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테트라
우리는 어떻게 수준이 없으면, 북조선이 되고, 어떻게 해야 주자와 드라이아이스, 남한에 있겠는가? 그것의 대답은 블랙 테트라가 해줄 수 있다. 우리는 박정희 정권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박봉성의 신의 아들이, 무너뜨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블랙 테트라가 먼저 무너뜨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은 예술을 먹고 자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술에 묘한 상처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예술로 사랑하고, 예술로 기쁨을 얻고, 예술로 신학을 얻는, 그런 예술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 위화감을 얻고, 예술로 자기들 계급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예술로 이상한 말장난을 서로 용인하기도 하고, 용인자연농원, 예술로 조선은 성리학과, 어떤 붓글씨, 그런 것들의 과거시험, 잔인한 왕조실록과, 끝이 없는 여름날의 매미 소리를 얻었던 것이다. 예술로 값비싼 예술대학에 들어가기도 하고, 돈이 없어 못 들어가기도 한다. 예술로 주자에 대항하고, 예술로 사탄으로도 허용이 되고, 주자에게도 허용이 되는 것이다. 오직 그 알 수 없는 예술 때문에, 도대체 예술이 뭐길래, 사랑이 뭐길래, 그런 중간 접경 지역 같은 것이, 카쉬미르 지역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와 같은 예술로 존 레논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젊어서 촘스키는, 총명하다는 느낌인데, 논문들이 뭔 말인지는 잘 몰라도, 늙어서의 촘스키는, 얼굴에 검버섯이 일어난 것 같은, 핀커스 주커만 같기도 하다. 얼마나 이와 같은 지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술성을 잃겠는가? 나의 말에는 다소 예술적인 흥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아주 고지적인 인간들은, 나의 말에, 옆에 있는 사람의 무릎을 탁 하고 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시간 낭비가 없이, 참 예술도 하고, 기회가 되면 사탄과도 싸우고, 한국 사람들에게 홍익인간 이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블랙 테트라, 구름과 나와 같은 멋진 젊음이 될 수 있겠는가? 나이가 들어서도, 마음이 젊다면, 젊은것이라는 어떤 옛날 티비 씨에프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상한, 에코 소리, 어떤, 죽기 전의 유언 같은 느낌. 그런 것들을 계속 눈물 젖은 빵처럼, 틀어주니,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은 진정, 블랙 테트라 같은, 조금은 진일보한, 조선일보, 한겨레신문보다는, 아름다운 인간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유언 같은 장난이, 우리에게, 진정 먹혔던 것이다. 감기 조심하라는 말. 판피린 에스 같은 말.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메시지가 되고, 테트라가 되고, 아름다운 블랙이 되고, 때가 되면 늘 초콜릿이 되곤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한국 음악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는다. 김창완도 일조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블랙 테트라는 김창완의 알 수 없는, 콜라 김빠진 것들의 영향을, 나름 비판하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이 블랙인 것
사람들이 그 쪼그만 아이가, 역사의 지시체가 되는 것을 두고, 행여 어린 주자의 현신인가 싶어서, 과거 주자의 뒤늦은 재생인가 싶어서, 대원군인가 싶은 늙은이를 한 번 붙여보기도 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집에는 먹을 것이 없고, 사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공동 빨래터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데, 옆에서 나이 먹은 어떤 조선 사람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었다. 어떤 자기장 같은 것. 그런 권력장 같은 것. 그런 것을 알고, 이용하고, 실험하기도 했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나도 그 말들이 영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인상이 있었다. 그래서 별로 걷는 속도에 변화가 없이 그곳을 지나칠 수 있었다. 행여, 그들이 있을까 싶어서, 다음에는 다른 길을 택하기도 했었다. 그러면 어떠한가? 그에게 상이 있겠는가? 아니면 얻어터졌겠는가?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하는 무리에 얻어터졌을 것이다.
내가 누구일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주자의 현신일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오대양 사건으로 그들 무리가 모두 죽을 때까지, 나는 두고두고 회자가 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아이가 대체 무엇일 수 있느냐고 말이다. 북한식의 표현법처럼, 백두대간, 그런 순수 동물 혈통 같은 것인가? 천수관음은 그래도, 봐줄 만한 것인데, 천족관음은, 정말이지 사탄의 혈통 중심을 향해 날아가는 미사일만 같다. 내가 누구일 수는 없고, 다만 어린아이가, 생각이 바르고,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모든 가능성이다는 생각으로 중지가 모아졌을 것이다. 주자는 책을 읽고, 생각도 바로 하고, 친구들과 재밌는 말도 많이 해야, 참 주자가 될 수 있다. 주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삐끗하고, 책은 살 수 있어도, 이상한 책을 한정 없이 읽고 있으면, 주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으로 넘어가면, 당연히 좃도, 그러니까 조선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북한으로 어떻게 넘어가는가? 그것은 이상한 유물론적 물질주의 같은 것. 철학의 맹점 같은 것. 유물론을 주장하니, 자본적 유물이나, 국사학적 유물에까지도, 그냥 똑같은 카멜레온 유물론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의 협착이나, 육보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티비가 드라마를 만들고, 사람들이 티비를 좋아하니, 계속해서 사람들을 거기로 쳐 집어넣는 것을, 자기들 흉물들을 위로하는, 중국 흉하지 않지? 서로 묻는 괴물들의, 흉노의 길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으로 넘어가려고 해도, 실질적으로 드라마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주자가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는데, 대학교 기숙사에서, 중간 휴게실에서, 드라마를 보려고 하는데, 주자가 그냥 방에서 나와서, 그 오대양 식구들을 참살시키고, 자기도 그중에 있었던 사람이, 주자가 그냥 방에서 나와서, 화장실을 들렀다가, 방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가볍게 인사하고, 드라마 보느냐고 하고, 같이 볼 줄 알았는데, 드라마 보느냐고 하고, 서로 반가우니까, 인사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가? 주자가 사라지면, 드라마는 순식간에 사탄의 소유가 되고, 손이 뻗어나와, 그 학생의 머리를 잡고, 몸을 잡고, 끌어당겨, 자기들 동물원으로 넘기지 않겠는가? 말은 그중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일반성의 영원한 오류에, 나도 꼼짝없이 있는 것이면, 그런 이들이 심심치 않게 있는 세상이란 것이면, 주자는 다소 어류일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실험실 중에서, 인간이 돼지가 되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에도 나오는 것처럼 굉장히, 그런 왕립 실험실 같은 것은 흔한 것이고, 인간이 어류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을 의욕하기 위해서는, 장비가 굉장히, 삼국지의 장비가, 관우가, 그런 것들이 복숭아 농장 결의 같은 것들이, 장비가 굉장히 산처럼 많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뿐 아니라, 블랙 테트라는 그 제목만으로도, 드라마 동물 농장의 계보에서도, 섬광과 같은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살다가, 우연히 존 레논하는 것은 일도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 정권에 살았어도, 그처럼 사탄의 역사에서 보면, 굉장히 찬란한 시즌과, 아름다운 계절, 훔칠 수 없는 절대의 미학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블랙 테트라는 더더욱, 블랙 운동 같은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보인다. 그것의 강령이나, 어떤 동질감, 항상 얼굴이나 피부색이 변하는 것들에 대해서, 결과적으로는 매우 무관심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러니, 사탄이 돈을 주고, 한국의 권력 계통을 얻어서, 블랙 테트라 무리를 시험했을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 이상하게도 나도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늙은이가, 자주 그런 소리를 질렀던 것 같고, 나는 영향을 받지 않고, 시끄럽고 더럽다는 인상으로, 그 조그만, 착한, 테트라 같은 아이가, 내 갈 길을 갔던 것이다. 사탄의 속성 중에는, 적이 아니면 친구로 만들라는 것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피라미드는 사람들이 아주 빼곡하고, 자기들의 속도에 집어넣으면, 그들 세상에는 원래 아무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정신을 존경하는 무리도 있을 수 있어서,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처녀 숭배 사상 같은 것도 있는 판에, 어린아이의 정신을 존경하고, 따르고,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그런 집단이나 철학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서, 예쁜 효도 그런 무리의 일원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자기와 같았는데, 대학에 이르러서, 생명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죽을 위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고, 지금 사람들은 상어 노래를 부르면서, 간접적으로 찬양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맞지 않고, 너무 상징 논리가 과하다는 느낌이 있다. 그래도 그렇게, 미국 법무부, 교도소에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친 듯이 노래를 틀어준다고 한다.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해서, 입으로 뜨루뜨루한다는.....
오대양 사람들이 죽었을 때
나는
그랬었다.
나의 마음은 슬픈
소금강산처럼 되었었다.
북한이 김정은 카드를 내민 것은
김정은이 나이가 어려서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의 정체 같은 것들이 죽을 때, 진실로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피라미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영화를 보고 기뻐하고, 책을 읽고 기뻐하고, 성경을 읽고 항상 기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의 영향이 모두 피라미드처럼 영원하고
다이아몬드는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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