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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고시원촌 바깥에는, 새로운 시대의 한국말 같은 하수도 공사 시멘트 파기 공사가 한창이다.

by 마음대로다 2012. 9. 7.

고시원촌 바깥에는, 새로운 시대의 한국말 같은 하수도 공사 시멘트 파기 공사가 한창이다.

 

 

 

 

 

 

 

 

종말처럼도 느껴지는 난세에, 내 말에는 어텐션 바우하게 하는 힘이 있다. 말바우? 우리의 각자의 머리 위에 플라스틱 작은 그릇에다 물을 담고, 영어수업 시간이 되어 반장이 어텐션 하면, 어텐션하고 있었고, 바우하면, 시키면 바우하는데...... 이런 말표현...... 시대종잡을 수 없는, 설치미술 같은, 무국가적인. 왠지 모르게 일본 학원 영화 같고. 그것은 본체와 존재의 일치라는 말처럼, 저마다의 춘하추동을 열심으로 보내지만, 도저히 상호 일치하지가 않는 것이다. 동경대학교 철학과는 단풍나무 숲을 지면에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영원히? 형용사들이 난립하고, 한국에도 유명한 초콜렛 파격 세일 가게에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에이브이에서 번 돈을 모두 사람들의 추억을 위해 희사하지만, 금세 살인의 추억이 되어버리는....... 그럴 듯한 시너지 효과의 신크레티즘, 절충주의가 어휘마다 빽빽한데, 내 이 선선한 말보다도 문제의 핵심은 아닐지라도 현상을 잘 집어 내는 말들이 있을까?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것은 그라마톨로지의 비극에 이르러서는, 참혹하기만 하다. 한국 사람들은 저마다의 범주 안에서 일본 민화 그림이라고 알려진 화투를 치면서 마음을 유출하고 싶었고, 그것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동경대학교는, 무슨 동경 제대 비슷한, 전시적인 히카리에 대한 염원이 상시 대기 상태에 있는 것 같다. 한국 사람 국창 임방울이란 이름을 두고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두꺼비처럼 모종의 기회를 노려보는...... 하나의 구멍 뿐일 때는, 사는 것이 중요하다. 죽는 것은 중요치 않다. 대신에 산업의 매시브함과, 섹시함은, 화투의 케이스에서와 같이, 한국의 것이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기타 음악을 처음 듣는 것까지 앨범 식으로 듣다보면, 이태리나 스페인 같은 데가 말투가 후앙 질베르또 알베르또 해설라무네 르네상스 이전과 이후에도, 그리고 나중에 보다 발전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의 숨결이. 민족이. 애착이. 이층의 난간이. 소녀의 기도가. 어린시절 소녀와 마음의 애인 했다가, 별다른 관계의 변수가 없어서 결혼도 하게 되고. 목가적인. 어딜 못가는. 그런 속성. 적인. 처음에는 그라마톨로지의 날카로운 학생과 독서의 센스가 유망하다가, 목가와 황소가 되면, 여자는 전투적인 나라의 기둥이 되고, 남자는 빼빼해지는 것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일본 만화를 보면, 아예 처음부터 여자들의 몸은 작은 키의 느낌에 곧 있으면 뚱뚱할 것 같지만 건강하게 잘 뛰어다닌다는 선입견을 심어주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어떤 예술철학 전문가는 이태리나 스페인 지중해 연안 국가의 더블 알이나 더블 티 발음이, 대상 관계의 긴장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프랑스어나 영어에 비하면 다소 유치해보일지라도 정신병원에 잡혀가지 않을 만큼의 발랄함과 사회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보면, 그런 예술철학자가 말하지 않더라도, 묘하게도 기타의 애잔한 혼자만의 티타임 같은 것이 엿보인다. 셰익스피어가 이태리를 배경으로 희곡을 쓴 이유도, 프랑스도 아니고 스페인도 아닌, 셰익스피어가 탬플 기사단의 이태리 사라고사 출신이며, 어머니가 영국인이었는데, 나중에 출생의 비밀이 영국 왕족이어서, 살기 어려워진 소년 셰익스피어가 영국으로 이주하였으며, 거기서 총명함을 인정받아 캔터베리 대주교의 신학 수업을 사사하고, 성과 속의 선택적 갈등에서, 위대한 극작가가 되는 길을 걸었다는, 서양 어느 한 아카이브에 저장되어 있는 보고서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셰익스삐레였다 한다. 여자와 몇번 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했고, 그 깊은 상흔, 나중에 결혼을 해서도 서로 각방을 쓸 만큼 결혼생활이 원할하지 않았다고, 이것은 제법 지금 정식의 기록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뚜레, 떼레, 떼제, 띠뚜, 또또, 로또, 망또, 사또, 모또, 따로또가치, 따랑따랑, 우앙질베르또, 이 모든 말들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로떼 자이언츠, 로떼는 일본 기업? 국경을 초월해서 들려오는 말들인 것이다. 클래식 기타음은 정말 아름답다. 사람의 임사적 순간을 병적인 예술적 높이로도 만일 한 번 정도 여길 수 있다면, 모퉁이를 돌기에 앞서, 들려오는 것 같고, 쌍뚜스, 보쌈, 그곳을 지나면 누군가 나를 때려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내비치는 평범하고 잔잔한 아름다움에 죽음의 매직홀에 빠져들 것만 같다. 시간은 오후 세시 삼십이분의 맥시칸..... 민족은 무철학적 이유의 예술의 그림자일 수 있다. 아비정전이고, 제논이기도 하다. 제논은 제법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독재자의 귀를 잡아 물고는 놓치지 않아 맞아 죽었다거나, 절구에 짖이겨져서 죽었다고 한다. 이 말은, 서양에서는 무척이나 그의 철학적 입장과 시니피에한 것이다. 늘 그렇지만 철학자는 안정적이고, 늙어서 죽는 평안함을 얻는다. 동양에서는 임금이 핑계를 대고 자리를 나가고, 상궁들이 새 의자인 것처럼 자기 임금이 편안할 것인 지를 남자 어른인 제논이 앉아서 평가를 해달라는 문화의 연속으로 산다. 그러나 서양은, 지옥에서 나온 청년의 영혼처럼, 골고다의 언덕, 제논의 시니피에를 가슴에 품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의 쌍티. 그것의 쌍알..... 우리는 철학 공부를 그렇게 해야 한다. 철학이란 말은 무섭다는 기분에서 시작한다. 결혼에 실패하고, 밭에서 무를 재배하는데, 얼마나 그와 같은 과부는 소문이 무섭겠는가? 평생. 하루도 빠짐 없이..... 인간의 능력이고, 화를 만드는 사람을 위해 준비해 놓고 있는 우리들의 옹관석실묘이다..... 끝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은 사물놀이가 있지 않은가? 잔잔한 기타음이 스페인이나 이태리 지중해 연안의 남방 국가의 말과 민족적으로 연속하는 것이라면, 사물놀이는 무슨 어떤 한국어와 연속하는 것일까? 지금 바깥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

 

어디 깊은 굴에, 저렇게 대화를 나누는 종족이 판타지처럼 있다는 것인가? 철학은 무조건 누군가 나를 애매하게 괴롭히는 데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자기의 야사시한 마음을 를 보호하기 위해서.......