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공부와 영성에 관하여
우리가 안 보이는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나, 그림, 그런 아름다운 그림에 빠지곤 한다. 독일의 아름다운 성을 배경으로, 맥주 광고 사진이 크게, 매우 크게, 생맥주 집에 걸려 있으면, 우리는 그 맥주집에 자주 가게 되어 있다. 그것을 집에, 자기 방에 걸어 놓으면, 부모님이 걱정보다도 먼저 궁금해서, 혹시 나중에 맥주학과 그런 데에 가려는 것이냐 묻게 되는 것이다. 내가 포토샵을 하지 않고, 맨 밥을, 그러니까 기초적인 김치에다, 김에다, 먹이는 것 같은, 열흘을 굶긴 이에게 먹이는 것 같으면, 그래도 불만은 경험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육체적인, 어째서 포토샵을 하지 않고 이번에는 글만 썼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뭔가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독재자의 태권 품새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니다 할 것이다. 뭔가 개성 있고, 개성 공단, 매력이 있긴 하지만, 재원과 특수성이 넘치는 일본 드라마, 줄여서 일드, 그리고 맘모쓰한 재력을 과시하는 미국 영화, 그리고 아기자기한 무기를 이번에는 내세우는, 저번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줄여서 한드에는 미치지 못한다 할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진짜 독재자들을 갖고 있고, 독재자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나도 어느새 독재자가 되어서, 그것의 슬픈 지중해의 절벽, 깊은 저녁의 풍경, 그와 같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포토샵은 마치 나의 글과는 별개의 것처럼, 지구가 포토샵이면 달이 나의 글이고, 나의 글이 나의 지구면, 우리 걸그룹 노래의 제목 같은, 포토샵은 달이나 화성이 될 것이다. 포토샵에 대한 광기는, 몇몇 특수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지나쳐서, 나는 글에 있지 않고, 포토샵에 있다 주장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성리학적 불만처럼, 정해져 있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을 알고, 포토샵이 없어도, 음악을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면, 모리꼬네의 음악처럼, 영화와 상관없이 진행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면, 글만 읽고도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포토샵을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의 포토샵은 덜된 것 같고, 진짜 그냥 포토샵 같고, 누구나 다 할 것 같은 포토샵 같고 그렇다. 그러나, 누군가 한번, 누구나 한번, 그냥 한번, 나의 포토샵에 마음을 뺏기고 나면, 나의 포토샵은 금세 두각을 나타내고 만다. 세상의 모든 벽화와, 그림, 그리고 영화의 장면까지도, 바닷물처럼, 마시면 마실수록, 슬픈 모리꼬네의 음악처럼, 도리어 목이 마르게 되는데, 나의 포토샵은, 그렇지 않아서, 슬픔이 멈추고, 인사이트가 진행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한번 의로운 여자를 알면, 그런 여자가 그렇게 색즉시공 색시하다는 것을 우리가 겨우, 알고는 있는 것이다. 나의 포토샵은, 그와 같은 기억나지 않는, 거미의 노래 가사처럼, 그와 같은 기억나지 않는 학창 시절의 달과 같은 존재, 부산 영도, 바람 부는 날의 어떤 찰나와 비슷하다 하겠다. 이념은 육체와 같다. 그것이 그렇게 그와 같은 매개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열리지 않고, 닿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일상인 것이다. 나도 소유하지 못한 것이고, 포토샵을 할 때, 나 자신에게도 현상되는, 그와 같은 존재이고 빛이다. 내가 그와 같은 현상을 처음 발견한 것이, 아주 나중에, 내가 했던 포토샵을 볼 때였다. 그냥 평범한 신앙 고백이다, 형상적 쓰리쿠션이다 했는데, 계속해서 즐거이 백거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큰 일이고, 큰 일의 시작이며, 보통 서막이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글을 읽을 때는, 우리가 워낙에 글의 화마에 데인 상처가 많아서, 누구도 그것을 보려 하지 않는, 그와 같은 대작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식민지 시절에, 영국 사람과 친해지면, 영국 소설을 많이 읽지 않겠는가? 그리고 문학 영화를 많이 보았으니, 그와 같은 것들의 원작이 궁금하고, 많이 보고자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의 소설마저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말의 아들과 딸들이기 때문에, 도리어 영화의 우스운 표현을 마다하고, 소설 원작의 감흥을 느끼고자 할 것이다. 대게가 그러하다. 관련이 있고, 하나가 안내가 되어서, 좀 더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포토샵은 무엇인가? 독립되어 있고, 개별적이다 했지만, 그래도 나의 글과 함께 읽다 보면, 금세 달밤에 휩싸이게 되고, 한낮 태양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남자가 말을 타고 가는 것을 질주한다고 한다. 만일, 김유신의 말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지 않았다면, 안 질주라고 했을 것이다. 나의 포토샵에는 그와 같은 질주의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손에서 막 떠난, 공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사람들이 광주 광주 하고, 광주 사태, 부산 마산,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손에서 막 떠난, 그와 같은 달과 비슷한 것이다. 우리가 지구에 있다고 해서, 지구에 있는 그와 같은 달에 쉽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거리감이 있을 때, 많은 감동을 느끼곤 한다. 우리가 천사를 싫어하는 것은, 사탄도 동시에 있을 것을 알아서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천사를 싫어만 하는가? 우리가 부어만이라는 영국 남자가, 헤르만이라는 독일 여자가, 한국 땅에까지 놀러 와서, 까닭 없이 울기 시작하면, 우리가 천사를 싫어만 하겠는가? 최소한 연구는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거리감에서, 스트리트, 낯선 것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와 같은 선에 우리 자신의 생명도 있음을 발견해서인 것이다. 사람들의 작품에는 그와 같은 영혼의 거리감이 담겨 있지 않다. 심지어는 목사들의 설교에도, 베드로의 배신의 새벽이 갖는 거리감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확고하고, 동시에 부동한 것을 증명해야 하는 목사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적이라는 미명 아래, 기초적이며 단순한 생명을 배신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서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지 않아도, 그것을 느낄 수는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삼겹살을 먹는 이유는, 그것을 느낄 수는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처음으로, 소주와 함께, 그것을 먹은 다음에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외계인처럼, 알 수는 없어도, 느낄 수는 있게 되는 것이다. 처음이 없었는데도, 처음처럼......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제는 어른처럼, 딱딱한 음식도 잘 먹게 되면, 그래도 어린아이처럼 달콤한 포토샵을 보면,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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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그렇게 슬프다. 영국이 슬프면, 미국은 따라 슬플 수 밖에 없다. 조금은 미네소타나, 오대호 연안의 도시들이 슬프고, 나머지는 안 그럴 수 있다 하겠지만, 미국 사람들이 다른 외국어를 잘한다는 말을 내가 들은 적이 없다. 오스트레일리아도 그렇다. 오스트리아도 그렇다.
영국을 한국 사람들이 영국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은 이름이 없다.
그리고 경상도, 경상남북도 지방을 우리는 영남지방이라고 부른다.
언젠가는 한국의 영남 사람들이나, 전남 여수 사람들이, 영어를 더 잘하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인가? 왜냐하면, 영남 지역에는, 경주라고하는 천년의 고도가 있고, 사람들은 착실하고, 수더분하고, 진지하고, 총명하며, 비상한 데가 있고, 신라 문무왕을 그렇게 좋아하고, 김유신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훌륭한 문학가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수도 그러하다. 여수의 이런저런 굽은 모습을 보면, 마치 그리스의 해안선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 그리스는 유럽 정신의 산실이 아닌가? 결국 문학이라는 것도, 소설이라는 것도, 자국어를 쥐어짜듯이 해서 나오거나, 쓰이는 것이 아닌, 외국 문학도 알고, 철학도, 특히 플라톤의 각주, 플라톤 철학을 잘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정도는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문학이 없는 언어만큼, 모리꼬네의 음악처럼 그렇게 슬프고, 뭐 잊은 것 없어, 묻는 아직 처녀 같은 아내에게, 서류도 잘 챙기고, 했다고, 웃으면서 출근하는 남편처럼, 그렇게 잔잔한 잔혹극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겉으로는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것처럼, 북한 주민들처럼 연기시키고,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티비 중계를 일절 보지 못하게 하고, 관중들도, 술 취하고, 악지르고 했어도, 집에 돌아가서는, 빠짐없이 섹스피어 연구, 그런 독립 채널을 시청하게끔 만든다는 말을 내가 들은 적이 없다. 언어는 자연과 같다. 자연이 무너지면, 우먼센스처럼, 금세 허깨비가 되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놀고, 축구 차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 최고의 현대 문명일 것이다.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우니, 어쩔 수 없이 공포 영화 채널이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공포 영화는 공포 영화대로 보고, 모두가 학생인 것처럼, 그것에 대해 자아비판하고, 저녁에는, 영화를 본 시간만큼, 섹스피어와 밀턴의 비교 연구, 그런 세미나를 시청하게 한다는 말을 내가 들은 적이 없다. 영국에는 영국공주가 있고, 노국에는 노국공주가 있는 것이다. 공민왕은 영민왕이기도 하다. 그런데까지 빠지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면 거의 노사정이나, 사노맹, 심상정, 노찾사, 웃찾사 수준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호미곶에서는 바람이 불고, 한 여름에는 열풍과 시원한 냉풍이 태극을 그리면서 회전하는데, 대구에는 미인들이 즐비하여서, 이 시대의 영웅들과 한 생명을 불태울 준비를 하는데, 영국은 늘 쓸데없는 것에 깎이고, 회전하고, 늘 헨리 제임스나 하는 것이다. 공허한 관념들을, 끝없이, 죽을 때까지, 유러피안의 문장들로나 읽고 나면, 말 그대로 지구 공동설을 실감하는 수준으로만 나아가게 된다.
한국 땅에나 문학이 있고, 영국이 있고, 잉영굴랜드에서는, 그런 희한한 잡기 같은 것만 있는 것인가?
나는 보이라는 말은 몰랐을 수 있으나, 스톤헨지는 알았을 수 있다.
그것은 따뜻한 기초, 그러니까 영원한 서초이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 오기까지, 항상 사탄의 편에만 섰어도, 스톤헨지 안에서만큼은 온전하고, 새벽에는 쿨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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