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헐리우드와 지금의 필사적인 일본 드라마는 주소지가 어디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은 공기로 산다. 내가 그렇게도 마들레느, 신시아 코헨, 나탈리, 쏘피, 관지림 등을 좋아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엘란트라가 아우토반을 포르쉐와 겨루던 피막(historical negative screen)과 일치한다 하겠다. 더티 댄싱. 그리고 히스패닉 계열의 브레이크 댄스. 우리는 미국과 합성이 되었던 때이다. 북한이 도끼만행 사건을 벌이고자 하는 뜻과도 시절이 맞지 않지 않지만 비슷하다. 미국에는 학자가 있었다. 네온 스바르바스키라고, 철학, 종교, 심미안, 예술, 고고학, 등의 엑스퍼트가 있었다. 우리는 폴 틸리히 보다도, 리처드 로티, 아우얼바하 보다도 그를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는 등장하려고 하다가, 사그라졌다. 그것의 더러운 생태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적들의 더티 댄싱 작가, 혹은 학자라 할 지라도, 학자 그 자체는 유태인 구역에서든, 뉴욕의 할렘이든 간에, 브래드 피트의 세븐 같은, 내가 좋아했던 여자 배우의 종말 영화 같은 것도, 그가 귀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잃지 않고 잊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선생을 내비칠 때마다, 작가는 불시착하고, 목사는 침몰한다. 영화는 다만 부르스 올마이티 같은 것으로, 사람들의 도톰보리 같은 신앙심에 타는 목마름에 바닷물을 퍼먹인다. 혹자, 그러니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터미네이터 원투가 다분 종교적 깊이가 있는 영화이다 주장하곤 한다. 우리는 배를 잡고, 웃지 않고, 웨이브를 추다가, 멈추고는 참았던 웃음을 익스플로전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메트릭스가 종교 영화에 접근했다. 원은 제법 종교적 처녀를 보여주는 듯 했다. 한 사람은 오리엔탈 계열이고, 한 사람은 미국의 보칼리즘 그러니까 복음주의의 전통을 받은 사람이었다. 서로 추적하면서, 그것도 오랜 전통, 사람들에게 영화적인 재미를 선사하다가, 피니시, 그것의 관념적인 아우프헤붕을 꿈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주입된 피가 너무 일본의 오래된 양말 같아서, 벌써 투에서부터 적국의 꼴뚜기들이 총출동하고 만다. 우리들에게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을 주었던 비행하던 문어 비슷한 것들은, 차칫 보면 가와사키의 명차 zrx천사백을 닮기도 했다. 그러니까, 매개는 늘 언제나 성과 성의 8레스타인이나, 항상 이스라엘군이 사람을 태운 폭탄을 쏘는 것처럼 끼어드는 것이다. 백지라고 끼어들지 못하고, 영화라고 대번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백지는 백지가 되기 쉽고, 영화는 사람들의 참 영화가 될 확률이 언제나 높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백지를 들고다니지, 때로는 숱한 아름다운 소설들, 성경 영화를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관념이 영화이다. 영화가 영화로 대접을 받았던 때는, 미국이 영화와 함께 종교적 비전의 처녀적 대상이 되었을 때이다. 관념이 없는 영화의 출몰은 드디어 우리를 말세로 이끈다. 태초에 궁창에 기름을 보탰던 숱한 부잣집 아들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끼의 식사에도, 그것의 믿음을 잃지 않았다. 믿음이라고 하기에는, 어쩔 수 없는 콘크리트. 얼마나 유럽의 일이차 세계대전은 공부도 못하는 인도 사람들의 만행 같은가? 비엔남 워는 그래서 반절은 우리의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인도에 보탬을 주었고, 인도는 나치에 협력했다. 이태리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기에는 바티칸이 너무 관념이 없고, 더군다나 틈만 나면 조선일보 마키아벨리즘에다가 파시즘으로 전진한다. 그러니까 시인이 시를 쓰다가, 검은 새에게 골수를 파먹히는 지옥화가 유일한 현상인 것이다. 나는 아직도 마키아벨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천재였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사람들에게 연필을 주고, 죽을 것이냐 일년을 연습해서 비슷하게 그릴 것이냐 하면 그린다.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두렵다고 수전증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다. 오직 되지 않는 것은, 영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관념으로 영화롭게 사는 것이다. 그것의 피막은, 확실히 데살로니가전서 같다.
우리가 관념의 수입국으로서, 훌륭한 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유러피안적이고 성경적인 것이다. 물론 구미호적이기도 하다.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은, 호주 영화 매드맥스 원투쓰리처럼, 숱한 올도우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의 마지막 같다. 지금 나와 관련하여, 빛으로 나는 슈퍼맨처럼, 손거울에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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