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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인품에서

by 마음대로다 2021. 3. 25.

 

 

 

 

 

 

 

 

우리가

 

 

 

 

 

 

 

 

작품에 걸신들렸을 때가 있었다. 물론 이건희 회장처럼, 세계 유수의, 쿵푸의, 천문학과 가격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마음도, 밤하늘의 별만큼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투자나, 자산의 소장 방법이라고 여기지, 정말 작품에 대한 걸신,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아마추어적인 탐욕, 그런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삼성이 구례 화엄사처럼, 그렇게 크고 웅장하게, 세계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그 현대가 우리 눈에는 작품처럼 보였지, 비좁고, 붓터치, 색감, 어떤 화려한, 요사스러운, 기발한, 그런 것들을 꽉꽉 매운 것이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작품으로 보았지만, 이발소에서 머리를 말끔하게 하고 나오면, 헤어지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소치, 소치 허련, 허각, 그들 형제의 작품에 대한 명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약간의 정신병과 몽유병 비슷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발소에서 좋은 작품을 보고 오면, 누구는 다만 시원하나, 누구는 마음이 도시적인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눈 앞에 풀떼기가 잔뜩 있던 도시의 풍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완벽했던 언덕과, 소나무, 보다 완벽했던 하늘과, 개울, 그리고 친구들이 그런 도시인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차가 있어서, 그냥 슈퍼맨처럼 하룻만에, 섬진강 모래사장에 갈 수 있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갇혀 있었고, 오히려 시멘트 단순 포장의 벽과, 도로를 걸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랑에 약하고, 사람은 풍경에 약하다. 사람은 사랑에 약하고, 사람은 작품에 약하다. 우리가 인격의 나무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선생님들은 인격의 나무를 안다. 왜냐하면, 일대 다의 관계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님들은 모를 수 있다. 스님들도 그렇다. 모를 수 있다. 스님들은 무분별하고, 목사님들은 경제적인 센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서로의 비린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리얼리즘 문학의 문학과 수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부르기만 해도, 어떤 학생은 깜짝 놀란다. 별로 친하지 않은 학생과, 한바탕 웃음으로, 도리어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으나, 마치 공장처럼, 반복처럼, 양철로 대충 만든 로봇처럼, 그와 꼭 같은 존재들을 만나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이스라엘인들은, 홍해를 건너나, 그와 같은 애굽인들은, 그렇게 애타게 좇았으면서도, 시험이라는 주사기 앞에서, 주사기가 그만 깨져 있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도, 친구들을 알고 있고, 그와 같은 눈물이 멈춘 상태로 진행하는 것을 알고 있다. 수업 시간에 얻는 것은, 시험을 통해 승리의 확진 판정을 받는 것은, 친구의 상처보다 당연히 귀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미 계급 사회를 살고, 우리는 그때 이미 화성으로 이주하는 우주선을 타는 것이다. 이과와 문과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고, 이종격투기 하고, 지내는 것 같아도, 이과가 문과의 영화로움을 알아도, 문과가 이과의 하루 시간을 모르는 것만큼, 사실 그것의 비교가 엄격한 것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 자기를 지칭할 수 있는, 엄격한 학문으로서의 현상학이 아닌 것이다. 영어도 그렇다. 작가는 대게 영어를 잘 못한다. 관심을 가질 만 하지만, 화엄사 그렇게 넓은 집에 이르고 나면, 우리말의 생명들이 많은 과제를 내주기 때문이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부잣집 친구가 웃으면서 말하고, 조금 덜 부잣집 사람이 그에 답하고 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낯설게 여기고, 조심히 교우해봤자, 한 사람은 김유신이고, 한 사람은 김춘추인 것이다. 누가 노국공주가 될 것이고, 누가 신돈의 여동생을 자기의 아내로 삼겠는가? 대게의 공민왕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영어에 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영어를 한다. 영어에 대해 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영어를 잘한다.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는 타는 마음을 가졌지만, 의학이나, 우주 과학, 생명 과학에 대해서는, 그러나 영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래서 전공 영어를 제외하고는, 당연히, 한국말보다 진행이 약하고, 말하고 난 다음에 느끼는 만족감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들이 원채 오만하여서, 유명 미국 영화 제작소의 이름이 헐리웃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기들 유명한 곳의 이름이, 드스트럭팅 네이벌스라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일제 시대를 거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같은 방식으로는, 미제 시대를 거쳤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와 싸웠던 것이고, 누구와 함께 울었던 것이며, 누구와 함께 공부했던 것일까? 우리는 누구와 함께 위정척사운동을 했던 것일까? 대장내시경을 하면서, 수면마취를 하면, 깨어나서 누구와 함께 있었던 것일까? 김옥균은 옥균이다. 성은 김 씨고. 우리가 어제 본 드라마에 눈물이 그치지를 않는데, 김옥균이 이광수였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훌륭한 시니피앙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김옥균은 김옥균으로 그치고, 이광수는 이광수로 그치기 때문이다. 상해에서 죽었다는, 전설의 화려함을 입고, 일본에서 초국가적인 보호를 받다가, 어째서 일황이 옥균을 보고, 서로 먼저 인사하는가? 그 모습에 다른 내각 대신들이 눈알이 동그래지는 것이 있고, 드디어 이광수가, 전 세계를 향해서 피닉스를 날렸을 때, 무정이 가장 좋고, 다른 몇 개의, 그런 잡동사니 야사가 있어야 드디어 대학의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 이전에는 한국에는 문장이 없었고, 그림밖에 없었다고 누군가 무시무시한 말을 한다면, 그 말을 듣고, 해결하지 못하고, 뭐라 답하지 못하고, 앙드레 가뇽, 우리는 돌아갈 집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품에 걸신이 들렸다. 인과가 맞지 않지만, 그런 우리들의 눈에는 작품이 우리들에게 피를 부르는 것 같았다. 전쟁을 하더라도, 시위를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작품을 위해서......

 

김재규가 이런 씹 새끼들을 다 쏴 죽일 때도

 

너무 복잡해서 들어가기도 그렇고, 나오기도 좁은 공간에 뭐 그리 쓰지 않는 물건들이 많은지, 이발소를 나올 때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그림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노래는, 호시탐탐 그런 것을 노리는 것 같았다. 작품을 위해서는, 적당한 인품은 무시하고도 싶었다. 작품이 인품에서 나온다는, 직관이 있었어도 그렇다. 작품이 인품에서 나온다면, 더더욱 싫은 생각이나 소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외국에는 외국문학, 작품들이 많고, 우리들에게는 뿌띠 부르주아 같은 인품들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사나워졌고, 가족들끼리, 여자들마저 남자들을 학대하기 일쑤였다. 배가 부르면, 아녀자들은 행복했고, 자기 옷들을 사는 것을, 자식들을 위해서 걱정하곤 하였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그렇게 남자를 괴롭히고, 심지어는 때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남자들은 해외 노동자로 많이 나갔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할 것이나, 이런 것은 논리적인 것이지, 특별히 가부를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맛있는 것을 먹으면, 뭔가 나은 사람은 될 수 없어도, 인격의 채널은 어떻게든 맞출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먹다가, 먹다가 죽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와 같은 물고기들을 보았다. 대학은 돈도 만들어야 했고, 작품도 만들어야 했다.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우리에게 자원이 별로 없었다.

 

 

*

 

 

고지에서 총알을 재장전하고 있었다.

 

적들에게는 인품도, 작품도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야만은 잠깐 시간을 멈추었고, 이런저런 동양 예수 만화책이 되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우리에게 힘을 주세요......

 

.....

 

45 도를 넘어가면, 그렇게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작품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