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무엇인가?
나의 서울 사람들은, 고향이 없다. 경기도를 갔을 때, 아름다운 풀들을 발견하고는, 좀 더 아름다운 나무를 발견하고는, 이것이 나의 고향인가 한다. 그것은 이호선 까치산을 발견해서도 그렇다. 숱하게 지나기만 하면, 그것을 부모님에게 반복하고 나면, 왠지 모르는 그리움이, 알 수 없는 것이, 일제 시대의 사진이나, 육칠십 년대 우리 사진들을 보고 생기는 것이다. 삼촌들이 콘서트를 열면, 사람들이 쏟아질 듯 몰려드는 것은, 그것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가족주의적 성격 때문이 아니다. 원래 서울 사람들만 그랬었는데, 지금은 읍면동의 시골 사람들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것의 존재는, 지금과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에, 그중에 누군가는 우리들의 훌륭한 의사 선생님, 간호사인 것 같고, 실험실의 연구원 같고 해서인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범주의 사슬에 메인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강을 보고, 다울랜드가, 플로우마이티얼스 한 것인지, 칙칙한 템즈강을 보고,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존재는 빛과 같고,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학생만큼 빛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없다.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신학생이 드문 만큼, 마치, 미스코리아를 아내로 두었는데, 나중에 아내의 이력을 보고, 도리어 멀리하는 이상한 성격의 사람처럼,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신학생은 드문데, 관심을 무의식적으로 갖다가, 총신대, 감신대, 심지어는 한신대마저도, 이름은 김주은, 차은우, 그렇게 짓는다고 해도, 존재의 철학에 대해 의식적으로 관심하고 사랑하고 하는 사람은 드문데, 마침내 서울 가난한 누나의 집에 들른다는 명목으로, 그와 같은 한신대 학생이 한강을 건너고, 다시 한강을 건너는 것처럼, 슬픈 광주사태 같은 일이 없는 것이다. 아롱사태라는 것은, 그와 같은 한강 철교의 소리가, 너무 아롱져서, 정신이 혹세무민 해진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말해달라는 사람의 요청에 따라, 허쉬에서는 허쉬하게 되고, 자꾸만 낮인가 밤인가 하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은 전 지구적인 정신의 사태에 문제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눈앞에는 익숙하지만, 김약국의 딸들처럼, 그것의 포네틱한 느낌, 막상, 막삼, 그것을 내 생각과 말로써 언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는 세상은, 존재를 분명 지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성립시키지 못할 뿐. 어딘가에서, 아주 단순한 에세이적 주제를 갖고 노래하는 것이다. 샐러드와 김치는 얼마나 먼가? 고춧가루를 임진왜란에서부터 사용했다는 것은 별로 믿고 싶지 않다. 그것은 시간의 역행적 판단에 대한 존재론적 입화라고 할 만 한데, 김치는 단군왕검이 즐겼을 정도로 붉은색이 아름다웠던 것이다. 잘 익은 김치가 김치인가? 겉절이가 김치의 한 축인가? 하는 논쟁도, 노래도 그렇다. 샐러드 없이 김치는 살 수 있으나, 김치를 알게 된 다음에는, 샐러드만으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배추김치를 막아낸 다음에는, 깍두기를 어떻게 당할 것이며, 우리는 진지하다, 정육각형의 입체 깍두기는 막아낸 다음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석박지 같은 것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한국은 다만 김치 국가로만 있어도, 이렇게 위협적인데, 마침내 자동차 회사가 생기고, 대학이 생기고, 신문사, 그러니까 존재가 생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끔찍하지 않겠는가? 존재는 그렇게 위협적인 관계 때문에, 더더욱 존재가 된다. 자주포와 같은 사거리를 두고, 둘이 좋아 터지면, 사귀는 것이다 누군가 새로운 형식의 컴퍼스를 돌린다면, 이거 한잔 마시면 둘이 사귀는 거다 하면서, 누군가 왕컵 소주잔을 들이민다면, 우리는 사귀기도 전에, 정신이 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뜨겁고, 가장 기상적이며, 가장 여성의 신체와 같은 문학을 하는 시기라고, 햇볕 쏟아지던 나날, 어느 중국 영화 제목 같은 때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둘은 다소 냉랭한 시기를, 그와 같은 생각으로 지금을 버티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뇌로도 갈 수 있고, 성기로도 갈 수 있으며, 세포로도 다시 하강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책으로도 갈 수 있고, 그것의 알파와 오메가와 같은, 시계, 시로도 갈 수 있다. 그러니까 김치는, 대나무 숲의 소리 같고, 죽음을 파고드는 기와만 같다. 젊었을 때는, 술안주요, 가난한, 나이가 들어서도, 나의 영원한 친구인 것이다. 파고드는 인문학으로, 감자 된장국 안으로, 나는 멸치처럼, 하나의 시니피앙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 존재가 하나가 되는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이전의 존재들을 비존재로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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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영화를 보고, 사회 생활을 준비하고, 눈이 내린 대학을 다시 방문하다 보면, 교수님이 반복을 하는지, 아니면 그나마 올해는 멋진 논문을 발표하는지 모르는 시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처음으로 존재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교수님은 페넬로페처럼, 문학 교수는, 교수 연구실 안에서, 전쟁을 통해서, 자기 옷을 직접 짓고 있다. 그렇지 않은 비존재들은, 파르메니데스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모두가 세로획에 습관이 되고, 모두가 가로획에 인이 박힌다. 모두가 아무렇게나 십자가를 그리다가, 그러나 그것들 모두를 화해시키는, 마지막 불가능한 소수는 굴복시키는, 우리들의 눈이 사라지지 않는 이성계 장군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장군들이 이름이 있어서, 이성계 장군은 이름이 여자 같은 것이다. 존재는 이성적이고, 사랑은 이성적인 것이다. 그와 같은 오피니언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노래에서나 겨우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가리키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가리킬 때 가장 고통스럽다. 그들은 독립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머리에 상투를 트니, 그들은 이상한 머리 모양을 했다. 한국이 아름다운 기와를 집으로 삼으니, 그들은 이층 목조 주택을 짓거나, 보다 독립적이고 높은 것으로 성채를 삼았다. 중국이 한국을 가리킬 때는 거의 종말에 준하는 비철학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짓지 않은 황하와 장강마저도, 그렇게 북으로 흐르는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전에 기록되어 있고, 예언되어 있다. 어쩌면 그와 같은 노래는 너무 많다. 그리고 영국이, 영국이, 한국을 가리킬 때는, 사람들은 수가성의 여자처럼 도대체 얼마나 많이 결혼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가짜 결혼과 같은, 알파와 시계, 시간을 보낼 정도로, 능숙해지게 되면, 학생 때에 현균과 몇 시간이곤 찻집에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는 진실했고, 현실로 미끄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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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존재 아니면 폭력이라는 과장된 세계 지도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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