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와 절정의 일본창, 죽음과 한국 신사의 길항 관계에 대하여
현재 전문가가 없다. 이와 같은 학은. 학춤이라는 것은 다리 하나를 들고, 춤추는 것이다. 학권이라는 것도. 민중에게는 학이란, 머리가 조막만해지는 것이다. 콩을 한 줌 쥐어다가, 흰 종이 위에 놓고, 하나씩 번호를 붙이는 것으로서, 모든 콩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김용옥적 주장의 저변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비극이고, 비참이다. 그것은 우리가 철학책을 읽다가 맥락을 놓치는 경우 발생하는 것으로서, 단순 공부자는 학교의 정해진 루트를, 창의적 공부자는 읽을 때마다 캠퍼스 내 야외 음악당에서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들로만 연주회가 가득하는 것과 어마어마한 거리에 있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어쩌면, 저먼 아이디올로지를 공산당 엘리트들보다 날카롭게 읽었지만, 그들과 달랐던 것은, 그들이 읽지 못했던 헤겔과 그들이 읽지 못했던 포이에르바하가 있었던 것일 것이다. 몇 개의 관념적인 높이. 그리고 세력의 규합. 나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자기들의 진행 동력으로 삼는. 경제가 이 경제, 저 경제, 늘 새로운 재미와 유혹, 생산에 미쳐 춤추는 것이, 무슨 깊은 특별한 지배 세력의 철학이라도 있는 것처럼, 도리어 생각을 보태주는 오류. 삼류 사류 할 때 그 오류. 그것은 주자학적 독서의 주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나는 주희가 그렇게도 많이 독서에 관해서 설을 풀고 있는지 몰랐다. 여기서, 생각의 한 순간적인 여유도 허락지 않자면, 일본이 주자학의 본산이 될 수 있었지 않은가? 순자가 심판의 순자이자, 사랑의 순자가 될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한 인격적인 자기 반성. 그러나 일본 문학은, 야나기 무네요시는, 그렇지 않다. 야나기. 야나기. 그도 한국 사람인가? 귀화한. 아니면 한국어 공부를, 열살 때부터 스무살 때까지 한 사람인가? 행복한 상상은, 한국에서 공부를 일류로 하지 못한 불만자들이 자기를 대포 안에 놓고, 일본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지냈다는 이야기이다. 그와 같은 상흔은, 아 이런 말, 테제에 육박하는, 단 하나의 맞춰볼 수 있는 보물의 깨어진 상태와 같다. 어제 오정현 목사가 깨어진 그릇은 그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 했던 것처럼, 그것도 성경에 깨어진 바처럼 맞춰진다, 가족은 하나의 형상과, 그것은 형벌, 혹은 상벌, 작은 재산들의 행렬과, 내가 요즘 자주 쓰는 말인지, 그것이 낡아서 쓰지 않는 것으로 밀쳐지는 구석들로 구성된다 하겠다. 하나의 시작이 미미하고, 중간도 미미하며, 끝내 미미한 것을 직감하는 젊은이가 유혹을 받는 이야기가 그래서, 가문이 침탈 당할 때 두 아이를 하나씩 데리고 가면서, 훗날 둘이 만날 때 징표로써 옥환?을 옥편을? 맞춰보게 하자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삼매에 빠진다. 주체와 대상은 사라지고, 문예학에서 그와 같은 경지를, 감동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그 시절에 시위를 하면서, 전경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못했던 이유는, 전두환이 물러가라, 대체 무엇이었을까? 노동운동은 자가 발전으로, 발전의 순자학으로, 우리나라에 유수한 자동차 회사가 많은 듯이, 오토바이 회사도 어느새 기가 막힌 네이키드 하나쯤 만드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모나드와 모나드 사이, 얼마나 죽을 것 같은 단절이 있겠는가? 그러나 전두환이 물러가라 외쳤던 발성적 하제가, 카타르시스, 개인적으로 양승관이 대법관처럼, 아무런 자기 미세 모나드에서부터 각성이 없는 것이다. 노래는 노래고, 외침은 외침이며, 주자학적 독서의 중심은 독서의 중심이다 할 것이다. 우리가 충격을 받는 것은, 일본이 하나의 일자 상태에서 붕괴되는 것은, 우리의 옥편과 그의 혹은 그녀의 옥편이 맞는지를 맞춰보는 천년의 약속, 조선통신사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은 보편적인 문제에 제도적이지는 않지만 철학적으로 우리가 진입해서일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의 민중 물품의 관계는, 형상과 언급의 관계처럼 행복하다. 그것의 찰흙 같은 기쁨을 모르는 이는, 한국 사람도 아니고, 판타스 페리호의 드넓은 현의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문장이 나아가면, 그것은 순식간에 추문이 된다. 행동은 과해서는 안되지만, 가끔은 말은 과해도 된다 하면, 음침하기까지 하다. 대개의 필자는 조명에 어울리지 않다. 우리가 출판 산업이 이리도 발전했지만, 영화 산업, 방송 산업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하나가, 글을 계속 쓰는 하나가, 밝은 빛 속에서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웃고 떠들고, 시나리오는 재미를 끌어안고, 느슨했던 분위기를 함께 큐하는 집중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해석자는 조명이 뭔지 모른다. 야나기는.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 사람이라는...... 쓸데 없는...... 가난 중에 단 한 사람, 그것도 돈 받고 물건 주는 평범한 옆집 가게라는.......
반대의 방향도 여실하다. 이것이 핵심이고, 우리가 비난의 체액적 기쁨에만 내몰리는 것이 주자학의 장자가 아니라는 각성자일 것이다. 각성한 사람의 의무일 것이다. 야나기는 유학자이다. 일본에서 자랐고, 유럽으로 가서, 그 외로움과 따돌림 속에서도, 독일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우리는 그렇지 않은가? 조선의 물품과 야나기의 언급처럼. 그것의 중학교 선생의 다시 언급은 참으로 정당하며, 한 번 언급에 교실에 피자 한 판, 가능한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려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해남 대흥사에서 지내고, 다른 사람들은 출퇴근한다고 어느 누가 기상하겠는가? 내가 해남에 갈 때마다, 내가 남쪽 지역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갈 때마다, 산과 강은 이상한 너울거리는 구름들을 보여준다. 때로는 멋있고, 때로는 멋있고, 때로는 무섭다. 갈 때마다 그러니 원. 院. 대흥사에서는 한 무리의 후발대가 있었는데, 내가 보다 안쪽으로 대흥사를 보고 나오자, 아무도 없었다. 유에프오가 무서운가? 불꽃처럼 올라가는 듯한, 하늘에서 하늘로, 구름이 무서운가? 야나기의 책은 약간 독점적인 데가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이 수준이 미치지 못해도, 반드시, 꼭, 구입할 만한 책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나드가 가능하다. 굉장히 호소력이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음악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나면,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신학과 철학의 새컨더리들은 떨어져나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기의 진심이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 에머네이션 되는 것을 기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정말이지, 혼다, 클래식 음악의 힘이고, 문화적인 파괴력이다. 우리 식의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한국 영화 가을로를 보면서 우리가 묘하게 잘 어울리네 하는 것도 비슷한 이치이다. 고향은, 창자가 그만 다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사회 생활 속에서도, 학교 이후, 예쁜 여자가 절로, 저절로 걷듯이, 걷는 것에 있다. 여래장이 그곳에 있으면, 그곳이 고향이고, 보디샤트바, 그가 혹은 그녀가 이곳에 있으면, 이곳이 고향이다. 전화로써, 저기 어디쯤에 있다고 하면 그곳이 고향이고, 오대수처럼 날개만 남기고, 비를 철철 박스가 되어서 맞고 있으면 그 전화 박스가 우리의 고향이 되는 것이다. 여자는 어디에 있을까? 남자가 군대에 다녀왔는데, 여자는 한국말도 다 잊고, 마치 남자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음소리만 내고 있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가 이제는 조용히 납득이 되겠는가?.......
*몇 개의 배경 음악. 벅스의 신보 치유 음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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