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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몇 개의 공식이 있다.

by 마음대로다 2020. 8. 6.

몇 개의 공식이 있다.

 

 

 

 

 

 

 

전쟁은 아니다는 전쟁 분위기가 좋고, 내가 썼던 무수한 글들과 연관된 것이 좋고, 거기에 대해 사람들은 레포트 수준으로 쓰는 글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으면 좋은 것이다. 지금까지 내내 그러했다. 우리가 얻는 것이라고는, 그와 같은 간접성이고, 불쌍한 태공조 뿐이다. 그것이 안주가 되던지, 아후라마즈다가 되던지. 어째서 사람들은 무수한 레포트 수준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인가? 어딘가에는 수달이 작은 악어들을 잡아먹는다는 강변이 있다 하는데, 거기의 모래들처럼 보이다가 사라지는가? 그나마 쿵푸 영화의 한적한 대결의 장소에다가, 거기의 풀과 나무로다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가? 그렇다면 레포트 수준 이상의 것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흰 비닐을 머리에 쓰고, LUTE, 나머지 사람들이 쓸려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흰 비닐이라도 부지런히 쓰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거의 모든 글이나, 말, 그리고 기사나, 드라마들도, 그들이 주자의 정치학, 고고학, 신현균에게 달라붙고 싶어서가 아니라, 달라붙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흰 비닐을 다만 썼을 뿐인데, 그것이 거의 모두, 내가 죽지 않고 썼던 말과 글들의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썼는가? 실상은 내용이 그렇게 방대하거나 많지 않다. 어린 시절에, 우리에게도 일본처럼 돔구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비가 와도 학교에 갔으나, 비가 오면, 야구를 그래도 한다 해도, 불쌍하고, 축구는 정해진 시간이 있어서, 강행하지만, 야구는 파울만 계속되고, 비만 계속 맞는 시간이 있으니까, 보기가 안 좋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고척 야구장이 생겼지 않은가? 그것은 흰 비닐처럼 생기지 않았다. 누구는 총구 끝에서 나오는 연기라고도 하는데, 너무 오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그나마, 사람들이 사탄, 그러니까 분토의 대지에 있던 것을, 사탄의 왕국에서, 지상으로, 태양 빛을 보게 하는 것으로 이끈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그림자, 회색 그림자가, 사탄으로 이끄는 길이었고, 힘이 없는 흰 빛은 늘 언제나, 저녁이 되어 잡아먹히니까, 사탄은 자기들의 심복으로 보았던 것이다. 히브리서도 그렇다. 백양사도 그렇다. 사람들의 흰 비닐이, 머리에 쓰는, 선을 위해 노력한 적이 없고, 선한 마음은 조건이 되면 금방 동이 나는 것이라고 하면, 티비라는 흰 비닐에 온 마음이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도 그렇다. 사탄은 대놓고, 베이루트 이번 사태처럼, 자기들이 소련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자본주의 경제로 만들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사탄이 그나마 주자를 역사의 주축으로 만든다고 하였는데,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탄이 권력적인 자부심으로써, 주자의 편에 선다고도 했는데, 사탄의 사람들도 비슷한 프레그머틱 테러리즘적인 신앙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파리가 있기도 해서, 밥상의 반찬이나 국, 밥, 그런 것들을 잠깐 덮어놓는 천 뚜껑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집의 실제 지붕처럼 생겼었다. 내가 세계에서 유일한 정수가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시절의 등하굣길이 그립지 않을 수 없는데, 코스모폴리탄들은 늘 경험하는 것일 것이다. 삶이 괴로운, 여자와 재산이 없는 내가 있고, 자기들은 숱한 의무가 있대도, 때로는 밥상 뚜껑 같은 집으로, 맛있는 냄새 나는 곳으로, 돌아들 가니 말이다. 그러니 그와 같은 서울 바깥이 좋은 것이다. 그것은 나도 그렇다. 식인종과 같은 사탄이 그와 같은 지붕 뚜껑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고, 그에게 칼이 있으면 칼을 들 것이고, 총이 있으면 총을, 무슨 게르마늄이 있으면 게르마늄을 들 것이다. 오일팔이 있고, 공수부대 것들이 도청을 공격한달 때, 그와 같은 총소리가 별로 크지 않는 광주 시내 곳곳에서 들릴 때, 나는 누나가 덮어주는 이불 속에 있었다. 어린 마음은 이불은 이불대로 덮고, 도청으로 달려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탄은 인간이 뚜껑을 드러내면 단순해진다 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인간도 그와 같은 시간에는 단순해지는 것이다. 오일팔 이후로 나는 잔잔한 광주의 주인공이 되었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에는 수학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기리는 최고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티비 문학관을 보면, 숱한 나에 관한 에피소드와, 주워들은 것과, 대중 노래 같은 것들도, 미래에 대한 희망 사항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적차량은 반드시 단속을 당하니까, 사탄의 형식에 호응한 것이라고 도 볼 수 있다. 숱한 양적 현상은, 스스로의 외부적 관계 속에서, 없지 않아 내부적 관계와 형식을 갖게 되는데, 그와 같은 외부와 내부의 연속성과, 기의 순환에 의해서, 시간의 질적인 순서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장은 대단히 헤겔적인 느낌을 주지만, 의도를 선명하게 하려면, 문장과 의미의 문법이 이와 같은 말의 빛깔을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직 헤겔만이, 그와 같은 내외부의 관계적 순항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고척돔과 같은 어린아이의 꿈에서, 앙드레가뇽, 한이 없었고, 아키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비참하게 주인공이 죽었지만, 나는 그 때문에 비극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베이루트가 아무 이유 없이 폭발 사건을 경험한 것 같아도, 한류 드라마와 관련을 맺고 있고, 나의 글에도, 사도의 후예에도 반드시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사도 세자가, 다만 스스로 사도 세자라고 부를 때는, 그것이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것 같으나, 이처럼 외부의 고통스러운 폭풍에서는, 바로 그 사도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를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히브리서를 보면, 구약의 욥기도, 신약과 더불어 나중에 쓰여진 것인가 싶다. 창세기도 그러하다. 주자학이 있고, 뒤늦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첨언된 것 같기도 하다. 동생 아벨을 죽인 사탄의 자랑을 사람들이 고대의 이야기로 신봉하자, 도리어 아우의 잘됨과 그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 사랑 같은 것을,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 겨우 보탠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르네상스맨이 된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히브리서의 내용을 보면, 그와 같은 정신분열이 있다. 그리고 주자나 기자를 향해, 늘 아우들이 죽고, 사람들이 죽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들의 성경이, 사탄의 흰 비닐, 헛바람의 연속이 아니라,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 구원의 역사의 증거가 도리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조와, 흐름과, 전개가 있는 것이다. 대신에 문장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읽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에는 당장에, 야고보서와 베드로서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자기 동생 마가를 가리킬 때는,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만이 아니라, 넉살도 필요하고, 어크로스더 유닐버스 하는 마음의 넓이도 필요한 것이다. 어째서 믿음이, 활자 그대로이며, 사탄의 헛 비닐 같은 것이겠는가? 어째서 믿음이 무조건 두렵고, 떨리고, 떨리고 두렵고 하는 것이겠는가? 어째서 믿음에는 어린아이가 없고, 학교가 없고, 첨언이 없고, 철학이 없고, 사람의 죽음이 아닌, 먼저의 사도의 편지에 대해, 스스로의 능력과 판단을 드러낼 욕심으로 쓰는, 신약 성경의 편지가 없겠는가? 우리가 그렇지 못한 것은, 그런 것조차 두렵고 떨리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사탄의 부지런한 동작 때문에,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병에 걸리게 되어 있다. 안정하고, 이삭 같고, 에서 같고, 장남 같고, 예수 같은 사람만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늘 언제나, 무조건 절대적으로 두렵고 떨리는 병에 걸리는 사람들도, 도리어 얇은 것과 사탄 돌의 물리적 궤도를 달려, 참된 빛과 소망에 이르는 사람들도 생기는 법인 것이다. 히브리서가 사도들의 전통이 하나도 없고, 오직 성경만이 있는 때에, 중국의 황제였다가, 그에 의해 쓰여진 것이고, 다시금 천년이 지나, 그 속사정을 모르고, 문법적으로 불만을 산 어느 동서양의 구분이 없는, 대단히 생각이 바르고, 빠르고, 동작이 선명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야고보서인 것이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구원이 없다. 어째서 그런지는 도리어, 기독교인은 이해가 분명할 것이다. 에서도, 야곱도, 룻도, 다윗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 다윗의 후손인 예수와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궁창이 무엇인지 설명이 없고, 선악과가 어떤 과일인지 설명이 없다. 벗은 몸을 가리는 것이, 추운 지역으로의 인간의 진출인지 하는 것에도 설명이 없다. 그 모든 것의 끝에는 불분명함이 있고, 아름다운 이를 괴롭히는 첨단들이나 있는 것이다. 드라마나, 폭동, 폭발, 총기 사건들. 우리 인간은 사탄이 최종에 이르러 준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동시에 더더욱 그 끝에 이르려고 노력해왔다. 베드로서의 기자가, 새로운 불분명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아 하는 것은, 차후 요한서의 분위기이고, 요한계시록을 가로지르는, 마지막 언급이 분명한 것이다. 훌륭한 요한도, 춤추는 소녀보다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서는, 글이 머리에서부터 분명하고, 그것을 발성하는 목이 아주 두꺼운 인자가 엿보이고, 동시에 의로우면서도 춤을 잘추는 여자가, 수가성 출신의 가수가 엿보이는 것이다.

 

 

요한서에서는 세상의 현상이 있고, 사랑이 있다. 질서라고 하기에는, 무질서한 편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실험실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것의 특징은, 중국 접경 지대에는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의 모든 지리 지역, 국가들의 심부에 있고, 거기서부터 전선에까지 나오자면, 늘 알 수 없는 사태가, 전염병, 도시의 화재, 살인사건, 그런 것들이 이동에 관한 물리적 법칙처럼 발생하는데, 다른 기자 피라미드들은 꿀먹은 벙어리이지만, 뉴욕 타임스 같은 데에는 그것들이 보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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