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상시. 그리고 능력
사람은 책으로 결정난다. 사람이 프로그램으로 결정나듯이. 이것이 있고, 사람은 돈으로 경정나는 세상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먼저를 알고, 여자가, 남자의 돈으로 결정나는 것을 좋아하다가, 그래도 나중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먼저의 것을 하나씩 제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교양이 있는 것 같더니, 한 두세 마리, 만나고 나니까, 돈만 많고,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여자는 만난다. 왜냐하면 생존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존. 생존. 생존. 김정은이 세 번 앵콜을 했다는, 바로 그 생존. 그러니까 생존은 하지만, 생존이 아닌. 그와 같은 멀어짐. 사라짐. 그와 같은 덮임. 젊어서 노병. 사람은 생존으로 파급된다. 생존이라는 구멍은 활력이 있고, 이음이 있고, 자랑스러워서, 티비에 비치고, 나오고, 생존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잘 나오지 않으나, 조금이라도 성공하면 대서특필되고 그렇다. 바로 그 구멍을 연상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말과 글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이문세가 여러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마치 거기서 죽는 것처럼 부르는 것이다. 미국 재소자들이 한국 라면을 먹을 때, 여럿이서 함께 먹으면서, 그런 어떤 글을 누군가가 썼다고도 하는데, 어느 때는 예수님처럼 죽을 것처럼 먹는 것이다. 아침에 평소에 그렇게 먹고 싶었던 옥수수를 하나 레인지에 데우고, 거기에 어제저녁에 맥주와 함께 먹었던 바나나를 하나 먹고, 그래서 글을 어제저녁에 쓰려고 했는데, 거기다가 캔 커피 하나와 맛있는 건빵을 먹는데, 나는 거기가 글씨인지, 아니면 섹스인지 모르는 모퉁이에 이르러 마음이 울컥하였다. 일본 에이브이가 서양의 것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수준이 높은지 아는 이가 없다. 사람이 같은 구멍만 보다 보면, 그것들이 안 보이게 되어 있다. 잘 만들어진 기승전결을 보다가, 사나운 실재의, 만들어지지만 조잡한 것들을 보다 보면, 나의 가난이 더욱 골이 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문장이 느끼는지, 아니면 실제로 느끼는지 아는 이가 없다 싶다. 원래 그와 같은 구석이 있어서, 사람들은 더운 여름에도, 혼자서, 냉매를 켜놓고 글을 쓰고, 겨울의 마지막에도 글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미국의 온도가 올라갔는지, 올라서, 하루아침에 눈들이 모두 녹았는지, 적어도 남부 텍사스, 찾았는데 알려주는 이가 없다 싶다. 내가 미국 사람은 아니나,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눈은 처음이라고 하고, 나도 안타까웠었다. 항상 한국만, 모든 자연재해, 윈난 재해, 통틀어서, 경험하는 내용은, 범주적인 내용은 같으나, 빨리 빠져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추위도 닥친 것이 아니라, 전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임진왜란도, 그렇게 보면 인명 살상의 전해진 것일 수 있다. 육이오도, 침공한 것이 아니라, 불쌍한 일이차대전이 전해진 것일 수 있다. 비엔남 워는 먼저 치르다가 보니까, 그와 같은 원칙이, 내가 좋아하는 카세트테이프 조약, 나중에 캄보디아로 전해진 것일 수 있다. 어떤 대각국사 의천 선생이 카세트테이프 조약을 머릿속에 상상할 수 있겠는가? 돼지고기 머리 고기는, 구깃구깃, 맛있게 먹은 것이, 교사의 수입과, 그래도 많은 만남과, 즐거운 만남과, 의무적인 만남 사이에서 많다지만,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머리가, 한정된 수풀 아래에서, 사회의 머리이기보다는, 다만 머리 고기와 같기 때문이다. 어째서 글이 있고, 자세히 보니 훌륭한 글이 있고, 다만 레토릭이 있는 것인가? 레토릭을 우리가 좋아한다. 케이 에잇 화이트 먼저 발각된 사진을 보자면, 사람들이 앙드레 김이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하고, 나는 네파는 자유다 하는 레토릭을 포토샵에다 상상하였지만, 그냥 흐르는 물에 꽃잎처럼 때리고 던져놓고 말았다. 내 이 말들은, 말고의 귀처럼, 사람들을 모으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잘리고 버려진 귀에 모여드는 개미와 같지만,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그것을 다시 인체에 아름답게 하면, 우리는 적어도 산처럼 되고, 하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원리를 알고 나면 슬픈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를 맺고 있다면, 인간은 사탄과 원치 않지만 스크럼을 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권력 중에 가장 슬픈 권력이 민주 세력이 아닐까 싶다. 공부는 윤기와 같아서, 내가 만난, 짐작하는 민주 세력들은 대게 자생적인 윤기가 없었다.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에, 원하든 원치 않든, 불 타오를 때만, 아주 조금 윤기가 있었다. 주자도 원래 사회적 관계의 면에서는 윤기가 없는 이이다. 그러나 동탁처럼 스스로 윤기가 있고, 스스로 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치 호렙산의 떨기나무 같은 것이다...
*
책을 읽어야 이와 같은 아르보 팰트 느낌의 진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책을 읽다가, 어느 정확한 시간에, 쇼생크 탈출의 시간에, 파이프를 내리쳐야, 이와 같은 탈출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냥 그런 자유주의자의 행진인 줄 알았다. 우리가 도시의 소시민의, 적정 수준 이상의 수입이 있는 중산층의, 행진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이제는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나도 그와 같은 미적 추진이란 것으로, 슬픈 족적만을 갖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는 것이었다. 사람이 골프를 칠 때, 어프로치를 할지, 아니면 승부를 내릴지 항상 망설여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로 골퍼들의 시합은 그런 것이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둘을 하나처럼 해서 행하는 경지이기 때문에, 그러나 거의 모든 아마추어들은, 힘을 빼고, 비리비리 접급하는 것을 택할지, 아니면 직선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확신대로 돌진할 지를 갈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많은 백구를 가지고 있는 탁구보다는, 한 구 치고 한참을 걷는 골프가 나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걷다가, 걷는 중에, 헤어지고, 걷는 중에 새로운 누군가를 전화로 만나고, 예, 그러면 거기서 보시겠어요, 저도요, 우리 커피도 마시고, 저녁도 함께 해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의 말마따나,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이다. 그런 재치의 구석도, 희한하다 보니까. 헤어져서, 눈물이 흐르던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깃발 앞에 서서, 공을 결정하는 것이다. 원래는 어프로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힘 조절을 못해서, 마치 승부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자각몽에 빠지고, 슬럼프와, 해자와, 해구신에 빠지는 것이다. 트리플 보기는 그나마 아무개 집 반듯한 자식 같은 느낌을 준다. 지방대를 나와도, 자기가 잘 돌보면, 돈을 자기처럼 벌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아버지의 이기심은 그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도 없이 반짝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가 다른 아들들을 박해를 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위해서, 다른 아들들 백 명을 박해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정신병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깃발을 둘러싼 어프로치의 세계는 거대하고, 일본 에스에프 만화에, 우주 바퀴벌레 어떤 것에 잘 묘사가 되어 있다. 한 번 어프로치의 연대에 빠지고, 회전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철학은, 그리고 그 안의 문학은, 수많은 라쿠카라차들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라쿠카라차들이지만, 학교에서 그렇다고 배우지만, 정작 철학이나 문학은 그렇지 않은 것을 배우는 것이다. 나태주 같은 것들이, 김용택은 덜하지만, 그와 같은 기미와 방향성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회전의 방향을 택하고 나니까, 꼼짝없이 비티엔, 그리고 블랙 핑크 같은 것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선린 외교 상고 하는 관계에서는 좋은 것이나, 정작 우리들의 건강에서는 별로 좋지 않은 것들이다. 쓰리쿠션이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바퀴벌레처럼 그런 인간들에게는 연상되기 일쑤이다. 주자의 말은 다만 어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 사람들은 대게 왕명상하는 것들을 좋아하고, 인조인간의 한정된 선반과 술법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퀴벌레에게 쏘는 총알들은 자기들에게 돌아가, 손에서부터 후렌스포메이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도 일본 에스에프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총알을 백 개 정도 발사하면, 그것들이 모두 돌아가, 완전한 성체의 바퀴벌레가 되는 것이다. 미국 영화는 불쌍한 데가 있다. 원리를 알아야 고통도 시작되는 법이다. 과정 속에서는, 숱한, 참숯 총각, 대게의 단위적인 영혼과 육체가 부여되기 때문에, 그것들이 누적되어 무엇이 되고, 자기들의 무슨 생각이 되고, 무슨 육체 활동,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창작 활동이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이들은 학교 교육을 잘 받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도보다는 순수한 학문적 의지와 영혼을 먼저 습득하기 때문에, 그들이 만드는 영화에 오염이 덜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흑인 아버지가 핸드폰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추다가, 입학 전의 딸도 함께 춤을 추다가, 매우 이상한 춤을 추는 것을 발견하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 학생들 몇 명에게 순수한 학문적 의지와 세상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확률이 너무 없는 것을 그래도 있다고 산정하는 것은, 운동의 미래적 결과를 예측할 때, 오히려 좋은 것일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드디어 우리들의 영화와 드라마가, 세계의 사탄의 지배와 그들의 원하는 대로의 기형적인 출산과 비교해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동시에 절망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장 비슷한 것이 손오공이다. 저팔계는 눈물의 것이다. 거기에는 결코 돼지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돼지 의도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할 줄 아는 것이 먹는 것이니,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할 줄 아는 것은 다이어트 밖에 없는 것이다. 약간의 요가와, 약간의 운동 밖에 없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해,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것은 문명의 레토릭을 고발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사오정에 관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해석이 그렇게 정확하다 하겠다. 처음에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고, 어프로치는 어프로치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중심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다만 말이 맞지 않는 것으로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주자가 굴원처럼 죽으면, 광인이 죽는 것이고, 자기들은 합리적 이성이 되는 것이나, 주자가 다만 다섯 년이라도 지내게 되면, 십 년 이십 년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들에게서 시작되는 언어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들은 그나마 잘난 척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온몸과 마음에 레토릭 밖에 남는 것이 없는, 전지구적 광주 사태가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시민과 군경이 하나가 되어서, 기억이 없고, 자기들 사오정 같은 어린 마음에, 그들이 주먹과 임신과 방망이로 내리치는 것 같은 상상이 온몸에 퍼지게 되는 것이다. 민주 세력이 스스로의 윤기를 가지고, 군인 경찰들이 우리나라의 오래된 숲에서 훌륭해지는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나라의 민주 세력이 윤기가 없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별로 백기완을 안 적도 없지만, 매우 이상한 페인트 속에서 죽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나마 손오공이 저팔계와 사오정보다 나은 것이다. 한국의 사랑 세력, 그리고 세계의 보편 세력이 빠지면, 일본에는 가난한 세력, 그리고 사람 말을 할 줄 모르는 잔존 사무라이 세력 밖에 없는 것인데, 옛날에는 노래하는 여자들을, 애니메이션들을 곧잘 내보내서 감추어졌으나, 지금은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중국이나, 홍콩, 대만에서 훌륭한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누군가의 말마따나 정치적인 행위와 미적인 행위는 다른데, 정치적 행위가 불분명할 때에 늘 미적 행위로 그것을 덮는 짓을 한다고 했다, 그런 고리타분한 정확한 말을 가지고 보자면, 일본이 가와바타 미적 행위의 대마신인 것이다. 자기 과거의 정치적 행보를 잊고, 과감하게 작품 앞에서는 미적 행위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늘 그것이 어렵다. 도시는 아름답고, 아르누보, 한국 드라마를 밤낮없이 보고,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런 깃발을 그러나 늘 보게 된 나머지, 그것들이 단순한 중국 무협의 씨를 말리고, 숱한 동물과 괴물과, 용과, 쥐들과, 몬스털스, 그런 것들의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자신을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중국의 과거 현대 도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책이 사람을 만들고, 프로그램이 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이, 유튜브의 필름을 통해서나 겨우 익힐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중국의 버려진 도시나 건물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아직 영화 찍지 못한, 다만 절대적으로 순수한 공간에 대한 염원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현대 도시를 갖고 있고,
한국은 틈만 나면 여학생들에게 현대식 한복을 입히고
틈만 나면 나에게 전체 비평을 의뢰한다.....
나머지 국가들에게, 인간이란, 다만 스치면 삼십년이고, 우리가 걸그룹으로 그들을 놀리는 것은 아니지만, 육십 년인 것이다......
Sand Population
한국 사람들도
그와 같은 세상의 신기루와 같다......
어찌 보면
'건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학과 인문학은 어떤 비밀이 있는가? (0) | 2021.04.21 |
---|---|
인품에서 (0) | 2021.03.25 |
일곱바퀴 반의 국가 (0) | 2021.02.05 |
우리는 슬플 수 없다. (0) | 2020.12.22 |
존재란 무엇인가? (0) | 2020.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