, 백 번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 한 번의 그릇됨을 보고, 내용을 채워, 한없이 아름다운 도덕심으로 나아가는 것이, 다만 그것만으로, 반드시, 우리가 알고, 좋아하는, 훌륭한 관념의 진행과, 건축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백 미터의 산장을 앞에 두고, 눈보라 속에서 죽는 사람들처럼, 그나마 다행스럽게, 사기에 담겨진, 훌륭한 사람들의 음식 냄새를, 바로 코 앞에서, 불빛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죽는 이와 같을 것이다. 우리가 종로에서, 종각으로 행진하여 가다 보면, 그와 같은 눈 내리는 장관을 보고서, 우리가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그릇의 공학은 알겠는데, 선한 관념의 실재는 향유하지 못하고, 그것을 생산하여 자랑하지도 못하겠기 때문인 것이다. 드라마 이방원을 보다 보면, 하도 사람들이 이방원 이방원 하니까 어제 보았는데, 유난히 구조가 잘 된 내용이었는지, 가슴이 후벼 파지고, 아파지고, 다만 정몽주를 죽이고, 이성계를 죽이고 하는 대사들로, 단순화되어 진행하는, 인두껍을 한 어둑시니들이 그렇게, 가슴이 후벼 파지고, 후난성, 칭하이성, 그러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이성계처럼 죽는 것 같았다. 당연히 여의도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연예인들은 아니다. 그러나, 겨울 어느 한가한 날에, 티맥스 이천이십이 년도 신품을 타고, 질주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연예인 같은 삶을 지향하다가, 아들이 한량이나 되는 것 같으면, 가슴이 빙판처럼, 추운 겨울날, 도리어 깨지지 않겠는가? 우리가 피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은 표면을 흐르지 않고, 그와 같은 귀한 깊이로 질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대학생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은 하늘이, 그리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어째서 서양이 그들의 도가, 십구세기, 이십 세기 중후반까지, 다 한 다음에, 과학의 시대가 폭증하여 세상에 드러났겠는가?

 

대학생들이 그들의 모나드와 같은 자유 공간 안에서, 무능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마치 낭만적인 영화 대결에서, 초반에 미국이 나의 프렌즈들을 조롱하고, 메디칼 드라마를 쏟아낸 것도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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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은 그와 같은 자유가 있다. 그것은 대방역을 날아오르는 피닉스와 같다. 전세계에 반드시 피닉스 온천 파크가 있는 것은, 스키장 리조트가 있는 것은, 구조적인 진리인 것이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신현균과 그 형제들, 자매들, 그런 밴드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맹활약 때문에, 사구와 포켓볼의 시대를 지나, 쓰리쿠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그렇게, 이천이십이년의 이름과 잘 맞는다. 우리가 국문학을 무시하다가, 그가 과학적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점더 빠져들게 되는 것처럼, 그 여학생을 만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울고, 그는 슬프고, 그는 어둡고, 여학생만 빛이 나고, 애니웨이, 국문학생이 조금이라도 성경을 많이 안다 싶으면, 신학생은 알 수 없는 균열이 마음에 생기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국문학생이 영어까지 잘하는 것을 알게 되면, 영문학은 영어학이 아니지만, 그와 같은 영문학이 마침내 영어학만이 될 때까지, 그와 같은 영문학생은 마음속의 구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문학생들이, 매운 닭발만 먹고, 늘 매운 닭발만 먹고, 가끔 케이비에스 사극의 드라마에서 엑스트라 알바만을 하는 것으로, 그의 전진의 시기가 종료가 된다면, 우리는 마치, 과학과, 신학과, 영문학이, 그들을 몰아놓고, 죽이고, 장사한 것처럼 되는 것이다. 신학생이 스스로 포켓볼처럼, 기도하고, 설교하고, 경제를 달성하고, 그와 같은 꽉 찬 구멍으로 사라지면, 국문학생도, 적당히 취직 공부해서 취직하고, 평범한 사람들과 아무런 인격적 구분이 없게 될 것이며, 과학은 늘 권력이나 정치의 하수인이 될 것이고, 끊임없는 대화 관계 속에서 과학철학 같은 것이 유기체적 철학자처럼 나올 수가 없고, 그것은 영문학도 브리티쉬 컬럼비아 마찬가지인 것이다. 철학자가, 철학생만이, 그와 같은 장자들이 모두 죽는 이집트의 비극에서 아직 미온적인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는 철학 계간지를, 보통 학생들은 늘 배고프고 돈이 없어서, 대학 도서관에서 카피해서 그것들을 읽지만, 그는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 백 걸 안에 드는 사람의 아들이어서, 마음껏 구독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오피스텔, 대방역 같은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서, 그가 집에 없으면, 냉장고에서 뭘 꺼내먹고, 그들도 돈이 있으면 구독하고 싶은 문학지와 철학지를 읽는 것이다. 친구가 비상하게 체크해놓은 것이, 그렇게 신기하고, 아름답고, 세상의 메시지 같고, 때로는 아포칼립스 같고, 유칼립투스 같고 하는 것이다. 철학은 그와 같은 그룹과 연대로 이뤄져 있다. 친구는 음악은 듣기 좋아했으나, 연주 연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음표만이 진행하는 것이 그에게는 소름끼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학의 시험을 좋아하는 것은, 마땅한 정답이, 베토벤 소나타 월광이나 열정처럼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여유 같고,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지, 그렇지 않은지, 남의 잘 모르는 속처럼, 무한하여서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한강뷰가 보이는 오피스텔, 수많은 플라타너스 나무들 사이로, 그리로 오르는 길목의 거리에서, 전경들에게, 곤봉으로 맞아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다치고,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으나, 대학의 공부는, 시험은, 그리고 작품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주어진 세상이 그에게는 얼마든지 하이패스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세상이다. 마치 성경이 다른 세상을 감추고, 적당히 드러내고, 계속해서 감추는 것처럼

 

우리는 그래서 우리가 자주 마시는, 각성제 같은, 기호품 같은, 달고 쌉쌀한 것을 커피라고 불렀던 것이리라.......

 

 

 

 

우리는 드디어, 저마다의 포켓볼에서 모두 나와서, 그나마, 이제는, 그것의 두께와, 각도와, 계속되는, 계속해서 가능한 논리들의 장을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 감추어 있었던, 성경의 시대에서부터, 디멘젼이 꼼짝없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대학원까지 졸업해도, 답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고, 덜된 논문으로, 죽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한 번쯤, 중국에서 거대한, 오토바이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 그와 같은 구분은, 실은

구분된 사람들조차 아까워하고,  중국보다 크게, 인도만큼도

 

한없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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