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슬플 수 없다.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채소. 배추. 대체작물. 얼터너티브. 화살이 사람과 같다면, 쏘는 순간 태어나서, 과녁에 박혀 사람이 죽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단호하다면, 사실 모든 표현에서 기쁨을 얻는다. 우리가 단호하지 않다면, 그와 같은 문학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형이상학을 두고, 단 하나의 화살도 얻지 못하고, 사탄의 영역에서 죽는 것일 수 있다. 한 번도 성경을 읽지 못하고, 읽어도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대충 헤아린다고 해도, 사탄의 영역에서 죽는 것일 수 있다. 한 번도 자유를 얻지 못하고, 한 번도 문학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큐피드의 화살을 쏘거나, 맞지 못하고, 죽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빛이다. 연결도 단호한 것이다. 성경은 무수한 이름들을 갖고 있고, 여리고성, 아이성들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없으니,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대마도에 있을 수 있고, 일본이 대마도에 있는 상태로 죽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성숙하여서, 더 이상 전쟁과 증오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한국이 되고 일본이 되어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라지 못하는 마음, 그리고 지식은, 우리가 대마도 그 작은 지역에서, 실제 대마도도 아닌, 관계적인 의미에서의 대마도에서 죽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을 얻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본을 얻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온전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얻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인가? 그것이 바다와 같은 외교를 가로질러, 그와 같은 완벽한 수채화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동백꽃이 담채화 안에서, 꽃송이 하나를 떨어뜨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불완전해서인 것이고, 나쁜 것으로든, 좋은 것으로든 과정 중에 있다는 인식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여행 다니고, 아무것도 없이 바라보고, 긴장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이 지리상의 발견을 하고, 아무것도 없이, 정말 아무것도 없이 누군가 새로이 화살을 쏘면, 우리는 그만한 생명체가 되어서, 그들이 원하는 과녁에 박히는 것이다. 만일 대마도를 통과하는 무력과, 문력, 그리고 단호함의 상상력까지 있는 사람이라면 드디어 하얀 밤 마을을 탈출하여서, 사탄의 형이상학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력이 약한 것이, 무력이 약한 것 때문이요, 일본이 무력이 약한 것이, 문력이 약한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계단이 조금 많이 있다는 것을, 남아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항상 같은 얼굴, 같은 체격, 같은 말을 쓰는 일본 사람들의 시간을 돌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계단이 보이지는 않으나, 그 계단으로 자기가 실제로 결혼하고, 아이들이 몇 번이고 죽을 뻔하다가, 중학교도 가고, 고등학교도 가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단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애국이라는 것이 마취와 같고, 최면과 같고, 교육과 같고, 다만 일자에 대한 향연과 같다는 것을 실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밀로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영역에서 죽어가는 것인가? 그와 같은 죽음은 중학과 대학의 미필적 고의와 같은 것이다. 대학의 미필은 고등 직업 종사자일수록 두드러진다 하겠다. 그리고 대학의 그림자를 지나면서, 죽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책에서 화살을 꺼내본 적이 없고, 대상에 명중시켜, 사람들의 눈이 밝아져 본 적이 없다. 이렇게 피하고, 저렇게 그래프로써 가고, 철제가 말하는 것 같고, 디자인이 다 해결하는 것 같고, 주식이 기독교적인 주님 신학을 먹는 것 같고, 그것의 해결책인 것 같고, 다만 그와 같은 신경일뿐인데, 저녁에는 고등 문학을 공부하는 딸을 집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혈류는 뻔뻔하고, 소스라치는 시라소니 같고, 그와 같은 쏘쓰코드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임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두고, 저 사람이 고조선 사람인지, 조선 사람인지, 아니면 프랑스 예술과, 이웃 나라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진 현대 사람인지를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내내 현대와 삼성에서도 살 수 있고, 삼성에서도 그렇거니와, 엘지, 그러니까 겉모양뿐 아니라 내면에서도 고조선 이전으로 퇴행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은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처럼 눈물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고조선 시대에 어린아이 키 마냥 작은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침범을 하였는데, 사로잡아서, 교도소에 가두고, 일을 시키고, 먹을 것을 주고, 가르치고, 하였더니만, 고국으로 돌아가서, 평화롭지 못하고, 계속해서, 또다시 사람들에게 겁을 심어주는 전쟁에 휘말리다가, 넓은 평야 지역에서 십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스님이 도둑들처럼, 그 슬픔의 대지를 지나는데, 새벽녘에 그들 가슴에서 붉은 구슬들이 나와서, 거대하게 무리를 지어서, 강으로, 그리고 바다로 향하더란 것이다. 그렇게 진주나, 강진, 그들이 무리 지어 몇 년을 지냈던 곳으로 향하더란 것이다. 거기서 탈춤도 배우고, 배불리 먹고, 거북선도 짓고, 절도 짓고, 배불리 먹고 하던 곳으로. 그러니, 오직 사실만을 추구하여서, 아직까지도 전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실은 고조선 사람보다 못하는 짐승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흐름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정보가 없고, 사람들이 정보가 된다면, 결국 정보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보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성경도 그러하다. 성경을 그렇게 우리들의 아주 오래된 선한 사람처럼 읽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백번 철학을 하여도, 자기 몸에 꼬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코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모든 지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의 눈물 속에서 죽는 것이다. 어째서 있는 그대로, 사진처럼 말하지 못하는가? 사도 바울은 그것을 거울이라고 하였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책을 읽는 것처럼,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경험과 학교, 우리들의 기억과 티비 드라마, 우리들의 친구와 나의 해석이 있게 된 다음에는, 우리의 눈이 밝아져, 다만 책을 읽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탄이라고 대놓고 말을 하지, 어째서 그와 같은 만나와 메추라기의 힘든 길을 걸어야 하는가? 어느 누가 사탄이라고 지명하여, 항거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가? 그리고 사탄에게 지식이 있고, 사탄에게 배양이 있다는 말을, 헤로도투스가, 어느 다른 고대 학자들이 말할 수 있겠는가?
...
내가 뜻하는 바가 있어서, 에게 해 근처의 지역을 여행할 때였다. 나는 강성하였고, 그들 키에 모자람이 없었다. 힘이 있었고, 무술이 있었다. 보이지 않게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역에서도 나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은 매우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가 한국말로 계속해서, 나를 욕하고, 조롱하고, 무슨 이상한 조합을 갖고 계속해서 찌르고, 따라다니면서 방해하고, 잠을 잘 때는 얼굴에 물을 붓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못생긴 아이를 달래도 보고, 타이르고, 설교도 하고, 사탕을 주니, 사탄이 아닌, 처음으로 말을 듣는 듯 했으나, 나중에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무지 아니 되겠기에, 머리 몇 대를 쥐어박고, 으름장을 놓고, 볼기 몇 대를 때렸더니, 갑자기 지니처럼 거대한 체격의, 굉장한 냄새의 괴물이 나타나서, 자기가 그 지역 교육부 장관 비슷한 직함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나를 고소하고, 사람들 앞에 서게 하고, 아이들이 인류의 미래인데, 협박하고, 귀한 머리를 때리고, 천박한 짓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도시 사람들을 그때 처음 보았는데, 볼기를 때렸다니까, 몇몇은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그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았고, 그런 확신, 나의 피까지도 더러운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 사는 곳은 지명이 미국의 마이애미 비치 같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런 이름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였다.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고, 사람들은 자각몽을, 그러니까 자몽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코피를 흘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가두고, 감옥에서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다. 나는 감옥 안에서,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내가 살아온 시기로 따지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중과, 형이상학, 그리고 대상의 파편과 시간, 그것들의 사라지는 시간들을 이용하면, 사람들을, 대다수 민중들을 끊임없이 어떤 딸과, 귀신, 자각몽을 이용하는 도시에 살 수 있게끔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이 너무 슬펐고, 내 사는 나라의 모습과, 운명과, 내면은 과연 이들과 많이 차이 날 수 있겠는가 반성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감옥 안에서, 쥐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마다하지 않고, 붓과 물을 이용해서, 수많은 글자들을 연마하였다. 비싼 것을 먹다 보면, 사람이 비싼 사람이 되겠지만, 나는 가끔 굶고, 그러나 때로는 몰래 가져다주는 음식들로 인해서, 고국에서보다 많은 것을 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인정에 굶주린 내가, 다만 외면만 하여도, 쉽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위협하는 이는 있어도, 여행 때보다 편안하고, 오래 눕고, 오래 자고, 오래 책을 읽고, 오히려 생각이 깊어지고, 구약 성경까지를 통달할 수 있었다. 가끔은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귀신에 들린 척, 나를 구경하러 오기도 하였다.
수년이 지나, 나는 아름다운 장자가 되었다.
교육이 아름다운 도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혹은 그런 이유로, 미래의 아이들이 죽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나의 흰 종이 위에 오르는 것으로만 보이는 것이었다......
인간적으로는 수상한 죽음이나,
.......
성경에 아무런 동방의 해석자가 없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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