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슬픔의 공각 기동의 원리에 대한 탐구
모든 것이 연기일 수 있지만, 쇼츠에서 본, 불교 유치원 동창회 같은 것일 수 있으나, 그래도 그것의 구조는 갑자기 선명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처음 한신대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로 만난 사람이, 한 사람은 선배, 다른 한 사람은 일 년 선배, 그랬었다. 한 사람은 경제학과, 다른 한 사람은 수학과였다. 그러니, 그때는 황량한 캠퍼스 풍경의 한신대에, 신학부도 아닌, 일반 학부 학생들이 대거 내 있는 곳에 침입을 한 셈이었다. 우리는 잘 지냈다. 말은 통하는 것이 없었다. 내가 책장에 놓은 책을, 자기가 읽었다고 말을 건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이 캠퍼스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른다. 그런 캠퍼스 영화는 사실 없었고, 지금껏, 행복은 그런 책장 위의 책의 순서는 아니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사실처럼, 그렇지 않은 뚱뚱한, 발랄한, 알록달록한, 캠퍼스 영화는 있었더래도, 내일 유학 가는, 모레 유학 가는, 그런 것은 있었더래도,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야, 이 책을 읽는단 말이지, 하는 그런 거수경례 같은, 책을 집다 할 때의 거, 책 수, 볼 경, 그것의 다할 례,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책은 지하철에서 마주보는 선을 볼 때, 남자끼리도, 누군가는 붉은색의 칠이 된 옛날 성경책을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말을 걸 수도 없을 만큼,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금강경이나 법화경. 그런 것들도, 다들 어찌 보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텔레토비의 테리토리 같은 것들이다. 한 사람은 지존파의 리더 같았고, 한 사람은 이번 외계인의 썬더 역을 맡은 사람 같았다. 내가 화성군에 있는 대학을 다니자, 그렇게 두 개의 바둑알이, 사람들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 김용옥처럼, 다가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다 연기일 것이다. 그러니, 접근이라는 포석이 가능한 것일 것이다. 정말 사람을 죽이고, 가두고, 가두리 양식장, 그런 것이면, 기동이 불가능하고, 대학에서 생활이 불가능하다. 둘 다 차분한 목소리를 가졌고, 둘 다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노를 젓는 운동기구를, 우리 나이 먹은 경제과 선배가, 갑자기 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나는 보기만 하고,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앞에서 두 번 정도 운동을 하였다.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그때는 당연히 그가 지존파의 리더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터미네이터 같은 상상력일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적당히, 즉자와 대자의 헤겔 논리학적 상관관계에서, 우리식 해석인, 즉자적인 상태로 이동을 많이 하였다. 그것의 기숙사 저녁 풍경은 아름답고, 나는 내가 무척이나 단단한데, 그래도 대단히 가끔 보는 사람이, 목소리가 단단한 것이, 한신대학교가 허명이 아니구나 싶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판단을 보류하고,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전우애를 느끼는, 우리가 전우라는 드라마를 보고, 이제는 별 생각이 없는 채널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수종. 그리고 다른 썬더 같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 배우, 수학과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쩌면, 내가 일 년 어리기는 하지만, 아들 같은, 허균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강원도로 가는 국도를 가다 보면, 무수한 흰빛의 건물들이 눈에 띄는데, 양수리, 심지어는 강촌까지, 내가 그들을 잘 몰라서도, 전두환적인 느낌으로다가 그들에게 강제로 채우는 느낌이 있었다. 원래 목사님이나, 전도사들은, 지식이 없기 때문에, 지식연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호적인 것이고, 상호 미안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독일식 친밀함의 극치이기도 하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며, 그것은 어쩌면, 한국 드라마 느낌이나, 설빙, 겨울 연가, 아침 햇살의 시작 같은 것이다. 두 사람과 처음에도 식사를 같이 하고, 학기가 끝날 때도, 식사를 같이 했다. 그리고 바람 부는 날에, 첫 번째 인간이 내게, 그렇게 강력하게, 학교 행정에 관한 불만을 토로하였다. 학교가 적극적으로, 학생들의 어떤 것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는 내가 만지지 않는, 노 젓는 운동기구를, 그가 만지는 느낌이 있었다. 내게 생각이 없고, 판단이 미진해서, 경계선 원리로 따지면, 내가 학교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의 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행정적 관심과 상상력을 지지했고, 나는 그들이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 덧붙이는 말이지만, 보통 행정이나 심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남이 하지 않는 자위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많은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남이 시키지 않는 일은 잘 하지 않는, 논리적으로 모순인, 자위행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가 내가 공부하는 방향과, 역방향의 사회적, 민간 사회적, 학교적 사실을 거론하는 것에, 적잖은 인상을 가질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내가 항구에서 검수원 일을 하다가, 다른 회사 사람과 분쟁이 있어서, 그런데 그와 같은 간부가, 다른 회사의 전화번호도 없고, 그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내 편에서 아무런 행정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나는 어쩌면 동일인처럼 보는 것이다. 그러니 외계인 썬더, 기계였다가, 인간이었다가, 그런 것보다 더욱 기계 같은, 깡통 같은, 야마하 엠티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부를 욕하고, 비난하고, 깡통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으나, 논리적으로 보면, 깡통이 깡통을 비난할 수도 있는 것인 것이다. 우리는 조국 통일을 조통이라고 불렀고, 조국통일 위원회를 조통위라고도 불렀다. 나는 푸마푼쿠의 그 이상한 석재처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끔찍했다.
우리는 그들이, 화성에서,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은하철도 구구구 행성 에피소드 원에서처럼 사라지는 것이, 다만 그래도 삼류대학인 한신대학이니까 그럴 수 있다 할 것이다.
서울대생들은 종교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리고 어떤 기억에 남는,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훌륭한 영화가 있었다. 김보연. 남상미 나오는. 그것의 변증법적 진행이, 그렇게, 안타깝고, 슬프고 그랬었다. 어제, 신해철 십주기, 불후의 명곡, 거기에서 노래를 불렀던 여자의 목소리, 약간 비슷했다. 서울대생들은 종교에 대해 정말 관심이 많다. 자기가 알려고 하는 것에, 아직도 지도가 생기지 않고, 그래서 남의 독도법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청년들의, 집단들의 대변이, 그래도 서울대생들에게 생기지 않는, 가로수, 그늘, 자기들만의 신작로, 사람이 보이는, 보이지 않는, 구석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그나마 깨끗한 집안 구석, 그래서 그 구석을 지날 때, 가슴의 횡경막이 열리는 듯한 파워를 느끼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상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로수가 옅어지고, 햇볕이 들기 시작하면, 남의 독도법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청년들의 대변 주장이 아니라고 한다면, 분명한 선명한 좌표의 전개 때문에도, 우상은 걸러내고,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가는, 구약신학적인 주화입마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대니까, 서울대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있다. 서울대에서도 공부하지 못하는 이들이, 유대인 디아스포라처럼 있는데, 나치즘이 찾아서, 가스실에 넣을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의 무리가 있는데, 그렇다면 서울대가 있어도 공부를 못하고, 그리고 서울대가 있으니까 공부를 할 수 있는 이들이, 다시 한번 그렇다면, 군산대가 아닌, 군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연기적인 진행이, 부모의 사랑 때문인지, 천은사의 은혜 때문인지, 거기서 심각한 정신착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의지는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과 같다. 남을 의지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귀신처럼 만들게 된다. 의지의 강강수월래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그래서 그렇게 의지할 만한 인간인 것이다. 이순신은 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인순이도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논리에 의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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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
호스텔 시리즈가, 이번에 유튜브로 본 것이 놀랍기는 하지만, 그것이 놀라운 것은, 매우 논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과 더불어, 외계인 일부와 이부가, 쳐부수고자 했던 것이, 그와 같은 오징어 게임 보고, 스포츠 토토하는 사람들의, 푸마푼쿠, 햄스터 쳇바퀴 같은 우주였을 것이다. 그 별 것 아닌 것도, 무사들이 네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의지할 때, 부끄럼이 없기도 하고, 마침내 논리를 의지하게 되면, 또한 마침내 잡변을 늘어 세우기 시작한다. 겨우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은, 라디오 같은 입각점이라는 것은, 호스텔의 영화처럼, 갑자기 몸에서 극심한 이상현상이 발발할 경우, 그것이 사탄의 지배에서 발생한 것일 수 있고, 백약이 무효이니, 사탄에게 충성하는 공동체적인 연기를 하면, 행여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논리에 비해서는, 매우 약한 것들이 되는 것이다. 방법론적인 선이 있고, 악이 있듯이, 방법론적인 사탄도 있는 법이다. 물론 그것은 법화경이 아니다. 그렇다고 반야심경도 아닌 것이다. 극심한 협심증이라는 것은, 초고대적인 것으로서, 그것에 대한 약은, 극히 최근에 개발이 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개발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약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의 한자 이름처럼, 생의 직접적인 벽돌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극심한 협심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아주 단발마적인 행동을 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하석상대 같은, 벽돌 돌려 막기 같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경험치가 매우 늘기도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이 팽창한 경험치는 별로 부러워할 것이 아니다. 이십대가 지나고, 삼심대가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늘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짓다가 만 여대 건물처럼, 경기도 어딘가의, 수 많은 사람들의 그래서 방문을 초청하는, 그와 같은 협심증은, 사탄과, 사탄의 연기와, 여자들의 아픔과, 일종의 핵전쟁의 핫라인처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남자는 공부하러 서울까지 가서, 아무도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 관계로, 광주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서 이십 년을 지내고, 아프니까, 인간의 정신은 벽돌로 이뤄져 있고, 그와 같은 조적 작업을 끝내고 나면, 다만 평범하고, 가난한, 시골 교회 전도사, 그리고 목사가 될 것으로 계획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번민이나 무거운 걸음은 있으나, 아픔은 따로 없었는데, 갑자기 그와 같은 공동체적 협심증이 찾아온 것이었다. 어느 날. 나는, 한 세 달 가까이를, 천천히, 겨울 눈 내린 무등산 자락을 돌면서, 시골길, 소나무길, 두 시간 가까이를 돌고 나면, 피곤함에, 겨우 협심증이, 견딜 수 없는, 그와 같은 상처에 연고전처럼 발라지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잠이 들면, 저녁에는 뜬 눈으로 지낸 것 같으나, 그와 같은 때는 잠깐, 두 시간을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이것이 나의 고통이 아니고, 생각과 의지의 시간이 약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일반적인 병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러니, 연결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 연결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할 것이다. 연결된다는 것은, 연결된다고 해도, 그와 같은 연결이 관념의 제어와 진행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것이 처음에 몇 개 있더라도, 반드시 감각의 힘에 높이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관념까지도 연결된다고 하면, 본질적으로, 그것은 사탄의 욕심일 뿐인 것이다. 톡톡거리는 감각은, 얼마든지 사람끼리 연결될 수 있다. 내가 남의 지식까지 연결되었다면, 가난한 내가 부자인 사람의 돈을 언제든지, 인출하고, 인출하지는 않아도, 먼저 그에게 연락하고, 또 다른 내게, 가난한 내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감각만 톡톡 연결되는 것이, 로또의 천공 같은, 그것이 생각의 전부가 되기에는, 사탄의 유혹이 유럽이나 아틀란티스만큼 거대한 것이다. 대신에 사탄은 그렇지 않고, 처음에는 감각이 연결된다는 것들을 유념히 보고 있다가, 돼지처럼 때로는 우리에 가두고 키우다가, 차도 주고 집도 주고, 직책도 주고, 관직도 주다가, 내가 좋은 글을 쓰면, 좋은 궁전을 지으면, 더 이상 다른 궁전을 지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 건축자의 눈을 빼버렸다는 어느 러시아 폭군의 에피소드처럼, 영원히 협심증에 시달리는 사탄의 고대보다 더욱 고대의 예술론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감각이 통했다는 이유로, 등이 갑자기 가려워서 길을 걷다가 참지 못하고 긁으면,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나를 보고 웃다가, 나중에는 울릉도 호박엿처럼, 그 중에 한 명은 눈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팔다리. 심장. 왜냐하면 심장은 하트이기 때문이다. 하트는 영혼인 것이고. 하여튼. 그렇다면 그와 같은 연예인 접경 지대에 살게 된 나는, 어떻게,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것은 시대의 비참이 되는 것이다. 과연 서울대생들이, 이와 같은 논리적 의지의 권력을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수십 년.....
서울대는 종교의 발톱에 낀 때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는 종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 한신대는 그렇게 영어를 공부했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이 매우 똑똑했고, 양심적이었으며, 맑눈 광을 가졌던 증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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