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바퀴 반의 국가
일본은 지금 식민지의 위기에 처해있다. 그것은 옷을 벗는 모습이라는 뜻의 광해와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광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어린 나이에도, 내가 가난하고, 누군가도 가난하구나 생각을 하였었다. 친절한 금자씨의 음악을 들으면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오대수와는 다르게, 금자씨는, 잘 모르겠는 것들의 연속이 있다. 우리가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알고 있고, 마산과 부산을 민주화의 성지로 알고 있듯이, 두 성지, 그러나 일본의 후쿠시마, 돗토리, 산케이들을 극우 보수 빨갱이로 알아야 할지, 아닐지, 오뎅을 먹을 때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것과 같고, 그것이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면, 차라리 만나게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 막상 차를 몰고 가다 보면, 금세 위화도 회군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화 중에 그런 영화는 본 것이 없고, 대부분 살인자들이 살인 영화를 따라 한다는데, 남과 여의 것 중에는, 숱한, 그런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금도, 쓸쓸한 에세이의 전후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과도 친교하여 봤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었고, 나중에는, 버블경제시대 때에는, 거의 동양의 미국이라 불릴 만한 체격과, 건물, 잡지 체계, 드라마와 영화 주인공들이 있었다. 그것이 작품들끼리, 나이트클럽에서, 물관리를 잘했을 때는 그러했다. 그러니까, 국가는, 표상에 있고, 국가가 밀어주지는 않아도, 생산되는 영화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로 벗, 그것은 친구, 나의 단편 소설 일본 영화에도 거의 모든 영화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할까? 그것은 공부를 못하고, 낙향하는 사람의 마음이 표현된 소설이 없어서일까? 그런 일본인 참 진짜, 진구가 없어서일까? 드디어 나이트클럽에, 날씬하지 않은 이들이 출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본은 나의 시험에서 통과하는 사람이 없고, 매우 일본인을 닮은 금자씨 앞에서, 어린아이들이 되어가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우리나라는 영화를 아무렇게나 만들고, 사람들이 딱 영화배우처럼 그것을 좋아하는 지혜를 가졌다. 내가 너무 자기들 옆에서, 꽉 잡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그와 같은 센서가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영화의 인물에, 자기의 죽음처럼 차고 넘치는 순간을 저애하는 편이다. 일본은 그렇지 않아서, 일본은, 나의 일본은 그렇지 않아서, 자기들의 시간에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적 이상향이라는 것은 그래서 발생하는 것일 수 있다. 존재가 자기를 부정하고, 차고 넘치는 순간을, 받아주는, 도올의 표현을 빌리자면, 붕어빵 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한국인은 마치, 그와 같은 일본인의 지옥과 같은 전경이라 불릴만하다. 작은 사금을 가리켜, 금이 있다, 금이 많다 할 수 있겠는가? 작은 사금을 가리켜, 가루와 같은 것을 가리켜, 어느 때는 금이 많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잠깐 동안의 일본 여행 붐이 그러했다. 죽음에 많이 기울어있지만, 한국의 정신과 교육 종교 체계를 꽉 잡고 있는, 평화주의적 대사상가인 나의 눈치를, 사람들은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슬픈 눈이 내리는 날에는 더욱 그러해서, 사람들을 일본으로 많이 여행 보냈던 것이다. 사람들이 죽도 밥도 많이 다니고, 오가면, 탈이 반드시 날 것이다, 탈레스, 중간 권력자 아무개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것에 가까웠고, 그것의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오 년 육 년은 어마어마했다. 아무런 탈이 나지 않았다. 훼스탈. 혹은 플라톤. 플로티누스. 일본인들은 한국에 갈 수 없었고, 대신에 한국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 친절한 금자씨들 같았다. 말도 많고, 정도 많고, 사진도 많이 찍고, 일본인들에게 영어로 말 걸고, 한국어로도 말 걸고, 일본인들에게 일본어로 말 걸고, 도톤보리를 그렇게 꽉 채우고, 교토를 가득 메워도, 아무런 아리스토 탈레스, 탈이 나는 것이 없는 것이었다. 시골로. 시골로. 꼭 미국 이민자들에게 고 웨스트 했던 것처럼. 시골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람들은 국가 정치적인, 갈등과 경제, 그런 낮은 수준의 사람들보다는, 마치 독일 철학적인, 그 자체의 사람들이 많았다. 젊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스쿠터를 타고, 죽음처럼 혼자서 여행을 할 때는, 그들을 보내고 난 뒤의 시골 사람들은 많이 허전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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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요요기 체육관에서 대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요기요, 배민, 이마무라 교수, 산케이 교수, 하루미, 그리고 나였다. 사람들은 야광봉을 나눠주는 사람이 없어서, 집에 있던 것을 가지고 와서, 관중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간은 식민지가 적합한가 하는 천둥번개와 같은 기조 연설은 사람들을 기생수처럼 잡아먹었다. 자기들이 과거에 한국을 식민지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은 지금 시기인데, 다시 봐도 믿기지가 않는 것이었다. 다만 세계대전을 치렀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 과정들도 애매모호하고, 이마무라하고, 산케이했던 것이다. 야마토 교수의 그와 같은 발언은 그러니까, 전격적인 것이었고, 국가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대단히 현상학적이었고, 실질적이었으며, 나의 투쟁과 김의 투쟁을 이어받는 예언자 전통에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마이크를 들고, 식민지는 싫다고 답하였다. 야다 했다. 야다 했다. 관중들 여기저기에서 이구동성으로 야다 했다. 한 무리의 외국인 흑인들이, 그 뜻을 알았으니, 그만 진행하자고 했다. 그리고 패널들로 있던 사람들도, 다만 가정이고, 가정법, 에스에프적인 상상이니, 너무 흥분하지 말자고 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아름다운 산에 있었다. 야마. 도야마. 나는 친구가 많았고, 덧없이 서예하지 않았다. 나는 바른말을 하였고, 상대의 가난을 산파술로 읽고, 상대의 존재를 산파술로, 그런 어떤 기술로써 드러내곤 하였다. 그러면, 그들에게 씌워있던 귀신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사라지고, 자기에게 없던 피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페다고지컬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에반젤리컬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여졌으나, 어떤 사람은 그들의 암과 함께 사라지곤 하였다. 그러니 암으로써 지금까지 병행하여 살았던 것이다. 나의 손을 잡고, 자기가 암인지,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만약에 사라진다고 하면, 그래도 자기 이름을 흰 종이에 한 번이라도 써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겠다고 했고, 몇 개의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들 중 몇몇은 실제로 암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암일지라도, 눈은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동해의 고래 같았다.....
미국이 독립하였고
독일이 독립하였으며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였다.
영국이 한국과 손을 잡았다.....
나의 장시간의 발표에도, 세상의 모든 에세이 같은, 사람들은 죽은 듯이 있었고, 누군가 옷에 오줌을 누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들 눈물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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